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화섬식품노조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매일 업무량에 따라 근로시간을 다르게 정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취지의 법원 판결이 나왔다. 업무가 많을 때는 몰아서 일을 시키고 업무가 없을 때는 근로시간에서 제외하는 이른바 ‘근무시간 꺾기’는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유연근무제와 달라 부당하다는 취지다.

일이 많을 때 집중해서 일하고 쉴 때는 길게 쉬자는 취지의 ‘연장근로 관리단위 확대’ 방침에 경종을 울린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고용노동부는 이른바 ‘주 최대 69시간’으로 논란이 된 근로시간 제도개편을 일부 업종과 직종에 적용하는 방안으로 선회했다. 이와함께 하루 최대 21.5시간 몰아쓰기 노동이 가능하도록 행정해석 변경을 추진하기로 했다. 판결이 확정되면 노동부 방침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수출입 화물 ‘고무줄’ 근무, 노조 반발

9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재판장 정현석 부장판사)는 최동호 화섬식품노조 인터텍킴스코지회장이 회사를 상대로 낸 부당전보 무효확인 등 소송에서 최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회사는 1심에 불복해 항소했다.

소송의 발단은 수출입 화물을 검정하는 노동자들의 ‘고무줄’ 근로시간에서 비롯됐다. 인터텍킴스코는 수출입 선적 화물을 검사·인증하는 업무를 주 사업으로 한다. 업무 특성상 직원들은 선박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다. 거래처 주문량에 따라 당일 또는 전날에야 근무시간을 통지받았고, 대기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휴일도 사전에 정해지지 않아 미리 휴가계획을 세우기도 어려웠다. 사측은 2021년 3월께부터 경영상 어려움을 이유로 지역사무소 중 충남 서산시 대산사무소 소속 직원들에게 고무줄 근무방식을 요구했다.

회사 제안은 ‘업무가 과다할 때는 다음날 주간 근로시간을 당일의 야간 근로시간으로 변경하고, 업무가 없는 시간은 근로시간에서 제외하는 방식’이었다. 근무시간을 주 40시간(평일 오전 9시~오후 6시)으로 정한 단체협약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될 처지에 놓였다. 대산사무소 직원들은 반발했다. 사측이 제안한 근무방식 대신 사무소에 직원 한 명을 충원하거나 소정근로시간은 지키되 출퇴근시간을 2개조로 나누는 방안을 제시했다. 지회는 불규칙한 근무시간과 연장근로 해소, 포괄임금제 폐지 등을 요구했다.

초압축노동 반대하자 지회장 전보에 직장폐쇄

이때부터 ‘압박’이 시작됐다. 2021년 9월24일 노조가 파업을 예고하자 사측은 직장폐쇄로 맞섰다. 이어 그해 10월 대산사무소 직원 3명을 다른 지역사무소로 전보했다. 결국 조합원이 다수 이탈하자 노조는 파업을 철회했다. 급기야 사측은 대산사무소 축소 운영에 이어 전면폐쇄키로 했다. 회사 대표는 “대산사무소 상황을 볼 때 사무소를 전면폐쇄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결국 2022년 3월 이사회에서 대산사무소 폐쇄를 의결했다.

대산사무소 검정원인 최동호 지회장도 ‘직격탄’을 맞았다. 전면폐쇄 결정 이후인 2021년 11월12일 회사는 최 지회장을 서산에서 인천사무소로 전보명령했다. 다른 조합원 2명도 다른 사무소로 함께 전보됐다. 그러자 최 지회장은 2022년 6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법원은 전보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전보는 근로의 장소를 변경하는 것임에도 원고의 동의를 받거나 협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이뤄졌다”며 “업무상 필요성이 크지 않은 데 반해 원고에게 큰 생활상 불이익을 주게 되므로 합리적인 인사권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판시했다.

법원 “정당한 인사권 아냐” 위법 확인
윤석열표 근로시간제 제동 걸릴까

재판부는 특히 회사가 강요한 ‘유연근무제’를 질타했다. 사측은 “대산사무소 직원들이 관행으로 자리 잡은 야간근로 후 다음날 주간근무의 시업시간을 변경하는 형태의 유연근무를 거부함에 따라 대산사무소에서의 연장근로·야간근로가 어려워져 경영이 악화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고가 주장하는 유연근무는 매일매일 업무 경중에 따라 근로시간을 달리하는 것으로 근로기준법에서 예정하는 유연근무제(탄력적 근로시간제·선택적 근로시간제)와는 형식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회사가 조합원들이 단체협약상 근무시간을 준수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데도 다른 형태의 근무방식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측이 주장한 ‘경영악화’는 사측이 대산사무소 직원들에게 업무 반려를 지시해 업무 자체가 감소한 영향일 뿐 직원들의 유연근무 거부가 원인은 아니라고 꼬집었다. 사측의 태도 역시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대산사무소 축소 운영에 대한 논의 4일 만에 전면폐쇄를 예고한 행동은 지회에 대한 적절하지 않은 교섭 태도”라며 “사무소 폐쇄와 전보가 정당한 인사권 범위 내에 포함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노동시간 유연화’에 대한 사법부 판단은 이례적이다. 법조계는 임의로 사용자가 정한 근무형태가 부당하다는 점이 판결로 확인됐다고 분석했다. 최 지회장을 대리한 손명호 변호사(법무법인 오월)는 “회사가 일방적으로 요구한 유연근무제는 출퇴근 시간을 특정하지 않고 주문량에 따라 변동되는 형태로서 단체협약과 근로기준법에 위반된다고 법원이 판단한 점에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유연근무제는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최소 인원과 비용으로 장시간 노동을 조장하고 노동자의 생활 안정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것으로 위법이라는 점이 확인됐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불법적인 유연근무 형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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