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라고, 다 같이 돌자 광장 한 바퀴. 급하대도 뛰면 반칙이라니 이름하여 희망경보. 빨간 열매 대롱대롱, 작은 화분 바통 삼아 부지런히 걸었건만 저기 경찰 방패 막아서니 단거리 경주. 거기 방패를 반환점 삼아 찍고 돌았다. 바람 같은 추월을 꿈꿨지만 맘 같지는 않아 웃음만 터졌다. 웃자고 벌인 경기, 죽자고 내달린 사람도 거기 한 명은 꼭 있더라. 서울광
"기싸움에서 우파가 지고 있다"며 걱정 많던 그분. "맞짱을 뜨겠다"고 얼마 전 제주 강정을 찾아 맞불집회 선봉에 섰다던데 어찌 승전보를 듣진 못했다. "잘못하면 좌파가 집권하고 나라 엉망된다"며 목소리 높이던 그분. 우파 대동단결 주문하려 15일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을 찾았는데 그 자리 '좌파'가
시작도 전에 울음, 터졌다. 뒷자리 지켜 선 동료가 꺼억 꺽 먼저 울었다. 바리캉 지났고 머리칼 툭툭, 서울 도봉구 쌍문동 한일병원 오르는 언덕길 인도에 떨어졌다. 눈물 따라 뚝뚝 그 바닥을 적셨다. 딸아이가 말렸다. 군에 간 아들도 걱정했다. 고정화(52)씨 그러나 머리칼이야 자라면 그만이라고 씩씩했다. 세상 등진 남편 대신 가장 노릇을 오래, 두 아이
소식은 빨랐다. 방청석 누군가 보내온 문자엔 '고법 파기환송'이라고 짧게 적혔다. 기다림은 길었다. 2년 넘게 기다린 판결. 싸움에 나선 지 1천848일째다. 별말 없이 길 건너편 잎 다 떨군 가로수를 한동안 바라봤다. 고개를 숙였다. 두어 번 맥없이 구호를 외쳤다. 기타모형 선전물을 만지작거렸다. 미리 준비한 기자회견 현수막은 펴질 못했다. 현대자동차
보라색 어깨띠 두른 이들이 우르르, 기자들 따라 우르르. 4월 선거가 코 앞이니 낯설지는 않은 풍경. 밥집 향하던 여의도 사람들 멀리서 수군대기를 'TV에서 보던 사람들'이란다. 명망가 여럿 모였으나 도무지 그 당 이름이 귀에 쏙 들지를 않는다니 진보통합이던가 통합진보던가. 여기저기 '통합' 얘기는 많이 들려오니 두루 뭉친 야당이구나 헷갈리는 사람들
13일 낮 북적이던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앞. 하트 모양 풍선이 둥둥, 분홍빛 현수막이 펄럭. 거기 천정이나 칸막이 따위 없었다. 그리고 키스. 도대체 떨어질 줄 모르던 연인은 20대 청춘. 오랜 나눔 끝 한숨 돌리려는데 "한번 더!", 사진기자 독촉에 못이긴 척 '설왕설래' 또 오래도록 격렬했다. 기자들, 자리싸움에 덩달아 격렬했다.
"가카 귀는 깔때귀" 모든 얘기를 제 중심으로 듣는 귀를 이르는 말. 할 말을 미처 다 못해 탈이 난 누군가 광장에 나서 외친 한마디. 펜이며 수첩, 노트북에 카메라 다 내려두고서야 터져 나온 입바른 소리. 할 말을 못하면 탈 난다. 말하기를 업 삼은 이들 처지가 말로 다 못할 지경이라니 큰 탈이다. 제작거부를 했고 파업에 나섰다. 일손을
폭설. 기록적인 한파가 뒤따랐다. 55년 만이라고. 북극 기온이 올라 제트기류가 약해졌고 그 때문에 냉기를 가두지 못했다나. 각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고 사람들 이제 저 까마득한 남극이며 북극의 눈물을 떠올린다니 환경 다큐멘터리에 빚진바 크다. 젖 먹이느라 바짝 마른 북극곰 어미는 사냥감 찾아 다 녹아 질퍽이는 얼음판을 필사적으로 기었고 극한의 땅에서
술 중에 '갑'이 낮술이라고 청년은 말했다. 옆자리 정치인이 맞장구쳤다. 건배, 이른 시각 호프집이 붐볐다. 자칭 '청년잉여'들이 홀짝홀짝 저마다 잔을 비웠다. 하지만 귀를 쫑긋, 눈은 번쩍 세워 뜬 채 자릴 지켰다. 말 중에 '갑'이라는 취중진담을 기다렸다. 각설, 위원장은 청년대책을 물었다. 청년의무고용할당제며 실업수당, 청년 인지적 관점까지
겨울비가 추적추적. 3천원 하는 비닐우산도 미처 구하지 못한 사람은 그저 땅을 보고 발걸음 총총 보챘다. 머리숱 적은 노신사가 도로 옆 상점 처마 밑을 지켰고 빨강 파랑 우산 챙겨 든 이들만이 여유롭게 인도를 걸었다. 꽝 소리에 놀라 흠칫. 굴착기 삽질에 건물 넘어가는 소리가 내내 요란했다. 철골조 타던 건설노동자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무심히 게걸음질 바빴
백화점 주차장이 아침부터 북적였다. 세일기간 알리는 현수막이며 온갖 장식이 크고 또 화려했다. 설 대목, 없는 게 없다는 백화점 입구에 차례상이 떡 하니. 떡이며 온갖 과일, 나물에 부침개까지 가지런했다. 차례주 올리고 사람들 큰절을 했다. 반절도 공손히 빼먹지 않았다. 위패엔 '서비스노동자조상님 신위(神位)'라고 적었다. 설 연휴엔 고향 찾아 가족과 함께
가만 꼭 잡았다. 손 내밀어 응원했고 손 붙들어 화답했다. 조몰락 조몰락 오래도 잡고 섰다. 얼었던 손이 녹았고 굳었던 표정이 밝아졌다. 눈 맞추어 같이 웃었다. 눈 맞으며 함께 외쳤다. 대학에서 청소하던 노동자들이 먼 길 부러 찾았다. 찬 바닥에 철퍼덕, 옆 지기를 자청했다. 억울함을 나눴다. 용기백배, 덕성여대 식당에서 일하다 해고된 윤혜숙(57&mid
평택시 칠괴동 자동차 공장 정문 앞에 사는 멍멍이는 많이도 컸다. 1년 전, 멋도 모르고 뛰며 뒹굴던 새끼 유일이는 부쩍 자라 의젓하다. 다리도 길어 훤칠하다. 짧은 다리 어미 키를 훌쩍 넘겼다. 하지만 식탐 버릇 여전해 지난밤 고구마 굽던 난로 곁을 맴돌며 연신 킁킁댔다. 콧물 줄줄 흘리며 싸다녔다. 노조 조끼 입은 아저씨 곁에 착 붙은 이유가 뻔했다.
바람은 드셌고 시야는 흐렸다. 눈발 사납게 날려 뺨을 때리고 손발 차갑게 얼어 무감했다. 싸매고 입고 둘러 가려 봐도 거기 빈틈. 기어코 바람 들어 할퀴면 생채기인 양 아렸다. 돌풍에 휘청, 황급히 손 뻗어 잡은 나뭇가지가 투둑 툭 힘없이 부러졌다. 제 입은 눈옷을 다 떨궜다. 등 짐은 무거웠고 갈 길은 멀었다. 마냥 높았다. 가 닿을 듯한 저기 봉우리가
뜨고 지고 하는 것이 저기 붉던 해뿐이랴. 돌이켜 보고야 수많은 것들의 부침을 알았다. 한 해 살이 기어코 해낸 이들이 저기 순천 용산(龍山)에 올라 해넘이를 살핀다. 새로 장만한 큰 카메라며 스마트폰 들고 찰칵, 저마다의 작품 하나씩을 남긴다. 누렇고 또 붉던 해가 껌벅 넘어가면 사람들 감탄사를, 누군가 장탄식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한 해를 마감한다. 뜨
작업복이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오래 굶어도 배 못 만드는 여자. 농성 살이 재미없어도 웃어 주는 여자. 그저 바라만 봐도 위로가 되는 여자. 85호 크레인,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앞에서 번번이 돌아섰지만, 사람들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최루액 물대포를 견뎠다. 밤을 꼬박 새워 가며 그 집 앞을 지켰다. 풍등을 날렸고 풍찬노숙을 자청했다. 재고
북적이던 일본대사관 앞.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가 무대에 올랐다. 술렁이던 사람들, 이내 터져 나온 야유. 시민들은 유력 정치인의 이름 석 자 대신 "내려가"를 연호했다. "자격 없다"고 소리쳤다. 노력하겠다는 약속 남겨도 믿는 이가 적었다. 사람들은 그이를 철새라고 했다. '딴나라당'이라고도 말했다. 정봉주 전 의
1천회, 매주 수요일이면 어김없던 시위가 14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이어졌다. 20여년째다. 참가자도 취재진도 많아 발 디딜 곳 없었다. 사람들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읽고 구호를 외쳤다. "사과하라" 그 한마디, 구호는 짧았다. 저마다 준비한 선전물을 오래 들고 벌섰다. 할머니는 울었다. 트위터 이용자들이 모금해 마련한
야속했지만 그저 바라볼 뿐. 정문 철창은 굳게 닫혔다. 두어 마디 욕 섞어 소리도 쳐 봤지만 공장으로 돌아가는 그 걸음 붙들진 못했다. 언젠가 형님이었고 아우였고 친구였지만 처지는 갈렸다. 이해가 달랐다. 빨간 머리띠 묶고 사람들 집회를 열었고 천막을 쳤다. 공장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작업복 입은 사람들 그 너머 집회를 가졌고, 공장을 지키자고 외쳤다.
마이크, 수첩에 볼펜, '조중동 방송은 반칙왕'이라고 적힌 손피켓까지. 파업 결의대회 나선 언론노동자 두 손이 바빴다. 연사의 발언을 꼼꼼히 적었고, 위원장 인터뷰를 카메라에 담았다. 받아 적고 또 묻기를 여러번. 기계를 멈추고 세상을 바꾸는 일도, 그 현장 촘촘히 기록해 남기는 일도 누군가에 미룰 순 없어 모두 제 몫이었다. 정론직필·공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