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정부가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개선을 약속했지만 관련 논의는 지난 11월 이후 멈춘 것으로 확인됐다. 고용노동부는 신설된 산재보상제도개선 TF에서 논의를 진행할 계획인데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후퇴 우려가 나온다. 산재보상제도개선 TF는 노동부가 ‘산재 카르텔’ 논란으로 근로복지공단을 특정감사하던 중 산재보상제도의 구조적 문제점을 개선하겠다며 꾸린 기구다. 정부는 업무상 질병에 대한 노동자 입증책임 완화에 부정적이어서 노동계 등의 반발이 예상된다.

국정과제인데, 지난해 7월부터 논의 중단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개선은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다. 2023년 사업계획을 보면 “업무상 질병에 대한 구체적인 인정 기준 마련, 역학조사 생략 대상 범위 확대”가 포함돼 있다.

노동부는 국정과제 이행을 위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시행령 ‘별표 3’ “업무상 질병에 대한 구체적인 인정 기준” 개정안(방안) 마련을 위한 포럼을 꾸려 지난해 4월 논의를 시작했다. 시행령 별표 3은 뇌혈관 질병 또는 심장·근골격계·호흡기계·소음성난청 등 업무상 질병에 대한 구체적 인정 기준을 담고 있다.

포럼에는 노동부·근로복지공단 관계자를 포함해 노사가 추천한 직업환경의·공인노무사 등 전문가가 참여했고, 지난해 7월까지 네 차례 이뤄졌다. 노사 의견은 팽팽히 갈렸고, 같은해 11월 근로복지공단에 대한 특정감사가 진행되면서 논의는 사실상 중단됐다.

노동계는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게 한 현행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에 “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돼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사회통념에 따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는 내용을 추가하고, 개별 질병에 대한 인정 기준 완화를 주장했다. 80데시벨부터 명백히 청력손실이 발생하는 만큼 소음성난청의 인정 기준을 현행 85데시벨에서 80데시벨로 낮추자고 주장했다. 미국산업위생학회(ACGH)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이 외에도 급식 등 조리과정에서 발생한 조리흄에 노출돼 발생한 폐암, 야간노동·야간교대작업의 영향으로 발생한 유방암, 대장암 포함 등을 주장했다.

반면 재계 대표로 참여한 한국경총은 역학적·의학적 근거에 기반하지 않은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확대를 원칙적으로 반대했고, 기존에 있던 유해인자 노출기간 삭제 등에 부정적 의견을 밝혔다. 특히 폐암 인정 기준에 용접흄과 디젤연소물질 등이 포함돼선 안 되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정부는 소음성난청에 추정의 원칙을 도입한 뒤 관련 산재 승인이 큰 폭으로 늘고 있는 만큼 상황에 부정적이다.

업무상 질병 산재 승인 증가 마뜩찮은 정부

산재보상제도개선 TF에서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에 관한 논의가 진행된다면, 정부의 정책방향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TF는 올해 1월 말 킥오프 회의를 열었다. 해당 TF에서는 추정의 원칙을 포함해,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산재보상제도 등 포괄적인 사안이 다뤄질 전망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지난해 포럼을 통해 논의를 하다가 산재 카르텔 관련해 특정감사가 정해지고 해서 보류가 돼 있는 상태로, 특정감사 후 한 번 더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업무상 질병 기준이 완화할지는 불투명하다. 애초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을 국제기준 등에 맞춰 ‘개선’한다는 목적으로 논의가 시작됐지만, 현 정부는 업무상 질병 산재승인 증가와 부정수급을 연관지어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근로복지공단의 특정감사 결과를 발표하며 “지난 정부에서는 업무상 질병에 대한 입증책임을 완화해 인정범위도 대폭 넓혔다”며 “업무상 질병 관련 산재승인 신청 건이 147% 급증했다”며 기준 변경 필요성을 언급했다.

추정의 원칙을 포함해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이 현행보다 후퇴하거나, 개선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단 의미다.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개정 논의 방식 바꿔야”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 개정이 늦어지면서 피해는 노동자에게 돌아오고 있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급식조리사 폐암은 몇 십년째 산재 승인이 되고 있는데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에 넣어 학교뿐 아니라 전체 조리노동자의 산재신청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며 “실무적으로 산재가 인정되는 것들도 인정 기준에 넣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최 실장은 “인정 기준에 포함돼야 노동자가 산재를 신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접근성을 높인다”고 덧붙였다.

유산·사산은 현재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오랜 기간 구체적 인정 기준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에 관한 논의체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종란 공인노무사(반올림)는 “업무상 질병 인정은 포괄적인 기준으로 이뤄지는데, 의학 전문가 집단이 중심이 돼 기준을 정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지적했다.

권동희 공인노무사(법률사무소 일과사람)는 “외국의 사례를 보면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을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기구를 명시해 놓고 있다”며 “그런데 우리는 자문위원에 불과한 집단에서 논의해서 내용을 고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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