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같이 일하는 언니가 제사를 지내야 하니 잔업을 빼달라고 했더니 회사 관리자가 ‘제사는 밤에 12시 넘어서 지내는 것 아니냐’고 구박했대요. 그 언니는 ‘제사는 그냥 지내냐, 그럼 요리는 누가 하냐’고 그러고요. (일한 지) 10년 된 언닌데….”

박연수(가명·42)씨는 인천 부평공단에 위치한 화장품 용기 제조업체 ㄱ에 다닌다. 기본 근로시간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지만, 잔업이 사실상 강제다. 주 5일 중 나흘은 2시간30분, 하루는 2시간 잔업을 해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를 꼭 맞춘다. 주 52시간을 넘겨 일할 때도 있다. 회사는 탄력근로제라서, 법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인데 노동자들은 탄력근로제에 동의한 적도, 대신 동의할 근로자대표를 뽑은 적도 없다.

회사를 그만둘 것이 아니라면, 회사에 밉보이지 않게 시키는 대로 일할 뿐이다.

박씨 사업장 문제만은 아니다. 사용자와 대등하게 교섭할 수 있는 노조가 없다면 현장의 근로시간 제도는 사업주 뜻대로 움직인다. 연장근로는 일 단위(8시간) 초과분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 단위(40시간)로 계산해 근로기준법 위반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며 사업주의 재량을 키운 최근 대법원 판결이 우려스러운 이유다.

7일 <매일노동뉴스>가 대법원 판결이 지닌 의미와 현장에 미칠 영향을 살펴봤다.

대법원 판결에도 가산수당 지급은 그대로

대법원은 지난달 1주 근로시간 중 법정근로시간(40시간)을 초과한 부분을 연장근로시간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일 법정근로시간(8시간)을 초과한 근로시간을 연장근로시간으로 보고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사업주를 처벌해 온 고용노동부 행정해석과 거리가 있다.

이번 판결은 항공기 객실청소업체 대표 A씨가 주 연장근로 한도 12시간을 초과해 일을 시킨 혐의를 받는 형사사건의 상고심이다. 주 52시간 상한제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연장근로시간을 어떻게 계산할 것인지의 문제다. 가산임금 지급과 관련한 민사소송에는 직접적 영향을 주지 않는다.

대법원도 판결문에 “가산임금 지급 대상이 되는 연장근로와 1주간 12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로의 판단 기준이 동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며 가산임금 지급시 연장근로시간 계산과 다르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근로기준법 50조2항은 “1일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하루 8시간을 초과한 근로시간에는 가산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연장근로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노동부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에 따른 행정해석 변경에 대해 “가산수당과는 상관이 없고, 대법원 판결의 취지도 연장한도 위반에 대한 것이니 그 부분에 관한 것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업주 재량권 넓힌 대법원 판결

문제는 이번 대법원 판결이 사업주가 연장근로를 활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 놓은 데 있다. 일 12시간(고정근로 8시간+OT 4시간)씩 주 4일 일하는 노동자의 경우 8시간 연장근로시간을 합산한 기존의 셈법에서는 연장근로가 16시간으로 법 위반이었지만, 주 단위 근로시간 총량은 48시간으로 위반이 아니다. 근로일·소정근로시간이 적은 교대제에 장시간 근로 유인을 높일 것으로 보인다.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장시간 노동, 교대제 근무가 이뤄지는 제조업·콜센터 같은 현장에서는 하루 8시간 근무, 2~3시간 잔업 등이 고정적으로 이뤄져 왔다. 그런데 이번 판결로 일 연장근로 제한이 없다는 사실이 재확인됐고, 사업주에게 경기·시장 상황, 원청의 요청 등에 따라 현행보다 불규칙한 연장근로를 사용할 수 있다는 시그널을 줬기 때문이다. 특히 노조가 없는 86%의 사업장, 규모가 작은 사업장의 몰아쓰기 노동이 우려된다.

이정훈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5일에 걸쳐 하루 2~3시간만 관행적으로 연장근로를 하던 곳들이, 특정일 3~4일 정도만 몰아서 일 시키고 하루는 나오지 말라고 하는 식으로 운영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정책국장은 “노동시간은 주 52시간보다 줄이되, 사업주의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현장 근로시간 주먹구구 운영
사업주 시키면 노동자는 따를 수밖에

근로시간에 관한 법적규제가 있지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현장 상황은 이 같은 우려를 깊게 한다.

화장품 용기 제조업체에서 5년째 일하는 박연수씨는 주 5일, 잔업을 포함해 하루 10~10시간30분씩 일한다.

잔업과 특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특근에 동그라미 안 하면 (하겠다는) 사람 나올 때까지 기다려요. 몇 명 세워놓고요. 한 언니는 아이가 축구하다가 다쳐서 집에 가야하는데 면담하자고 하고 ‘너만 애 키워 봤냐. 애들 다 다치면서 크고, 회사 인원 충원 안 되는 것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해서 결국 그만뒀어요. (아이가 있는) 그 또래 여성들은 버티지 못하고 나가요. 회사에서 압박을 넣어 거의 못 다니게 해요.”

주말 특근도 있다. 회사는 탄력근로제라고 설명하지만 누구의 동의를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일이 많은 주(일)에 근로시간을 늘리는 대신 다른 주(일) 근로시간을 줄여 주 평균 40시간의 근로를 맞추는 탄력근로제는 주 최대 64시간 노동이 가능하다. 2주 이상 3개월 이내 사용하면 근로자대표와 서면합의가 필요하다. 박씨는 “노사협의회가 있고, 협의회장이 관리자”라며 “개별 노동자 의사를 묻는다든가 수렴하는 과정은 없다 보니, 저희(일반 노동자)가 알 수 있는 내용은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이런데 일 노동시간 한도가 없다면 불규칙·장시간 노동이 늘까 걱정이다. 그는 “최저임금은 이만큼 줘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 모든 수준이 최저임금에 맞춰져 있다”며 “어떤 기준(일 연장근로 한도)을 정해 놓지 않으면 현실은 더 안 좋게 ‘최저’로 향해 가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재영 금속노조 부평공단지회장은 “근무가 꾸준해야 고용이 보장되는 것인데, 하루 몇시간 일해도 상관없다고 하면 일 있을 때는 파견직들 뽑아 일주일 근무시키고 해고하고 이런 일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조업 파견은 불법이지만, 현장에서는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다.

정부 법개정·행정해석 변경 추진 “상황 더 악화”

원청의 공정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조선소 하청노동자 상황도 비슷하다. 사상공 ㄱ씨의 지난해 11월 근무시간표를 보면 11월13일(월)부터~19일(일)까지 7일 동안 58.5시간(일요일 휴일)을 일했지만, 같은달 20일(월)~26일(일)까지는 46시간(월·금 휴일)을 일했다. 1일부터 10일까지 일이 많은 경우 주말 없이 일하고, 일이 없는 평일에는 쉬기도 했다. 윤용진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사무장은 “조선소는 법이 통하지 않는 무법천지”라며 “공정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잔업도 하고, 철야도 하고, 조기출근도 많이 한다. 도장부는 검사일정에 따라 주중에 쉬고 주말에 나와 일하는 경우도 있지만 휴일근로수당도 다 포함된 포괄임금제라 가산임금도 없다”고 말했다.

노동부는 대법원 판결에 “경직적 근로시간제도로 인한 산업 현장의 어려움을 심도 깊게 고민해 도출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사업주의 연장근로시간 활용 재량을 넓힌 판결에 ‘산업 현장의 어려움’을 해소했다고 부각시키면서도, 노동자 건강권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나아가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연장근로시간 총량을 계산해 연장근로 사용의 유연성을 확대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정훈 정책국장은 “노동계는 일 단위 연장근로 한도가 필요하다는 입장인데 법원은 연장근로 한도를 주 단위로만 봤고, 정부는 한술 더 떠 월로 가자고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박은정 인제대 교수(법학)는 “대법원 판결은 형사처벌을 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법적 근거 없이 일일 근로시간도 제한돼야 한다는 전제를 할 수 없었던 것”이라면서도 “우리나라의 장시간 근로에 대한 문제제기나 장시간 근로를 줄여 나가야 한다는 국제적 분위기와는 상당히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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