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이 133석을 얻고 민주당은 115석을 얻었다. 나는 민주당 비례대표 7번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여소야대가 된 것이 무척 아쉬웠다. ‘여당 안의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이 제 목소리를 내려면 어쨌든 여당이 강력해야 된다. 야당과 싸우느라 고군분투하는 여당을 상대로 안에서 목소리를 높이려면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많은 망설임 끝에 국회로 왔지만 노동계의 목소리를 내기에 더 어려운 조건이 된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노동조합운동을 하면서 항상 동료들과 함께 조합원들과 어울려 지내다 혼자 국회에 와 있으니 어색했다. 갑자기 내 처지가 적막강산이 된 느낌마저 들었다. 국회 사무실에는 한국노총에서 정책을 담당했던 김종각, 역시 한국노총 출신인 우태현과 정현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에서 활동하던 시절 비서로 있었던 전재수, 재생공사노조 사무장이었던 박진, 조한천 의원실에서 환경정책을 담당했던 환경전문가 이정환, 김승현, 김희신, 박창식이 함께했다.

 
 
적막강산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확실하게 떠오르는 답이 없었다. 국회의원에게 대단한 권력이 주어진 것 같지만 한 명의 국회의원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게다가 나는 초선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직을 맡지 않았기 때문에 국회의원을 움직일 수 있는 국회의원도 아니다. 그렇다면 민주당 국회의원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민주당 국회의원은 많아도 노동계를 이해하고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국회의원은 극소수다.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그런데 오랜 세월 노동운동을 하면서 내 몸에 배인 ‘낙관주의’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사용자나 정부와 투쟁하고 협상하면서 이제 정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느끼고 판단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 힘의 원천은 단결이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조합원들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노동자 국회의원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말고 나아가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자랑이자 긍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보자.

한국노총 위원장 시절 정부와 여당의 노동정책에 실망해 격렬하게 반대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냉정하게 노동정책을 찬찬히 되짚어 봤다.
한국노총과 나는 김대중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지만, 정작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맞붙어 싸웠다. 김대중 정권이 우리를 배신했다기보다는 외환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국면이 형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공공부문 민영화나 해외매각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은 없었을까. 조금 양보를 해서 어쩔 수 없어 추진을 하게 됐다고 하더라도 노동자들의 희생이 그렇게 커야만 했을까. 정부와 여당이 ‘돈’이 아니라 성의를 다했다면 희생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약속한 실업자 구제정책과 사회안전망 확충 문제는 왜 지켜지지 않는 것일까. 비정규직 문제는 대체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이런저런 복기를 한 끝에  정부와 여당이 노동정책부문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여당 의원이지만 의정활동의 기조를 ‘할 말은 한다’로 정했다.

나의 첫 번째 대정부 질의내용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공무원노조를 허용할 의향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답변은 받은 국무총리는 “검토해 보겠습니다”라는, 의례적인 답변을 했고  여당의 보수적인 의원들은 한국노총 위원장 시절의 나를 생각하며 약간은 걱정스런 눈초리로 지켜보다 ‘역시나’ 하는 표정이 됐다.  

서영훈 대표 초청으로 초선의원 모임이 마련이 됐을 때도 나는 “의약분업과 롯데호텔 공권력 투입 과정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고 “당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시각이 곱지 않다”고 비판했다.
 
오늘은 ‘야당’, 내일은 ‘여당’

이런 의정활동의 원칙은 국회 상임위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했다. 나는 제16대 국회의 전반기와 후반기, 합쳐서 4년 모두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일했다. 재경위나 건교위 같은 상임위에 비해 환노위는 힘도 없고 인기가 없는 상임위였지만, 나는 1~3지망 모두 환노위를 적어 냈다. 

16대 전반기 환노위 위원들은 유용태·신계륜·이상수·이호웅·정균환·한명숙(이상 민주당), 김문수·김락기·김성조·박혁규·오세훈·이주영·전재희·홍사덕(이상 한나라당), 정우택(자민련) 등이었다. 대부분 개혁적인 성향에다 노동계를 아는 의원들이었다. 야당이었지만 김문수 의원과 김락기 의원은 한국노총에서 같이 활동했던 적이 있었다. 전재희 의원은 행정고시 최초의 여성 합격자로 노동부에서 국장을 지낸 전문가였다. 오세훈·이주영 의원도 노동계를 이해하는 분들이었다. 어쨌든 ‘통하는’ 게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멤버’가 좋아도 당론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환노위는 늘 오락가락했다. 2000년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싸웠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과잉진압 논란과 관련해 환노위의 한나라당 의원들은 정부와 여당을 거세게 몰아붙였고, 정치쟁점으로 떠올랐다. 나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경찰의 진압 과정이 찍힌 비디오를 보다 보니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결국에는 참다못해 나도 ‘야당 의원’이 돼 정부와 여당을 쏘아붙였다.
 
“양극화는 막아야 합니다!”

이렇게 노동자 편을 들어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던 한나라당 의원들도 법안이 나오면 사용자 편이 됐다. 환노위는 모성보호 관련 근로기준법 개정안(2000년 11월 한명숙 의원 발의)을 두고 8개월 동안이나 씨름을 해야 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늘어난 산전산후휴가 30일 동안의 비용을 사용자가 덜 부담하는 법안을 내놓고는 계속 버텼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나는 다시 ‘여당 의원’이 됐다. 계속 이런 식으로 흘러가다 보니 여당의 의원들은 나를 같은 당의 의원이라기보다는 좋은 선배 혹은 ‘자유인’으로 바라봤다.  

16대 국회 때 환노위에서 통과된 노동 관련 주요 법안으로는 2001년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임금 지급금지를 유예하는 내용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 2002년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고용허가제법) 제정안,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내용(주 5일제)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있다.  
 
‘복수노조 유예’는 노사정위에서 노사 합의가 돼 국회로 넘어온 것이었다. 환노위는 절차에 따라 통과만 시키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매일노동뉴스에 ‘1996년에 단위노조까지 복수노조를 허용하자고 한 박인상 의원은 왜 찬성을 했나’는 기사가 나왔다. 복수노조 허용에 찬성하는 내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 같아 섭섭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매서운 눈초리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용허가제법은 이재정 의원이 발의했지만 나도 신경을 많이 썼다. 법안을 놓고 연 공청회를 개최하기로 했는데, 내가 사회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공청회 장소에서 외국인 근로자 연수를 담당했던 중소기업중앙회와 연수제도의 비리를 제기한 종교단체 사이에 싸움이 붙을 뻔하기도 했다. 결국 이재정 의원의 법안은 사용자와 한나라당의 의견을 반영해 대폭 수정됐다. 부족한 내용이지만 여야의 대선 공약이었고, 10년 동안 끌어온 문제라 통과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고용허가제와 연수제도를 병행실시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고, 나는 참다못해 회의장에서 화를 벌컥 냈다.

2002년 통과된 주 5일제 법안에 대해서도 나는 격하게 반대했다. 주 5일제는 일자리 나누기라는 고통분담 차원에서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외환위기를 벗어나면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논의의 초점이 바뀌었다. 좋은 뜻에서 출발한 논의이지만, 자칫 노동자들 사이에 양극화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어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노동을 알리자

정부가 제출한 법안에서 시행시기, 임금보전, 단체협약·취업규칙 변경, 연·월차 생리휴가제도가 쟁점이 됐다. 막바지에는 시행시기를 놓고 첨예하게 다퉜다. 최종 법안은 20인 미만 사업장에는 2010년에야 주 5일제를 시행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나는 단계별 도입을 인정했지만, 최대한 단축돼야 한다는 입장에서 2008년을 기한으로 제시했다. 노동자들 사이에 양극화를 부르는 데 한몫하게 될 법안이 그대로 통과되는 것을 도저히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어 회의장에서 나와 버렸다. 

내가 대표로 입법발의한 6개의 법안 가운데 노동 관련 법안은 3개였다. 사립학교 직원들에게도 고용보험을 확대하는 내용의 법안은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의 차수련 위원장이 건의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국·공립학교 직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사립학교 재단에서는 ‘재단이 위기에 봉착한다’며 반대했다. 사립재단의 반대는 예상했던 바이지만 보험노련과 얽혀 있는 문제들도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추진하지 못했는데 이후에 노동조합과 사립재단 간 합의로 이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다. 

하역노동안정 및 보호에 관한 법률안은 항운노련의 의견을 받아 만든 것인데, 노동부에서 ‘항운노조가 업무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은 곤란하다’고 선을 그어 버렸다.

한국노동교육원법 개정안은 노사 당사자로 한정돼 있던 교육대상자를 일반 국민으로 확대하는 내용이었다. 이 법안에 대해서 관련부처인 노동부는 개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당장에 큰 이해관계가 걸린 법안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쉽게 찬성으로 돌아섰고, 한나라당과 자민련 의원들도 반대하지 않아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안이 통과가 돼 당장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자가 아닌 국민들에게 ‘노동의 세계’를 알리고 이해를 넓히는 데 장기적으로는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정감사 때가 되면 피감기관만이 아니라 국회의원들도 긴장을 한다. 차기를 예약하는 ‘스타’ 의원이 탄생하기도 한다. 나는 지역구 국회의원도 아닌 데다, 재선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한 방 터뜨리기보다는 그해의 노동 문제를 갈무리하고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데 힘을 쏟았다.
 
‘스타’보다는 정책을

2000년 국정감사 때는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를 위한 정책 과제’, ‘2000년 상반기 노동행정의 문제점과 개선대책’ 등 3권의 정책자료집을 냈다. 네 번의 국정감사를 치르는 동안 노동관련 정책자료집만 10여권을 만들었다.

국정감사 때는 수없이 현안 가운데 비정규직 문제와 부당노동행위 문제에 집중했다. 전국여성노조 산하 골프장 경기보조원들의 문제, 레미콘 기사들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알리고 해결점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네 번의 국정감사 내내 삼미특수강 노동자들의 고용투쟁에 주목했다. 그들의 투쟁 중간에 임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좀 준 것 같다. 삼미특수강의 경우 예전 삼미특수강노조 제선수 위원장과는 금속노련 시절부터 함께 일을 했던 사이였고, 고용투쟁을 시작하면서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져 민주노총으로 갔지만 비대위 김현준 위원장으로부터도 자료를 계속 받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지원한다고 했는데, 도무지 풀리지가 않았다.

나는 한국노총 위원장 출신 국회의원이었지만, 민주노총 문제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2004년 17대 국회 때 민주노총이 배타적 지지를 하는 민주노동당 의원 10명이 국회에 입성했지만, 16대 때는 민주노총 출신 국회의원이 없었다. 나는 롯데호텔 파업으로 구속된 단병호 위원장을 비롯해 김대중 정권 들어 노동 문제로 법적 처벌을 받은 1천300여명의 노동자들에 대한 사면 복권을 추진했다. 당도 ‘대사면’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굽히지 않는 바람에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독’이 된 보조금

 특히 금속노련에 같이 있었던 이석행과 보건의료노조 차수련 위원장이 찾아와 얘기한 문제들은 크든 작든 반드시 챙겼다. 민주노총 경남본부의 이흥석 본부장이 본부 건물 문제를 의논해 왔을 때는 국고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나름 거들었다.

나는 국회에 있으면서 한국노총과 선을 그으려 했다. 후배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데 선배가 국회의원이랍시고 나서면 부담이 될 것 같아서다. 노동정책 관련해서도 당시 노사정위에서 논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반면에 한국노총 건물 문제는 내가 나서서 풀었다. 지금 한국노총 건물이 있는 터는 이전에 정부로부터 받아 놓은 땅이었다. 그 자리에 건물을 지으려면 다시 보조금을 받아야 하는데, 이게 좀체 나오지 않았다. 당시 이남순 위원장이 새 건물을 짓는 데 의욕을 보였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 함께 가기도 했지만 보조금 문제는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보다 못한 실세 동교동계 의원 몇 분들이 ‘민주당과 정책연합을 한 박인상이가 덕 본 게 뭐 있느냐’고 나서 줬다.

그런데 새 건물을 지으면서 비리가 터졌다. 한국노총은 새 건물에 입주할 때 이사 떡도 못 돌리고 야밤에 슬쩍 들어갔다. 한참 뒤, 한국노총 근처에 갈 기회가 있어 새 건물에 들러 구경하다 이용득 위원장과 이야기하던 참에 “좋은 집에 이게 무슨 꼴이냐”고 탄식을 했다. 내가 후배들을 도와준다고 한 게 독을 준 것 같아서 괴롭기까지 했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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