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의 조직은 철저하게 생산라인을 따라 이뤄진다. 그것이 공장에 세워진 노동조합을 규정한다. 노동조합은 해당 기업의 노동자라는 제한적인 사람들의 단일한 조직이었다. 공장 밖과는 철저하게 단절됐다.
경제위기가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해고된 실업자, 장기실업자, 청년실업자, 비싼 등록금에 자살까지 강요당하는 대학생, 과외와 획일적 시험에 내몰린 학생들을 포함하는 다양한 시민들이다.
이제 노동조합은 공장의 담에 막힌 조직이 아니라 이들과 거침없이 소통하는 조직이 돼야 한다. 정규직처럼 공장에 똬리를 틀지 못하고 상시적인 고용불안을 안고 있지만 투쟁을 시작하면 바로 밀려나 끝없이 상호연대를 통해 투쟁을 이어 가는 비정규직 또한 새로운 조직을 원하고 있다.
쌍용자동차와 같은 정리해고 사업장에서도 공장 안에서 노사 간의 투쟁을 통해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비록 미숙하지만 가족과 함께 지역주민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지역시민단체들과 공동투쟁에 나서고 시민대책위를 만들었다.
노동조합이 채택한 산별노조는 공장적 발상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기업별 노조는 해당 기업의 종업원으로 구성돼 있다. 그들의 투쟁은 공장 안의 사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제한된 투쟁이다.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해당 기업의 지불능력에 의존한다. 기업이 어려우면 더 이상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산별노조라는 조직은 공장을 넘어서는 조직이다. 특정 기업의 지불능력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특정 기업이라는 제한된 공장의 힘만이 아니라 공장을 넘어 맺어지는 새로운 관계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산별노조를 지역 중심으로 재편하자는 것은 공장의 힘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열린 소통을 통해 지역사회의 힘을 키우자는 것이다. 금속노조가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하려는 것은 단순히 몇 개의 공장을 지역으로 묶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실패한다. 지역시민사회와 소통의 네트워크, 행동의 네트워크, 나눔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단지 조직형식으로 재편을 논의한다면 새로운 힘은 보이지 않고 갖고 있던 공장과 기업의 힘만 사라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저항에 부딪친다.
일상적 실천 없이 비상한 실천이 있을 수 없다. 공장 안에 묶인 노동자들의 일상활동은 확장돼야 한다. 생산라인적 일상활동은 작업장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의 활동이었다. 모든 조합원들을 이끌고 매번 다른 공장의 노동자를 위해 연대투쟁을 할 수는 없다. 노동조합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일상적으로 개방해야 한다.
몇몇 지역들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역주민들과의 나눔을 더욱 넓혀야 한다. 적지 않은 현장노동자들이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울산에서 노동조합과 회사가 합의해 문화회관을 건립했지만 건물은 구청에 헌납됐을 뿐 노동조합이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공간을 만들고 비정규직을 위한 문화센터를 만들고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무료 학원과 같은 사업을 벌인 것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그게 무슨 노동조합의 역할이라는 비아냥이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이런 활동을 제대로 해야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네트워크의 거점이 될 수 있다. 그래야 ‘파업 반대’를 외치며 항의하는 보수우익 시민단체들의 비판을 극복할 수 있다.
지역사회와 소통·나눔·행동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은 공장감옥에 갇혀 있던 노동자들에게는 낯선 활동이다. 그럼에도 장애인을 위한 인연맺기 호프데이, 노조가 앞장서 공장의 건물을 지역주민을 위한 도서관으로 만들기, 과학기술노조의 농촌지역의 농기계 무료수리 사업, 과학상점, 참과학열린교실, 2008년 울산의 노조와 지역주민들의 정책간담회를 통한 소통, 광주의 콩새미 건강지원사업단, 만도의 우수리 기금모금, 노조와 지역민이 함께하는 문화제 등 작지만 효율적인 활동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금속노조의 지역사회개입전략 2009.2)
경제위기 시대에 실업자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 청년실업자와 학생들, 서민들과의 만남과 소통 등 다양한 활동을 개척하고 창조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일상적인 소통과 나눔이 기성 정치인들처럼 사진 한 장 찍고 생색만 내는 것에 그친다면 안 하는 것만 못하다. 시혜적인 차원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수십 일의 파업과 단 한 차례 지역사회와의 만남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 수십 일 동안 지역사회와 만남을 갖고 파업을 한다면 단 며칠의 파업으로도 그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파업을 하는데도 집으로 가 버리는 파업, 공장에 머물러 있는 옥쇄파업이라는 도식을 버리고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파업을 벌여야 한다.
새로운 주체를 위하여
물을 세모난 그릇에 담든 네모난 그릇에 담든 물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형식만을 내세워 조직을 만든다고 해서 새로운 주체가 탄생하는 것도 아니다.
‘시장독재’에 대한 대안은 고사하고 순순히 굴복해 버린 386정치인들이나 과거의 민주화세력은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없다. 임금집착에 빠진 노동조합 간부들과 그것을 부추기는 노동운동가들도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없다.
20년 전의 노동운동은 폭력적 탄압의 공포에 맞서 싸웠고 승리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노동운동은 시장독재를 극복하지 못했다. 고용공포 속에서 더 많은 소비를 향한 ‘경기장에서 일어서기’에 빠졌고,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더 많은 임금을 추구하는 ‘공장감옥’에 갇혔다.
노동자 전체가 아닌 조직된 일부, 혹은 대공장의 정규직 일부만이 일어서는 과정을 통해 노동자 내의 분할, 노동조합의 사회적인 고립을 낳았다. ‘1등보다 미운 10등의 법칙’을 적용받으며 공격받고 있다.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야 이 시대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노동운동의 실패와 경제공황을 통해 드러난 자본의 실패를 뛰어넘어야 한다. 새로운 프레임을 만드는 새로운 주체가 요구된다.
새로운 주체는 이미 진입한 경제위기 폭풍 속에서 탄생할 것이다.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시장원리에 뿌리를 둔 낡은 경제 프레임과 실패한 정치가 아닌 새로운 사회적 비전을 가져야 한다. 주체는 뛰어난 영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가 요구하는 소통과 공감이라는 새로운 관계방식을 통해 탄생할 것이다.
시장원리에 따라 정글의 질서가 만든 노동자의 중층적인 위계질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을 살피면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가야 한다. 낡은 중앙집권적이고 획일적 사고를 넘어서는 새로운 조직구성과 운영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돈과 일자리는 누구도 독점해서는 안 된다. 분배돼야 한다. 이 나눔은 제품 판매를 위한 ‘광고용 나눔’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나눔은 곧 곱하기다. 부를 나눔으로써 조직되지 않았을지라도 조직된 노동자들보다 몇 배의 노동자들이 함께 공감하는 다수의 힘을 만들 수 있다.
단절된 공장이라는 성 안에 머물지 말고 ‘공장 탈출’을 통해 새로운 흐름을 창조해야 한다. 삶의 일부가 돼야 할 노동이 전부인 세상에서 삶의 다양성을 담는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새로운 주체는 구상만으로 탄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낡은 노동운동의 상징, 낡은 프레임의 포로가 된 노동조합을 대체하는 새로운 상징이 여기저기서 나타날 때 그 속에서 새로운 주체들이 숨 쉬며 날개를 펼칠 것이다.
맺음말
바람과 풀
경제위기라는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어떤 이는 잠시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거센 태풍이 될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경제위기로 인해 어려움에 빠진 전 세계의 노동자·민중이 거세게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미친 바람에 휩쓸려 다닐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당장 강력한 투쟁을 해야 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크게 호흡하면서 가야 한다고 한다.
짧다고만 할 수 없는 세월 동안 노동운동을 하면서 판단이 필요할 때마다 떠올렸던 고전의 한 구절을 되새긴다.
창랑(滄?)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滄?)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넓고 푸른 물결이 맑으면 정갈하게 간수해야 할 갓끈을 씻어야 하지만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수천 년 된 시는 언제나 내 가슴을 흠뻑 적신다. 신영복 선생은 [나의 동양고전 독법-강의]에서 이 구절을 ‘현실과 이상의 갈등과 모순’으로 보라고 했다. ‘비타협적인 엘리트주의’와 ‘타협적인 현실주의’를 모두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타협적인 길’과 ‘현실적 타협주의’ 사이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생각한다. 끝없이 다가오는 상황에 맞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다. 어떤 경우든 하나의 믿음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민중을 암시하는 ‘풀’에 대해 김수영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류시화 시인은 ‘바람 부는 날의 풀’이 쓰러지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노래한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 주고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가를 보아라.
풀이 결코 넘어지지 않는 모습을 ‘연대’라고 표현하든 혹은 ‘나눔’이라고 표현하든 그것이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혼자 살기’가 아니라 ‘함께 살기’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언어는
과격한 단어가 아닙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엄격히 구분 짓는 잣대가 아니라
경계를 넘나드는 이해입니다.
말하는 쪽의 입이 아니라
듣는 쪽의 귀입니다.
머리를 높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낮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