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간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한국노총 개혁이다. 조선공사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지만 부산의 작은 철공소를 적(籍)으로 두고 있어서 조직도 돈도 없던 내가 한국노총이 위원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1996년 3월 제16대 한국노총 위원장으로 취임했을 때 노총은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안으로는 1987년 7월 노동자 대투쟁을 겪으면서 한국노총 안에서 커진 개혁세력과 변화가 두려운 보수세력의 부조화, 밖으로는 민주노총이라는 경쟁자가 출현해 50년 동안 누려 온 한국노총의 독점적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다.
한국노총을 개혁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에서 시작할 것인가. 40년 전 나의 노동운동의 시작은 낡은 것을 뒤엎고 새로운 것을 따르는 데서 시작됐다. 한국노총 개혁의 실마리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나의 위치가 달라졌다. 과거의 나는 조선공사의 젊은 노동조합간부였지만 이제는 한국노총의 위원장이다. 낡은 질서를 전복하는 것은 젊은 간부들의 몫이다. 현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변화의 기운을 받은 젊은 간부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위원장으로서 또 선배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 옛날 선배들이 나에게 그랬듯이 나 역시 후배들에게 기회와 책임을 줬다. 그들은 열과 성을 다해 뛰었다. 내가 위원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한국노총 최초의 총파업과 야당과의 정책연합으로 받았던 찬사와 영광은 젊은 그들의 몫이고, 허물이 있다면 그것은 위원장인 나의 탓이다.
또 한 가지, 한국노총을 개혁하는 데 있어 중요한 나의 역할은 전통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국노총의 과거를 전면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한국노총에 대한 부정은 나에 대한, 조합원에 대한 부정이다. 선배들이 어려운 시기에 한국노총의 문패를 지켜 낸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이 영욕 어린 문패를 지키는 것이 한국노총 위원장으로서 내게 주어진 책무이기도 했다.


1996년 12월26일 아침 6시, 한국노총 정책실장 출신인 새정치국민회의 조성준 의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죄송합니다. 노동법이 새벽에‘날치기’통과됐습니다.”
“뭐?”
“…”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대체 야당은 뭐 했소? 알면서 모른 척했던 거 아니요? 새벽에 그 많은 여당 국회의원들이 움직이는데 우째 그걸 몰랐단 말이요?”
“아니, 정말 몰랐습니다. 여당 국회의원들이 우리 눈을 돌리기 위해 여의도와 영등포호텔 두 곳에 분산해 있다 새벽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파업을 유보한 것이 뼈아픈 실수였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파업을 유보하지 않았다면‘날치기’통과만은 막
을 수 있지 않았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노동계의 파업 유보가 국면 주도권을 전환시키는 분수령이 됐다는 점이다.

내가 오죽했으면 신한국당 서청원 원내대표에게 ‘사기꾼’이라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표현까지 했을까. 명색이 집권여당의 원내대표가 단식농성 중인 한국노총 위원장을 상대로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두 번이나 찾아와 연내 처리를 하지 않겠다고 거듭 밝히는 바람에 예정돼 있던‘1시간 파업’을 유보하고 단식농성까지 접었는데….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당시 여야를 막론하고 노동계 출신이거나 노동계와 가까웠던 국회의원들에게 욕을 많이 했다. 특히 신한국당의 김문수 의원에게는“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새벽부터 날벼락을 맞았지만 마음을 다잡고 26일 아침 9시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과 만나기로 했던 것을 떠올리며 여의도로 나갔다. 정부와 여당의 노동법 개정 움직임에 쐐기를 박기 위해 양대 노총 공동투쟁을 계획했는데, 법안은 이미 날치기로 처리돼 버렸다. 예기치 못한 사태 앞에서 권영길 위원장과 나는“우선은 각자가 속한 조직부터 챙기자”면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날 오전 10시, 산별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총파업 찬반토론, 파업의 방법과 시기에 대한 토론이 4시간 동안이나 계속됐다. 지도부가 이 순간을 놓치면 한국노총의 시계는 여기서 멈추고 말 것이다. 결론은 다음과 같이 나왔다.

“신한국당이 26일 새벽 6시를 기해 날치기 통과시킨 노동악법은 무효임을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 조직의 총파업을 명령한다. 한국노총 산하 전 조직은 1996년 12월27일(금) 13시부터 28일(토) 12시까지 24시간 총파업을 단행한다.”

이로써 한국노총은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총파업을 단행했다. 파업 첫날에는 우왕좌왕했다. 산별대표자회의가 파업 돌입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긴 오후 2시에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긴말은 않겠다. 내딛는 첫발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오히려 전국의 단위노조에서는 즉각 파업에 돌입하라는 항의전화가 쇄도했고, 한국노총의 투쟁방침을 확인하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울산의 동양나일론을 비롯한 몇몇 단위노조에서는 벌써 파업에 돌입했다. 한국노총 조합원들은 이미 개혁을 선택했다. 떨치고 일어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27일과 28일 이틀 동안 전국 553개 노조에서 15만6천561명이 참가한 한국노총 역사상 첫 총파업이 이뤄진 것이다. 우리는 자본과 권력에 타협하고 협조했던 과거의 굴레를 벗어 버렸다.

역사적인 양대 노총 공동투쟁

당시 나의 고민은 1차 파업에 이어 공공부문까지 포함한 2차 총파업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1차 총파업은 이뤄졌지만 이탈 조직이 생긴 것도 사실이고, 이미 노동법이 개정돼 96년 12월31일 공포됐는데, 무슨 수로 돌이킬 수 있느냐는 식의 내부 반발도 거세졌다.

민주노총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해를 넘겨서까지 파업을 이어가면서 피로감을 느끼는 조직들이 나타났다. 총파업의 열기를 지속시킬 계기가 필요했다. 게다가 자본과 정권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분리시키기 위해 민주노총에 집중공세를 퍼부었다.

한국노총은 이 시기를 어떻게 돌파해야 할 것인가. 민주노총이 제의한 연대투쟁을 성사시키고, 2차 총파업을 이끌어 내는 정공법이 최선의 방법이리라. 하지만 2차 총파업에 포함된 공공부문에서 는 파업이 사실상 이뤄지지 않았다.

자동차노련은 파업 돌입 직전에 파업을 유보했다. 내가 알기로 새벽에는 버스가 멈췄다. 그런데 아침 9시께 강성천 위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도저히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버스는 이미 시내를 운행하고 있었다. 나는 화가 나서 평소 각별한 관계였던 강성천 위원장에게 좋지 않은 소리까지 했다.

이렇게 되자 양대 노총 공동투쟁의 필요성은 더 높아졌다. 지도부에서는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있었지만, 지역 차원이나 업종 차원에서는 연대집회가 성사되고 있었다. 1월14일 한국노총 금융노련과 민주노총 사무노련의 연대집회에 권영길 위원장과 내가 투쟁사를 하게 돼 있었는데, 권 위원장은 수배 중이라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날 집회를 마친 뒤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권영길 위원장을 찾아갔다. 한국노총 내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나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판단했다.

국회에서 노동법이‘날치기’통과된 날, 예정돼 있던 기자회견을 하지 못하고 각자의 조직을 챙기기로 하고 헤어진 뒤 처음 만난 자리였다. 농성장에 들어가서는“아이고, 담배나 한 대 피우자”며 권 위원장에게 담뱃불을 붙여 줬는데, 이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기자들에게 나가 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단 둘이 천막농성장에 있었는데 어떻게 찍혔을까. 나중에 알고 봤더니 천막에 난 구멍 사이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었다는데, 그 기자는 다름 아닌 매일노동뉴스 기자였다.

권 위원장도 나도‘양대 노총 공동투쟁’이라는 답을 내리고 있었다. 노동법과 안기부법 재개정을 촉구하고 이를 위해 계속 투쟁한다는 데 합의했다. 바깥으로 나와 천막농성장 앞 계단에 나란히 서서 양대 노총이 공동투쟁을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농성장을 지키던 민주노총 언론노조 조합원들이 권영길과 박인상을 연호하며 박수를 쳤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한국노총으로 돌아오자“위원장님, 거기는 뭐 하러 갔습니까?” 하는 볼멘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열린 산별대표자회의에서는 민주노총과의 공동투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단연코 높았다.

“지금 민주노총도 힘에 부쳐 맥을 못 추고 있는데….”
“정부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강성인 민주노총을 힘으로 누르려고 하는데….”

20명의 산별대표자들이 돌아가면서 발언을 했다. 민주노총과 공동투쟁을 찬성하는 산별대표자는 대여섯 명 정도였던 것 같다.
“자, 얘기 잘 들었습니다. 그럼 공동집회를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지금 공동집회 말고 이 국면을 수습할 길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조합원들만 확실히 챙겨 주십시오. 책임은 위원장인 제가 지겠습니다. 정부에서 강경하게 나와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위원장이 독단적으로 밀고 나가서 집회를 하게 됐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말입니다. 정부가 민주노총을 탄압하고 나면 그 다음은 어디를 밟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연성이든 뭐든 조용히 지낸다 하더라도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사실이 그랬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다. 이렇게 해서 산별대표자회의에서 민주노총과 공동집회를 하기로 결정했다. 1997년 1월18일 양대 노총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갖고 “1월26일 공동집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다음날인 19일 김영삼 대통령은“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고 여야 영수회담을 개최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항복 선언을 한 것이다.
“법을 재개정하라”

21일 영수회담이 열리기 하루 전, 신한국당의 대권주자이기도 했던 이한동 대표가 어느 지역신문기자를 통해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왔다. 여의도 한식집에 자리가 마련됐다.
“내일 청와대에 들어갑니다. 노동계에서 조금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게 없습니까?”
“없습니다. 국회에서 법을 재개정하지 않는 한 (투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결과는 미리 연락해 드리지요.”

약속대로 이튿날 전화가 왔다. 이 대표는“예정대로 된다”는 말을 전해 줬다. 휴대폰이 도청될 것 같아 간단하게답만 받았다. 이때 양대 노총 공동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한고비는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이한동 대표만이 아니라 최병렬 의원 등 많은 국회의원들이 각개전투(?)를 하듯이 면담을 요청해 왔다. 나는 원칙을 분명히 얘기했다. 몇 년 뒤 국민의 정부 시절에 신한국당 서청원 원내대표, 유용태 원내부대표와 함께 자리를 하게 됐다.

“그때 두 번이나 찾아와서는 통과시키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우리도 정말 연내에는 통과시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실은 청와대에서 불러 들어갔더니‘진행해라’고 해서….”
“나는 서청원 원내대표에게 기대를 갖고 있었고, 신뢰했었습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저도 그 일로 곤란을 많이 겪었습니다.”
“지난 일이니까 서청원 원내대표와 나 사이에 인간적인 신의는 회복하기로 합시다.”

나는‘문민정부 사람들’인 서청원 원내대표, 남재희 노동부장관 등 몇몇 분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고, 적지않은 기대도 했다. 그런 가운데 노동법이 덜컥 날치기로 처리된 것이다. 문민정부는 나의 약점을 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돈 문제와 이성관계를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그래도 걸리는 게 없으니까 조합원 자격 여부를 문제 삼기 위해 내 출신 사업장인 태평철공소까지 다녀갔다고 들었다.

자랑스러운 한국노총 조합원

한국노총 중앙이 파악한 파업 참여 조합원의 숫자는 그다지 정확하지 않았다. 중앙에는 파업에 들어간다고 해 놓고는 실제 파업에 들어가지 않고 중식집회로 대체한 지역의 노조들이 여럿 있었다. 항만과 해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투쟁상황실에서 팩스로 내려 보내는 투쟁속보를 숨긴 단위노조 위원장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노총은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총파업을 단행했고, 전적으로 조합원들의 힘으로 이뤄졌다. 금속∙화학∙섬유 등 제조업 사업장과 수도권 금융사업장의 조합원들은‘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맞서기 위해 일손을 멈추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총파업 지침에 따라 해고를 각오하고 나선 한국노총 조합원들이었다. 월급봉투를 털어 투쟁기금으로 마련한 전세버스에“날치기 통과를 반대한다”는 현수막을 붙이고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에서 열린 수십 차례의 집회에 참여한 것도 한국노총 조합원들이었다. 너무나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한국노총 조합원들이다.<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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