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공평한 것인가, 아니면 악랄한 것인가. 50년 만의 정권교체는 하필이면 건국 이래 최초의 ‘국가부도’ 사태와 함께 왔다. 그것은 곤혹스럽고 비참한 일이었다.
사실 “한국노총이 ‘정책연합’을 통해 국민회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를 밀었고, 정권교체에 일익을 담당했다”라고 얘기하면 쑥스러워지는 게 사실이다. ‘정책연합’은 한국노총 ‘조합원’ 박인상의 이름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불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당시 한국노총의 ‘실력’을 감안할 때 최선의 방도였다. 일단 물꼬가 트이자 조합원들은 평소 자신들이 느끼고 갈구해 왔던 바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런 점에서 50년 만의 정권교체는 한국노총 개혁과 맥락을 같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권교체라는 기쁜 일은 ‘국가부도’ 사태라는 정말 나쁜 일과 함께 왔다. 어쩌면 정권교체는 국가부도라는 미증유의 난리를 수습하는 역사적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뒤의 일을 생각하면 이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난리를 부른 사람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민주화의 경제적 과실을 챙겼고, 그것을 토대로 10년 뒤 다시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과정에서 양극화가 사회의 대세로 자리 잡았고, 비정규 노동자가 생겨났다. 그것은 노동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일이었다. 한국노총은 정책연합을 통해 50년 동안의 정치적 예속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개혁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부도 사태는 한국노총이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더 밑바닥의 노동자와 소통하는 것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이야말로 개혁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국가부도 사태가 만들어 놓은 정세는 지금도 여전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이 바로 후배들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시점 아닌가.

 
 
1997년 3월10일, 여당과 야당의 합의로 노동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미흡하기 짝이 없지만 어쨌든 전열을 고를 여유는 찾은 셈이었다. 나는 총파업 이후 조직을 추스르기 위해 전국 현장순회를 시작했다. 그런데 조합원들의 사기는 무척 높았다. 심지어 나를 개선장군처럼 맞아 주는 게 아닌가. 총파업 투쟁으로 한국노총이 한 걸음 나아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이제 내 앞에 놓인 시험지에는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나와 있었다.
 
‘노동조합 정치활동 금지’는 풀렸지만

노동법으로 요동쳤던 정국은 연말에 있을 대통령선거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노동법이 개정되면서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금지’ 조항이 삭제됐다. 노동계에게는 기회이자, 또 다른 ‘현장’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총파업 투쟁 이후 신설된 기획팀을 중심으로 대선 시기 정치방침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기획팀 총책임자는 이종복 사무차장, 팀장은 현기환 정치국장이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한국노총의 정치세력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주제로 한국노총 내부에서 많은 토론이 오갔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원칙적으로 노동자가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어 후보를 내고 당선시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노동자정당의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씨를 뿌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10년, 아니 100년 뒤를 생각하면서 한 걸음씩 가면 될 일이다. 1997년 7월 한국노총 조합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조합원의 63.4%가 독자적인 노동자정당 건설에 찬성했다.

그럼에도 나와 한국노총 중앙정치위원회는 97년 대선 정치방침으로 정책연합을 채택했다. 중앙정치위원회에는 김유곤 한국노총 부위원장, 강성천 자동차노련 위원장, 이광남 택시노련 위원장이 포함돼 있었다.

한국노총은 50년 동안 여당을 ‘편향적’으로 따랐던 조직이다. 원칙에 따라 당선 가능성이 없는 독자후보를 내게 되면 실제로는 정치적 방침을 정하지 않고 여당을 찍자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우려가 있었다. 민주노총과 공조를 했다 하더라도 같은 효과가 나타날 게 틀림없다. 그럴 경우 총파업으로 다져진 한국노총의 결속력은 대선 시기를 통과하면서 모래알이 돼 버리고 말 것이다.

나는 한국노총 사람이다. 언제나 교섭과 투쟁, 두 가지를 다 생각하지만 우선은 교섭이다.  물론 그 교섭이 굴종을 강요하면 투쟁으로 나아간다. 나는 독자후보라는 명분보다 정책연합이라는 실리를 선택했다.

한국노총과 정책연합이 가능한 후보를 정당하게 지지하고 당선시킨 뒤 한국노총의 요구를 확실하게 전달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정책연합’이라는 전략은 위원장인 내게 부담이 많이 되는 것이었다. ‘날치기’ 통과의 여파로 조합원들은 여당에 대한 불신감이 아주 높았다. 게다가 ‘50년 만의 정권교체’라는 기대감도 적지 않았다. 야당 후보인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정책연합의 대상자가 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정책연합을 결정하는 순간 구속을 각오했다. 
 

“왜 발표를 못하게 하는 겁니까?”

“위원장님, 김대중 후보가 1위로 나왔습니다.”
한국노총이 그해 7월8일부터 12일까지 1천개 사업장에서 조합원 2천여명을 상대로 실시한 1차 여론조사에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1위로 나왔다.
“아니, 위원장님 왜 발표를 못하게 하는 겁니까? 여론조사는 정말 철두철미하게 진행됐습니다. 걸릴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 때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다. 게다가 1차 여론조사를 할 때는 신한국당 이회창씨가 포함돼 있긴 했지만, 신한국당 후보로 결정된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1차 조사결과를 미리 발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노총이 대선 방침으로 정책연합을 결정하자, 특정 후보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곱지 않은 눈길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신중을 기해야 했다.
 
“여론조사를 몇 번 더 해 보고 발표를 하는 것도 좋지 않겠나?”
현기환 정치국장은 발표를 하지 말라는 나의 결정에 불복해 며칠간 출근을 거부했다. 소신껏 일한 정치국 실무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항명이었고, 한편으로는 정책연합에 대한 나의 의지도 의심했을 것이다.
    
“뒤로 물러서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남일삼·이종복·현기환·백만호 등이 포진한 정치국에서 여론조사를 세 차례(10월14일, 11월24일, 12월2일) 더 진행했다. 이어 ‘97년 전국여성노동자대회’에서 여성정책에 관한 후보자 토론회(10월23일)를 개최했고, KBS·동아일보와 공동으로 대선 후보자 초청 TV토론회(11월20일)까지 열었다.

여론조사 1위는 예상했던 대로 김대중 후보였다. 한국노총 내에 설치한 ‘정책연합 평가구성위원회’가 채점은 선정평가표(정책수용도 및 실천가능성 500점, 당선 가능성 400점, 기타 100점)에서도 김대중 후보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정책연합 평가구성위에는 이남순 사무총장·권원표 전력노조 위원장·김성태 정보통신노련 위원장·추원서 금융노련 위원장·박헌수 화학노련 위원장·유재섭 금속노련 위원장·황태수 출판노련 위원장·강성천 자동차노련 위원장·김진수 부산지역본부 의장·정기춘 광주지역본부 의장·강영섭 경기지역본부 의장이 포함돼 있었다.

1천점 만점에 김대중 후보가 500점,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가 246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240점을 받았다. 1위와 2위의 점수 차이가 워낙 컸다. 당선이 유력한 여당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는 이인제 후보보다 점수가 낮았다. 공정성 시비가 나올 수가 없었다. 이제 발표만 남은 셈인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12월3일 중앙정치위원회가 열리는 날, 신한국당의 김문수 의원을 비롯한 당 관계자들이 찾아왔다. 정책연합을 포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신한국당 관계자들이 친여 성향의 산별위원장까지 동원하는 바람에 중앙정치위원회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신한국당의 방해가 아니었더라도, 친여 성향의 산별위원장들이 반대했을 것이다. ‘정책연합’이라는 대의에는 반대하지 못하고 있다가, 막상 정책연합의 대상이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로 정해지자 반대의사를 확실히 하고 나선 것이다.
 
“이름을 대라!”

선거관리위원회도 정책연합을 반대하는 쪽에 힘을 실어 줬다. 선관위는 직원을 보내 ‘어떤 방식이든 특정 후보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정책연합을 하겠다는 것은 선거법에 위배된다’고 경고했다. 심지어 대상자 발표가 예정돼 있던 전국노조대표자회의에 경찰 병력까지 보내겠다고 밝혔다.

나는 이른바 ‘불법’이라는 점 때문에 망설이지는 않았다. 정책연합을 대선 방침으로 선택했을 때 이미 구속까지 각오한 터였다.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다음날 전국노조대표자회의에서 후보를 거명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까닭은 조직 분열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12월4일 올림픽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전국노조대표자회의는 난장판이 됐다.

“이름을 대라! 어느 후보인지 밝혀라!”
중앙정치위원회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정책연합 대상자를 발표하지 못하고 “한국노총은 친노동자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 것을 선언한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정책연합 추진 방침을 천명하자, 정책연합 찬성파들은 “친노동자 후보의 이름을 대라”며 고성을 지르면서 단상을 점거했다.

반대파들은 여차하면 물리력까지 동원할 기세였다. 나는 험악한 분위기로 변한 전국노조대표자회의 회의장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서 회의를 계속 진행시킨다고 해서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석촌호수 근처에서 강성천 위원장과 둘이서 하룻밤을 묵고는 다음날 부산으로 내려갔다. 정책연합도 성사시키고, 조직 분열도 막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을 찾아야 했다. <계속 이어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