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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40년, 박인상 회고록(28)[제9부] 노동이 소용돌이 친다 [제3편]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 않는다
역사적 인간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한국노총 개혁이다. 조선공사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지만 부산의 작은 철공소를 적(籍)으로 두고 있어서 조직도 돈도 없던 내가 한국노총이 위원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1996년 3월 제16대 한국노총 위원장으로 취임했을 때 노총은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안으로는 1987년 7월 노동자 대투쟁을 겪으면서 한국노총 안에서 커진 개혁세력과 변화가 두려운 보수세력의 부조화, 밖으로는 민주노총이라는 경쟁자가 출현해 50년 동안 누려 온 한국노총의 독점적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다.

한국노총을 개혁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에서 시작할 것인가. 40년 전 나의 노동운동의 시작은 낡은 것을 뒤엎고 새로운 것을 따르는 데서 시작됐다. 한국노총 개혁의 실마리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나의 위치가 달라졌다. 과거의 나는 조선공사의 젊은 노동조합간부였지만 이제는 한국노총의 위원장이다. 낡은 질서를 전복하는 것은 젊은 간부들의 몫이다. 현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변화의 기운을 받은 젊은 간부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위원장으로서 또 선배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 옛날 선배들이 나에게 그랬듯이 나 역시 후배들에게 기회와 책임을 줬다. 그들은 열과 성을 다해 뛰었다. 내가 위원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한국노총 최초의 총파업과 야당과의 정책연합으로 받았던 찬사와 영광은 젊은 그들의 몫이고, 허물이 있다면 그것은 위원장인 나의 탓이다.

또 한 가지, 한국노총을 개혁하는 데 있어 중요한 나의 역할은 전통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국노총의 과거를 전면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한국노총에 대한 부정은 나에 대한, 조합원에 대한 부정이다. 선배들이 어려운 시기에 한국노총의 문패를 지켜 낸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이 영욕 어린 문패를 지키는 것이 한국노총 위원장으로서 내게 주어진 책무이기도 했다.

과연 잘될까 하던 당초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1996년 6월 말부터 언론에서 ‘경제위기론’을 봇물처럼 터뜨렸다.

아니나 다를까, 7월2일 재정경제원과 통상부가 ‘96년 하반기 경기운용방안’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그 내용에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변형근로시간제 도입이 포함돼 있었다.

당초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정부는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는데, 쟁점 사안에 대해 노개위조차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 내 ‘경제사령탑’인 재경원이 이렇게 나왔다는 것은, 정부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예정된 ‘파국’

나는 “노개위 참여를 거부하고 모든 사회단체와 연대하는 장외투쟁을 전개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도록 했다. 민주노총은 “한국노총과 공동투쟁, 총파업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부는 우리 노동계의 목소리를 듣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같은해 8월8일 개각에서 등장한 한승수 부총리 겸 재경원장관은 ‘경제 살리기’를 강조하면서 재벌규제정책을 크게 완화하겠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기다렸다는 듯이 “97년도 임금총액규모를 동결하고, 이를 위해 인원감축도 결행한다”고 운을 땠다. 이어 “기업을 둘러싼 환경은 단순한 불황이 아니라 생존권을 위협하는 수준”이라며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변형근로제를 도입하고 복수노조 허용과 제3자 개입금지 폐지를 주장하는 노동계의 요구는 차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러한 경영계의 태도는 노동계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이로 인해 노개위에서 노사가 접점을 찾기는 더 어려워졌고, 노동계의 입지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런 와중에 노개위는 노-사-공익위원들 각각의 입장만을 재차 확인한 6차례의 토론회를 거친 뒤 ‘노동관계법 개정 요강 소위원회’를 구성해 구체적인 법 개정안 마련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이 소위원회에 한국노총에서는 박헌수 화학노련 위원장이 들어갔다. 그의 보고를 받으면서 ‘이거 정말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는 공익위원들이 주도했다.

노개위를 구상한 김영삼 대통령의 의중이 여기에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사는 어차피 합의를 이루지 못할 테고, 노개위의 다수인 공익위원들의 절충된(?) 안으로 노동법 개정을 시도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역시나 노개위는 당시까지 논의된 사항을 종합해 표결을 통해 노개위 단일안을 확정하려 했다. 민주노총에 이어 한국노총도 10월15일 노개위 탈퇴 의사를 표명했다.

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 않는다

이때 내가 생각하던 것은 ‘노개위’ 다음이었다. 노개위가 실패로 막을 내렸다고 해서 김영삼 정권이 다음 정권으로 노동법 개정을 미룰 것인가. 여당이든 야당이든 이듬해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염두에 둘 것이고, 그렇다면 국회에서 노동법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반면에 정부는 노동법 개정을 멈추려 하지 않을 것 같았다.
1996년 11월7일 노개위는 합의사항 없이 대통령에게 그동안의 결과만을 보고했다. 사흘 뒤 나의 예상대로 정부와 신한국당은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을 올해 안에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상황이 급박해진 것이다. 나는 11월19일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안이 입법예고되는 즉시 정부와 일체의 대화를 중단하고, 노개위를 탈퇴한 뒤 단계적으로 총파업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선언만이 아니라 이때부터 한국노총의 시계는 총파업에 맞춰졌다.

산하조직에 내린 투쟁지침은 다음과 같다. △11월14일부터 투쟁상황실 설치 △비상연락망 가동 △간부들의 머리띠 착용 △사업장별 현수막 부착 △각 지역 국회의원들에게 전화 걸기 △11월18일부터 23일까지 단위노조 총회 개최 및 투쟁결의 △서명운동 전개 △투쟁기금 모금 △쟁의발생 결의와 신고 등이었다.

산하조직들을 움직이기 위해 ‘생존권 사수 및 노동악법투쟁본부’를 구성하도록 했다. 한창석 조직강화본부장에게 투쟁본부장을 맡겼고, 실질적으로 일을 해 나갈 투쟁상황실장에는 이용득 조직2국장을 임명했다. 한국합섬투쟁을 양대 노총 공동투쟁으로 만들어 내고, 그것을 한국노총 내에서 관철시켜 나가던 이용득의 기백을 높이 샀다.

“10만명을 조직하라!”

“우리가 한국노총인데 꼭 이런 용어를 써야 되나?”
나이가 든 한 산별대표자가 투쟁상황실에서 단위노조로 보내는 투쟁속보를 들고는 혼잣말을 하듯이 읊조렸다. 점잖은 대표자라 투쟁속보의 내용이 자극적이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투쟁속보를 제작한 이용득 상황실장은 나름대로 할 말이 있었다.

보름 만에 조합원 10만명이 참여하는 집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노동악법을 막기 위한 한국노총의 결의를 보여 줄 11월24일 집회를 계획하면서 “10만명을 조직하라”며 넌지시 압력을 넣었다. 이용득을 비롯한 투쟁상황실의 간부들은 고개를 흔들면서도 내심 이제야 일다운 일을 한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점잖은 분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과격한 용어를 사용한 투쟁속보를 찍어 냈고, 손가락이 아프도록 산하조직에 전화를 돌리면서 집회 참여를 독려했다.

나는 말없이 투쟁상황실을 지지하는 한편 산별대표자들과 함께 지하철역으로 나가 노동법 개정의 부당함을 알리는 선전전을 진행했다.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 덕분인지 11월24일 서울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열린 집회에 조합원 11만명이 모였다. 맨 앞에 한국노총 깃발이 자리했고, 각 산별연맹의 깃발과 무수한 단위노조들의 깃발과 현수막이 나부꼈다. 북과 장구, 꽹과리 등 투쟁의 진군을 알리는 소리가 여의도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노동악법 분쇄하자”는 11만 조합원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단상에 올랐다. 실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10만명이 모이는 집회는 민주노총만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한국노총이 집회를 하는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는 노동계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이날 결의대회로 자신감을 얻은 우리는 11월30일 단위노조별로 쟁의발생을 결의한 뒤 투쟁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12월4일 사무총국을 투쟁본부로 재편, 9일 비상임시전국대의원대회, 11일 위원장 무기한 단식농성, 13일 총파업 결의….

파업은 조합원이 하는 것

나는 약속대로 12월11일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각 산별대표자들도 노총회관에서 무기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각 지역본부와 지부 사무실에서도 간부들이 농성에 돌입했다. 같은달 16일에는 삭발까지 했다. 역시 전국의 노조 간부 6천여명이 삭발투쟁에 함께했다.

그래도 외부에서는 여전히 ‘한국노총이 실제 총파업을 할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 한국노총 내부에서도 파업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내게 개인적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총파업으로 노동법 개정을 막기 어려울 것이고, 총파업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또 총파업으로 한국노총이 무너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내게 파업반대 의사를 밝히는 의견에 대해서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냥 듣고만 있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젊은 간부들은 파업 반대 의견에 위원장이 밀리는 것은 아닐까 하며 걱정스런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런데 파업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위원장의 결단도 중요하지만, 결국 조직의 문제였다.

조합원들이, 대의원들이, 조합간부들이, 산별대표자들이 모두 다 반대하면 위원장인 내가 아무리 결단해도 총파업은 못하는 것이다. 반대로 위원장인 나나 산별대표자들이 주춤거린다고 하더라도, 아래에서 끓어오르면 총파업으로 나아가게 돼 있다. 나는 이런 확신과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파업을 하느냐 마느냐로 크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당시 내가 적잖이 고민했던 것은 이주완 사무총장의 사표 수리 문제였다. 체신노련 출신인 이주완 사무총장은 한국노총이 총파업을 벌였을 때 정부에서 그 책임을 사무총장에게도 지울 경우 오랜 공직생활이 파면으로 끝날 수 있었다. 연금마저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주완 사무총장은 건강도 좋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운동 이론에 밝고 지략가인 이주완 사무총장과 임기를 끝까지 함께하고 싶어 여러 번 만류했지만, 이후 총파업 투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결국 사표를 수리했다. 후임 사무총장은 이남순 금융노련 위원장이 맡았다.

갈팡질팡하는 여권

한국노총의 1단계 파업은 12월16일 ‘1시간 총파업’을 하는 것이었다. 이날 아침 일찍 신한국당 유용태 원내부총무와 이강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간사가 단식 중인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노동법을 연내에 개정하지 않겠다는 여당의 입장을 전했다.

나는 국회 일정을 고려해 볼 때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노동법 개정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산별대표자회의를 열어 ‘1시간 파업’을 유보했다. 한껏 끌어올려 놓았던 현장의 투쟁 열기를 깬다는 것이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명색이 집권 여당의 원내부총무가 연내에 처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우선은 믿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맞다는 판단을 했다. 그날이 단식을 한 지 여섯째 되는 날이라 내 정신이 혼미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민주노총 역시 13일로 예정한 1차 총파업과 16일 2차 총파업을 유보했던 터였다.

파업을 유보한 뒤 단식농성을 계속하기로 했는데, 이번에는 서청원 신한국당 원내총무가 노동법을 연내에 처리하지 않겠다는 뜻을 다시 한 번 전해 왔다. 그래서 단식농성까지 접기로 하고, 여의도 성모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병실에서 노동법 개정안이 연내에 처리될 수도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여당의 원내총무가 연내처리를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약속을 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서둘러 퇴원을 하고,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과 통화를 했다. 권 위원장이 나의 집이 있는 광명시로 오겠다고 했다. 광명의 한 호텔에서 단 둘이 만났다. 권 위원장과 나는 노동법 개정을 막기 위해 양대 노총이 공동투쟁을 하기로 했다. 공동투쟁을 알리는 기자회견은 12월26일 아침 9시에 여의도에서 하기로 약속했다. <계속 이어짐>

박미경 객원 기자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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