한솔이가 탄 유치원차가 떠났다. 마트로 향하던 정민은 현구가 있는 공장께를 보았다. 이른 아침부터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는 쉬지 않고 하늘을 향해 뭉실거렸다. 공장 상공에 떠돌던 두 대의 경찰 헬기 역시 바쁘게 떠다녔다. 경찰병력도 삼천 명이 넘게 동원돼 문이란 문은 모조리 봉쇄한 채 공장을 포위하고 있다고 했다. 간다 해도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
우리나라의 우리사주제도 역사 우리나라 우리사주제도의 효시는 1958년 10월 (주)유한양행이 종업원의 복지향상과 노사협력을 목적으로 회사 간부들에게 공로주를 준 것이다. 당시 유한양행은 사원들에게 희망자에 한해 자사주를 매입하도록 하고 그 대금을 상여금에서 공제하도록 했다. 전통적으로 가족주의적이고 폐쇄적인 경영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던 우리나라의 풍
우리사주제도 명칭 나라마다 달라 우리사주제도는 ‘우리회사주식소유제도’의 줄임말이다. 기업 또는 정부가 각종 정책적 지원을 제공해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의 주식을 취득·보유하게 하는 제도다. 종업원주식소유제도(Employee Stock Ownership Plan: ESOP, 종업원지주제도) 또는 종업원주식제도(Employee Share S
ⓒ 매일노동뉴스 정민은 정문 옆 가까이에 붙은 쪽문 근방으로 갔다. 초소까지 높고 둥글게 이어져 있는 철조망 앞에 섰다.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자기야 나 도착했어. 어서 나와. 그래 금방 갈게. 현구가 답신을 보내왔다. 아직 저녁 전이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자장면. 정민은 미소를 지으며 정문 맞은편에 있는 중국집 황제
"와 재밌겠다.” 한솔이가 소리를 지르며 깔개가 길게 깔린 공장 안에서 뛰어다녔다. “재밌긴 뭐가 재밌냐 이 바보야.” 역시 호기심 어린 얼굴로 공장 안 조립라인을 구경하던 한벗이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고민이 있는 얼굴이었다. “아빠. 아빠는 산 자에요 죽은 자에요?” 바닥에 깔린 깔개의 은박지 모퉁이를 잡아대던 한벗이 인상을 잔뜩
단체협약이 경영참가의 최후 보루 아니다 노사 간 합의사항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노동조합 활동의 일부이다. 노동조합의 모든 단체교섭 사항과 활동은 단체협약에 정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노동조합의 경영참가 활동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공기업을 중심으로 단체협약 해지를 통보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유치원차가 출발했다.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든 정민은 느리게 걸어 집으로 왔다. 뒤집어져 있는 큰 아이 한벗의 슬리퍼,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은 자신의 운동화를 바로 놓고 이젠 날이 덥다며 남편 현구가 던져놓고 간 잠바를 주워 소파에 걸쳤다.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설거지통에는 네 식구가 한 끼 식사를 마치고 담가놓은 그릇들이 수북했다.
경영참가를 전술적으로만 활용해선 안 된다 기업 경영참가에 대한 노동조합의 노력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성과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최근 일부 노동조합이 단체협약을 통해 사외이사 추천을 명문화했지만 제대로 유지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해마다 노동조합은 경영진에게 경영참가 조항에 대해 명문화할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대
나는 환경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국회환경노동위원회에서 활동하기 전까지 내가 생각했던 환경 문제를 굳이 찾자면 현장의 탁한 공기나 소음, 화약약품 냄새 등이었다. 환경 정책을 담당하는 이정환 보좌관으로부터 환경 문제에 자주 나오는 용어와 기초적인 이해에 대한 설명을 듣고, 환경운동을 하는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1주일에 1번씩 만나 강의를 들었다. 이런저런
2000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이 133석을 얻고 민주당은 115석을 얻었다. 나는 민주당 비례대표 7번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여소야대가 된 것이 무척 아쉬웠다. ‘여당 안의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이 제 목소리를 내려면 어쨌든 여당이 강력해야 된다. 야당과 싸우느라 고군분투하는 여당을 상대로 안에서 목소리를 높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국회의원이 된 것을 놓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노총 조합원들에게 정치권이나 공직으로 가지 않는다고 여러 번 약속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첫 조각 때 노동부장관으로 내 이름이 거론되자, 나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행정부로 가지 않는다”고 일축했을 정도였다. 물론 나는 노동조합운동을 해 온 사람으로서, 노동
세상은 공평한 것인가, 아니면 악랄한 것인가. 50년 만의 정권교체는 하필이면 건국 이래 최초의‘국가부도’사태와 함께 왔다. 그것은 곤혹스럽고 비참한 일이었다. 사실“한국노총이‘정책연합’을 통해 국민회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를 밀었고, 정권교체에 일익을 담당했다”라고 얘기하면 쑥스러워지는 게 사실이다. ‘정책연합’은 한국노총‘조합원’박인상의 이름으로 진행
세상은 공평한 것인가, 아니면 악랄한 것인가. 50년 만의 정권교체는 하필이면 건국 이래 최초의‘국가부도’사태와 함께 왔다. 그것은 곤혹스럽고 비참한 일이었다. 사실“한국노총이‘정책연합’을 통해 국민회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를 밀었고, 정권교체에 일익을 담당했다”라고 얘기하면 쑥스러워지는 게 사실이다. ‘정책연합’은 한국노총‘조합원’박인상의 이름으로 진행됐
세상은 공평한 것인가, 아니면 악랄한 것인가. 50년 만의 정권교체는 하필이면 건국 이래 최초의 ‘국가부도’ 사태와 함께 왔다. 그것은 곤혹스럽고 비참한 일이었다. 사실 “한국노총이 ‘정책연합’을 통해 국민회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를 밀었고, 정권교체에 일익을 담당했다”라고 얘기하면 쑥스러워지는 게 사실이다. ‘정책연합’은 한국노총 ‘조합원’ 박인상의 이름
역사적 인간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한국노총 개혁이다. 조선공사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지만 부산의 작은 철공소를 적(籍)으로 두고 있어서 조직도 돈도 없던 내가 한국노총이 위원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1996년 3월 제16대 한국노총 위원장으로 취임했을 때 노총은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안으로는 1987년 7월 노
역사적 인간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한국노총 개혁이다. 조선공사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지만 부산의 작은 철공소를 적(籍)으로 두고 있어서 조직도 돈도 없던 내가 한국노총이 위원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1996년 3월 제16대 한국노총 위원장으로 취임했을 때 노총은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안으로는 1987년 7월
역사적 인간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한국노총 개혁이다. 조선공사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지만 부산의 작은 철공소를 적(籍)으로 두고 있어서 조직도 돈도 없던 내가 한국노총이 위원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1996년 3월 제16대 한국노총 위원장으로 취임했을 때 노총은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안으로는 1987년 7월 노동
1988년 5월, 나는 금속노련 위원장이 됐다. 노동자를 둘러싼 상황은 1970년대와는 전혀 달랐다.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민주화’가 이뤄졌고, 노동조합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88년 한 해만 무려 2천56개의 노동조합이 생겼다. ‘개혁’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개혁은 어떤 점에서는 혁명보다 더 고통스럽다. ‘파괴’ 없는 ‘건설’이란 여
조직전략과 일상적 대중운동 공장의 조직은 철저하게 생산라인을 따라 이뤄진다. 그것이 공장에 세워진 노동조합을 규정한다. 노동조합은 해당 기업의 노동자라는 제한적인 사람들의 단일한 조직이었다. 공장 밖과는 철저하게 단절됐다. 경제위기가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해고된 실업자, 장기실업자, 청년실업자, 비싼 등록금에 자살까지 강요당하는 대학생,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