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공평한 것인가, 아니면 악랄한 것인가. 50년 만의 정권교체는 하필이면 건국 이래 최초의‘국가부도’사태와 함께 왔다. 그것은 곤혹스럽고 비참한 일이었다.
사실“한국노총이‘정책연합’을 통해 국민회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를 밀었고, 정권교체에 일익을 담당했다”라고 얘기하면 쑥스러워지는 게 사실이다. ‘정책연합’은 한국노총‘조합원’박인상의 이름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불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당시 한국노총의‘실력’을 감안할 때 최선의 방도였다. 일단 물꼬가 트이자 조합원들은 평소 자신들이 느끼고 갈구해 왔던 바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런 점에서 50년 만의 정권교체는 한국노총 개혁과 맥락을 같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권교체라는 기쁜 일은‘국가부도’사태라는 정말 나쁜 일과 함께 왔다. 어쩌면 정권교체는 국가부도라는 미증유의 난리를 수습하는 역사적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뒤의 일을 생각하면 이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난리를 부른 사람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민주화의 경제적 과실을 챙겼고, 그것을 토대로 10년 뒤 다시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어쨌거나 이 과정에서 양극화가 사회의 대세로 자리 잡았고, 비정규 노동자가 생겨났다. 그것은 노동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일이었다.
한국노총은 정책연합을 통해 50년 동안의 정치적 예속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개혁의‘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부도 사태는 한국노총이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더 밑바닥의 노동자와 소통하는 것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이야말로 개혁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국가부도 사태가 만들어 놓은 정세는 지금도 여전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이 바로 후배들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시점 아닌가.

 
 
전국노조대표자회의가 열린 다음날인 12월5일 부산으로 와서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노동조합 간부들을 만났다. 다들 한국노총의 정책연합 대상자이자 친노동자 후보가 김대중 후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전의 대선에서는 ‘김대중’보다는‘김영삼’을 지지했던 이들인데도 거부감을 갖지 않고 나를 응원해 줬다. 부산에서 ‘잠행’중일 때 국민회의의 한 국회의원이 나를 찾아와‘김대중 후보를 도와 달라’고도 했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면담이 내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당시 야당이던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정책연합을 하는 것과 관련해 한국노총 산별대표자들과 지역본부장들을 모아 놓고 찬반투표를 했으면 아마 6대 4 정도로 찬성이 많았을 것이다. 조합원들은 7대 3 정도 됐던 것 같다. 야당 후보와 정책연합을 하는 것에 대해 다수가 찬성했으니, 그대로 추진하는 것이 민주주의일 것이다.

한국노총 조합원 박인상

그런데 그것이 반드시 옳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야당 후보와의 정책연합에 반대하는 한국노총의 임원들과 조합원들의 뜻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전체 조합원들의 이익에 어긋난다고는 하지만 그 뜻가지도 잘 어루만져야 대중조직인 한국노총이 깨지지 않는다.

나는 정책연합을 추진하되, 조직을 분열시키지 않는 방법을 생각했다. 한국노총 위원장직을 사퇴한 뒤 개인 자격으로 김대중 후보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히기로 했다. 정책연합을 추진하는 쪽에서 무엇인가를 내놓아야 정책연합에 반대하는 임원과 조합원들도 어느 정도 수긍할 것 같았다.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지 않더라도, 그 책임은 개인인 내게만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정책연합에 반대하는 쪽에서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정식 국장에게 한국노총 전 위원장이자 조합원인 박인상 개인의 이름으로 김대중 후보에 대한 지지의사를 발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그런 뒤 기자회견문이 아닌 유인물에 들어갈 서명을 하기 위해 12월8일 서울로 갔다. 12월9일 오전 11시 30분, 나는 이남순 사무총장을 직무대행으로 위촉하고는 국노총 조합원 자격으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며 당선을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 한국노총 조합원 박인상”
정책연합 찬성파도 반대파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해결책이었지만, 양쪽 모두에게 조직을 깰 수 있는 명분은 주지 않았다. 아쉽기는 했지만 조직의 분열을 막고 정책연합을 이루기 위한 차선의 선택이었다.

“위원장님, 잘하셨습니다”

한국노총 전 위원장 명의의 유인물을 기자들에게 배포한 후 대구로 내려갔다. 이어 한국노총 위원장의 승용차를 서울로 돌려보냈다. 어쨌든 나는 이제 한국노총 위원장이 아니었다. 나는 한국노총 전 위원장이자 조합원의 자격으로 대구지역의 단위노조 대표자들
과 간부들, 지역본부 임원들을 만났다.

“한국노총의 노동정책 요구를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대통령후보는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당선 가능성이 낮습니다.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지지해야 합니다.”
“위원장님, 맞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생각지 못했던 의외의 반응이었다. 김대중 후보에 대한 나의 지지발언에 찬성한다는 것이다. 대구에서 포항으로 갔다. 포항에서도 마찬가지로‘위원장님 밀고 나가셔야 합니다’는 얘기를 들었다. 기운을 얻는 나는 부산의 변두리 여관에 거처를 정하고는 현기환 정치국장과 함께 경주∙울산∙양산∙창원을 돌면서 영남지역 단위노조 대표자와 간부, 지역본부와 지부 임원들을 만났다.

내 나름으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의 선거운동을 하러 다닌 것인데, 그 와중에 내 고향인 사천을 지나치게 됐다. 고향 분들에게 김대중 후보 지지를 부탁할 겸 인사를 하러 갔다. 누나들은 “동네 사람들 말로는 김대중 후보는 당선이 안 된다는데”라며 걱정이 이만
저만한 게 아니었다. 사천에 숙소를 정하려다가 혹시나 잡힐까 싶어 근처 고성 옥천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당시 검찰은 나를 비롯한 한국노총 몇몇 간부들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로 소환장을 발부한 상태였다.

저녁때가 지났지만 식사를 못했는데, 다행히 옥천사 근처에 식당이 있었다. 밥을 먹다가 식당 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화제는 대통령선거로 옮아갔다. 경상도에 사시는 분인데도 “이번에는 정권교체가 꼭 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내게서 옥천사에 묵게
된 연유를 듣더니 “힘내시라”고 격려까지 해 줬다. 전라도도 아니고 경상도 산골에서 이런 얘기를 듣게 될 줄이야….

그때는 수중에 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다녔다. 하루는 양산에서 부산지역의 노조 간부들을 만나고 있는데, 안양에서 경기지역 노조간부들의 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날로 안양으로 갔다. 모임에서 김대중 후보 지지를 부탁하고, 서울로 와서 역삼동
의 한 여관에 들어가 겨우 눈을 붙였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호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평화은행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급히 연락해 200만원을 빌려서는 다시 부산으로 갔다. 이 돈은 대선이 끝난 뒤 갚았다.


노동계에 내놓을 보따리가 없는 당선자

“이번 대선의 MVP는 JP였습니다만, 한국노총 박인상 위원장에게도 야구로 말하면 도루상은 줘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말이다. 12월26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김대중 당선자와 한국노총 간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아침 조선일보에는 ‘박인상 전 한국노총 위원장을 당선자와 만나기 전에 잡을까? 만나고 나서 잡을까?’라는 기사가 나왔다. 국민회의 조성준∙조한천 의원이 한국노총으로 마중을 왔고, 함께 국회로 들어갔다.

김대중 당선자는 외환위기 국면에서 대통령이 됐다. 그는 내게 도루상은 줘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노동계에 내놓을 보따리가 없었다. 나는 사지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초가삼간만 남아 있는 고향을 본 듯한 심정이었다.

나는 지지를 넘어 지원까지 한 김대중 당선자와 밀월기간도 없이 금융구조조정 특별법으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당시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의 협상 내용에는 금융개혁법 연내 처리와 금융기관 구조조정이 들어 있었다.
김대중 당선자는 서둘러 금융산업특별법을 제정해 처리하려고 했다.

공은 노사정위원회로

12월26일 김대중 당선자와 가진 간담회에서는 노사정 3자회의를 구성해 고용보험기금 증액, 직업훈련, 고용 창출 등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논의하기로 했다. 그런데도 김대중 당선자는 금융산업특별법부터 제정하려고 했다. 이렇게 되면 금융산업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고통이 엄청날 것 아닌가. 이에 따라 한국노총은 노사정 협의기구에 불참하
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무래도 특별법 제정을 막기는 어렵겠습니다.”
국민회의에서 노동계와 말이 통하던 조성준 의원의 얘기였다. 당에서 노동정책을 맡고 있는 일부 국회의원들이 노동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금융산업특별법 제정을 막으려고 김대중 당선자를 설득하려고 했는데, 끝내 실패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득하실 수 있는 분은 위원장 같습니다. 직접 뵙고….”
1998년 1월12일. 조성준 의원의 차를 타고 경기도 일산에 있는 당선자의 집으로 갔다. 아마 밤 11시쯤 됐던 것 같다. 차의 헤드라이트를 끄고 앉아서 사방을 살펴보니 집안팎이 조용했다. 조성준 의원이 막 업무보고를 마치고 나오던 김중권 비서실장 내정자에게 박인상 위원장이 면담을 희망한다는 전갈을 넣었다. 그리고 2층 집무실에서 당선자와 단 둘이 마주 앉았다.

“그 자리가 오늘 낮에 캉드시가 와서 앉은 자리예요.”
당선자는 가벼운 농담으로 웃으며 나를 맞았지만, 나는 ‘당선자와 IMF 총재인 캉드시 사이에 벌써 결론이 난 것은 아닐까’하는 조바심이 들었다.
“내일 노동계의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캉드쉬 총재와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
“금융구조조정특별법 말입니다. 얘기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금융노동자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닙니까?”

“금융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다른 부분도 구조조정에 들어가겠지만, 급한 것부터 빨리 정리를 해야 됩니다. 잠시라도 지체하다 시기를 놓치면 멕시코처럼 될 수도 있고….”
당선자는 남미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 더 큰 위기를 우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당선자께서도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을 언급하셨고,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면 금융만이 아니라 다른 것까지 포괄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노사정 기구에서 다루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대화로 푸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노개위에서 6개월을 논의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지금은 어쩌면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아닙니까. 최대한 빨리 매듭을 지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김대중 당선자의 생각은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한마디 했다.
“2개월 동안에 노사정 합의가 되지 않으면 그때는 당선자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김대중 당선자는 금융구조조정특별법 제정을 포기했고, 노사정 간의 합의에 기초해 추진하겠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사흘 뒤인 1월15일 노사정위원회가 공식
발족했다.<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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