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국회의원이 된 것을 놓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노총 조합원들에게 정치권이나 공직으로 가지 않는다고 여러 번 약속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첫 조각 때 노동부장관으로 내 이름이 거론되자, 나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행정부로 가지 않는다”고 일축했을 정도였다.
물론 나는 노동조합운동을 해 온 사람으로서, 노동조합 간부들이 공직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잘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다져진 경험과 식견을 나라와 노동자를 위해 쓰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일 수 있다. 실제 내 힘이 닿는 대로 노조간부들을 공직에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나만큼은 노동조합운동으로 나의 역할을 끝내고 싶었다.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왠지 그렇게 하는 게 대한조선공사에서 임시공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한 나에게 더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1998년 12월 나는 그동안 미뤄 뒀던 건강검진을 받았다. 1997년 정책연합을 밀고 나가고, 1998년 노사정위원회에서 ‘노사정 대타협’을 이루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탓일까.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검진을 받아 봐야 하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짬을 내기 힘들었다.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조선공사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는 해동병원의 조평래 박사를 찾았다.

“위암이라고요?”

위암이라고 했다. 그 순간 나도 얼이 나갔다. 고통과 죽음이 떠올랐지만, 그보다는 내가 한국노총 위원장으로서 벌여 놓은 수많은 일들이 나를 짓눌렀다. 이걸 다 어떻게 하라고, 하필이면 이럴 때에…. 조 박사는 다행히 초기에 발견했다고 강조하면서, 사색이 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아내의 얼굴을 보며 최대한 빨리 수술을 하자고 권했다.

수술? 그렇다면 당장 쓰러지거나 죽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그 말을 듣자 서서히 머리가 맑아졌다.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밝혀야 하나. 내가 아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식으로든 동요가 불가피할 것이다. 총파업, 정책연합, 정권교체, 외환위기, 노사정 대타협…. 이 모든 것이 아직은 ‘현재진행형’인데, 내가 여기에서 멈춘다면….

고민 끝에 나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한국노총의 동료나 후배들을 믿지 못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나는 야당인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와 정책연합을 한 주체로서 새로 탄생한 정부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또 한국노총은 위원장의 자리가 큰 조직이라 인사에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나면 혼란이 생길 가능성도 있었다.

이것은 내 평생의 꿈과도 관계된 문제였다. 나는 한국노총 위원장으로서 더 일을 하고 싶었다. 총파업과 정책연합은 이제껏 그 어떤 한국노총 위원장도 행사하지 못했던 힘을 내게 줬다. 그 힘은 신뢰와 비전이었다. 이제야말로 내게 명실상부한 힘이 주어진 것이다. 한국노총은 이 힘을 더 사용해야만 했다.

예정돼 있던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스웨덴으로 가서 5박6일의 출장을 소화한 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내와 세 아이들, 그리고 큰며느리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수술은 조평래 박사가 직접 집도했다. 위의 절반을 잘라냈다. 그만큼 암세포가 퍼진 것은 아니지만 수술 이후 전이를 염려해서라고 했다. 조 박사는 수술로 잘라낸 조직의 부위를 다시 검사해 보고는 “앞으로 조심만 하면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겠다”며 우리 가족을 안심시켰다. 한 달 가량 병원에 입원했다. 한국노총에는 복막염이라고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조 박사 역시 마음을 졸였을 텐데, 고맙기가 한량없다.


“정부를 도와주십시오”

한국노총으로 돌아왔다. 수술 후 부실해진 체력이라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개운했다. 오히려 더 정력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용기를 얻어 재선에 도전했다. 마침 한국노총 내 분위기 역시 다른 대안을 찾지 않는 눈치였다. 1999년 2월25일 열린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나는 한국노총 역사상 처음으로 위원장에 단독 입후보해 당선됐다.
당초 3년 임기를 끝까지 채울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2000년 10월까지 2년 정도를 더 하고는 마무리를 한 뒤 후배에게 길을 열어 줄 요량이었다. 이후 귀농을 하든지 이것도 힘에 부칠 것 같으면 공기 좋은 곳에서 휴양을 할 생각이었다. 실제 어느 지역으로 갈 것인지를 놓고 꽤 고민했었다.

경제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구조조정의 고삐는 느슨해지지 않았다. 98년부터 진행된 금융부문 구조조정에 맞선 금융노련의 투쟁에 이어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해외매각, 인원감축, 임금삭감 추진으로 빚어진 체신노조와 전력노조의 투쟁으로 나는 거의 매일을 집회 현장에서 보냈다. 담배인삼노조가 노조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한 집회를 대전역에서 크게 열 정도로 공공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은 심각했다.
어렵사리 3기 노사정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러나 전임자임금 문제가 불거졌고, 나는 민주당사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급기야 정책연합 파기선언까지 했다. 노사정위에도 나가지 않았다.

이렇게 싸우다 보니 연말이 되자 체력의 한계를 절감했다. 나야 현장에서 쓰러지면 더없는 영광이지만 아내는 어떻게 할 것인가. 결혼 뒤 바깥에서 돌아다닌 시간이 워낙 많아 아내는 혼자 지낸 시간이 더 많았다. 은퇴하면 젊어서 못 나눈 정을 나누며 도란도란 살 생각이었다. 아내를 끝까지 울리면 어떻게 하나. 이런 고민으로 연말을 심란하게 보내던 중에 김대중 대통령의 특보인 정균환씨가 나를 찾아왔다.

“국회로 와서 국민의 정부를 도와주십시오. 이번 총선에서는 여당이 이겨야 됩니다.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런 말 꺼내지도 마세요. 아시다시피 나는 몇 번이나 한국노총 조합원들에게 정치권으로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림도 없는 소리 마십시오.”

진퇴양난

나는 냉정하리만치 딱 잘라 말했다. 한국노총 위원장을 그만두고 정치권으로 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정치권으로 가지 않는다고 누누이 밝혔기 때문에 내게 그런 제의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데 정균환 특보는 참 끈질겼다. 집으로 계속 찾아와서 나를 설득했다. 민주당에서 나를 영입하려 한다는 소식이 한국노총에 전해지자 중앙정치위원회는 내 문제를 안건으로 채택했다.

그래도 나는 국회로 갈 생각이 없었다. 집으로 찾아오는 정균환 특보에게 단호한 모습을 보이니까 그도 포기를 하는 듯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까지 마련됐지만,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 국회로 가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복막염 수술 이후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거짓말까지 했다.

그런데 총선을 앞두고 한국노총 중앙정치위원회는 노동자 국회의원을 최대한 배출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일부 간부들은 내가 나서면 일이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즉 한국노총 출신 국회의원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세 명이 되면 정치권에서 노동계의 입지가 더 커질 것이고 이후 노동자 독자정당 건설의 디딤돌이 될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한국노총 위원장이 건강이 좋지 않아 투쟁하는 현장에 나설 수 없다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 그런 뒤에는 조합원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은퇴하는 게 맞다. 하지만 ‘한국노총을 위해 할 일이 더 있다’는 한국노총 일부 간부들의 설득은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나 혼자 국회의원이 돼서 할 일이 있겠습니까?”

정균환 특보에게 국회의원 자리를 더 내놓으라고 요구했더니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했다. 민주당은 박인상 위원장 영입은 대환영이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민주당에는 민주노총 위원장직무대행을 맡았던 배석범, 현대엔진 출신으로 민주노총 사무총장이었던 권용목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들어와 있었다. 민주당은 노동자 출신에게 국회의원을 더 배정한다면 이 분들이 돼야지 한국노총 출신은 더 이상 어렵다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내가 한국노총 출신만 고집하는 것도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 돼 버렸다. 한국노총 출신에게 배정된 자리가 적다고 국회로 가지 않겠다는 모양새가 돼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1998년 지방선거와 한국노총

나는 한국노총 인적쇄신의 기회를 1998년 6월에 치러진 지방선거로 삼았다. 한국노총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사람들 중에는 정치권으로 가려는 의지가 있는 인사들이 꽤 있었다. 이들이 공직으로 진출하는 것은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다. 공동정권을 구성하고 있는 민주당과 자민련에 강하게 협조를 요청했다.

1998년 지방선거에서 한국노총 출신 출마자는 모두 79명(기초단체장 2명, 광역의회 35명, 기초의회 42명)이었다. 그 가운데 41명(기초단체장 1명, 광역의회 지역구 7명, 광역의회 비례대표 10명, 기초의회 23명)이 당선됐다. 3년 전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는 노동계 후보로 104명을 지원해 44명이 당선됐는데, 이와 비교하면 당선율이 상당히 높아졌다.범양냉방 위원장 출신으로 군포시장에 당선된 민주당의 김윤주 후보, 석탄공사 화순광산노조의 임호경 전남도의회 후보, 인천시의회 자민련 비례대표 1번으로 광역의회에 진출한 한창석 후보 등은 공천 과정에서부터 선거운동까지 한국노총에서 지원을 많이 했다.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군포에서 노동자 출신 시장이 나올 수 있도록 김윤주 후보에게는 각별히 신경을 썼다. 선거 즈음에 한국노총 중앙위원회를 두 차례 군포에서 열었고, 나도 현장을 다니며 뛰었다. 김윤주 후보가 노동자 출신이다 보니 처음 출마할 때는 인지도가 높지 않았는데, 당선된 뒤 임기 동안 시정을 잘 펼친 덕분에 2002년에는 자력으로 재선에 성공하기도 했다. 임호경 위원장은 화순군수를 원해서 내가 김대중 대통령께 설득을 하러 갔을 정도였다. 임 위원장은 결국 지역구 국회의원과의 마찰로 도의회로 진출하게 됐다.

해결사

나는 한국노총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공직으로 진출하도록 도왔다. 한국노총 최상용 상임부위원장은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으로 나갔다. 김영자 여성국장은 일산장애인직업훈련원장으로, 부산시협의 정학균 의장은 노동부 산하 한국노동교육원 사무총장으로 발령받았다. 선배들이 공직에 진출해 생긴 빈자리는 후배들이 채웠다.

정책연합 이후 내게 ‘비공식적인’ 힘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국무총리나 노동부장관은 한국노총 사무실을 방문해 국정과 노동계 현안에 대해 나와 얘기를 나누었다. 정부 고위관료나 정치권 인사들도 나와 만나거나 전화로 통화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힘을 내 개인이나 피붙이를 위해 쓴 적은 맹세코 한 번도 없다.

다만 고백컨대 조직을 보위하기 위해서는 썼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검찰의 칼날은 매우 날카로워지는 경향이 있다. 어느 날 한국노총의 한 산별 지역조직과 관련해 검찰이 수사에 나설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검찰에 연락했다. 조사 결과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무사히 지나갔다. 정권 탄생에 일익을 담당했다고도 할 수 있는 한국노총인데, 그 정권으로 인해 한국노총 조직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손을 봐도’ 우리 스스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조합원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리고 몇몇 산별에서 관계 부처와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해 해당 장관에게 전화를 한 적도 있다. 이러다 보니 산별대표자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를 ‘즉석 해결사’라고 불렀다. 나의 이러한 행위가 부당한 것을 합당한 것으로 만들거나, 조합원들의 힘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떨어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추진했던 인적쇄신의 대상에 나 자신이 오른 셈인데, 나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었다. 결국 한국노총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나를 정계로 보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강성천 자동차노련 위원장, 이광남 택시노련 위원장, 김성태 정보통신노련 위원장, 현기환 정치국장 등이 적극적으로 밀었다.

2000년 2월28일 내가 민주당에 입당하자 화학노련과 금융노련은 성명서까지 내면서 반대했다. 반대하는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로 조직 내 민주적 결정 과정이 없었다는 점, 둘째로 조합원들과의 약속을 어겼다는 점, 셋째로 왜 민주당이냐는 것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지적에 대해서는 이제까지의 이야기로 대신하겠다. 내 건강상의 문제가 가장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툭 털어놓을 수 없었다. 이 점, 동지들에게 늦었지만 이해를 구한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민주당이냐’는 대목에서는 나도 의견이 있다. 2000년 1월 창당한 민주노동당을 제외하고는 당시로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심지어 내가 청와대와 민주당에 대고 ‘배신정권’이라고까지 했지만, 그래도 민주당이 노동계의 요구를 가장 잘 이해했다. 실천을 할 수 없었을 뿐이지….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면 나는 한국노총 위원장으로서 임기를 채웠을 것이다.

나의 참모였던 이정식 국장은 내가 국회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개혁적인 노동정책을 쏟아 냈던 노진귀 정책본부장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반대했을 것이다. 노동계를 후원했던 광운대 법학과 윤성천 교수는 “안 갔으면…”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아직 대한민국의 노동자와 한국노총 개혁을 위해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 말도 맞다. 특히 조합원들에게는 너무 죄송하고 미안했다. 그렇지만 당시 내 건강 상태로는 더 이상 한국노총 위원장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후배들에게도 길을 열어 줘야 했다.<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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