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림제지 공장 내부 전경. <무림제지 누리집 갈무리>

제지 공장에서 22년간 고온과 소음에 시달리며 3교대로 일하다가 대동맥이 찢어져 숨진 노동자에 대해 법원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불규칙한 노동시간과 긴장감이 큰 업무에 따른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법원은 판단했다. 제조업을 ‘주 52시간 상한제(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예외 업종으로 추진하는 최근 고용노동부 방침에 경종을 울리는 판결이다. 근무시간이 노동부의 과로 인정 기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있다면 과로로 인정해야 한다는 게 법원의 일관된 태도다.

40대 기계책임자, 야간근무 도중 쓰러져

28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 7부(재판장 정상규 부장판사)는 제지회사 노동자 A(사망 당시 48세)씨의 배우자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에서 최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공단이 항소를 포기해 지난 23일 1심이 그대로 확정됐다. 1심 결론까지 무려 3년이 걸렸다.

A씨는 무림제지 진주공장 생산부 가공파트 기계책임자로 일하던 중 변을 당했다. ‘무림제지’는 1959년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식 종이 대량생산을 시작한 대표적 제지업체다. A씨는 2019년 8월14일 오후 10시께 출근해 근무하던 중 다음날 새벽 3시께 기계조작실에서 쓰러졌다. 동료가 발견해 즉시 병원 응급실로 이송했지만, 약 1시간30분 뒤 끝내 숨을 거뒀다. 사인은 ‘대동맥 박리 및 파열’이다.

A씨는 평소 격무에 시달린 것으로 조사됐다. 전체 생산 스케줄과 품질 확인 관리를 담당하며 오전·오후·야간의 4조3교대 형태로 근무했다. 4일간 오후와 야간에 일하면 하루 쉬고, 4일간 오전에 일하면 이틀간 휴무하는 식이였다. 휴게시간(식사)은 오전과 오후 근무의 경우 1시간, 야간반은 30분(오전 1시~오전 2시)이 주어졌다.

125도 고열, 85데시벨 넘는 소음 노출
사망 전 ‘이틀 연속 야간근무’

노동강도는 강했다. 맨눈으로 제품 불량 여부를 검사할 때는 리프트를 타고 제지 롤 가까이 붙어야 해서 고온에 자주 노출됐다. A씨는 기계 1대당 배열된 12대 대형 롤에 감긴 제지의 불량 여부를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약 섭씨 125도 스팀으로 제지를 건조하고 다림질하는 기계를 다룬 것으로 파악됐다. 사고 당시 진주의 최고 온도는 34.7도에 달했다. 소음 노출도 컸다. 2019년 기계제어실 소음은 88.8~89.5데시벨로 측정됐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시행령이 정한 소음성 난청 기준(85데시벨 이상의 연속음에 3년 이상 노출돼 한 귀의 청력 손실이 40데시벨 이상)에 해당한다.

게다가 A씨는 사망 나흘 전부터 이틀 연속으로 야간에 근무했다. 연장근무도 3시간까지 포함하면 하루 12시간(오후 7시~다음날 오전 7시) 공장에 머물렀다. 하지만 공단은 사망 전 12주와 4주간 주당 평균 근무시간을 각각 49시간2분, 47시간23분으로 계산했다. 노동부 고시에서 정한 ‘뇌심혈관 질환의 업무 관련성 인정기준’인 60시간(12주)·64시간(4주)에 미치지 못한다. 업무시간을 이유로 공단은 유족의 유족급여 청구를 거부했다. 유족은 2020년 8월 소송을 냈다.

법원 “업무부담 가중요인 고려” 제지업 과로 1.6배

법원은 공단 판정을 뒤집었다. 심혈관 질환 위험요인인 과로와 스트레스가 작용했다고 보고 질병과 업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했다. 특히 업무부담 가중요인인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에 해당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고인이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불량사고가 발생할 수 있고, 이는 징계처분 등 인사조치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봤다. 실제 A씨는 제품 불량으로 2017~2018년 각 한 번씩 서면 경고처분을 받은 바 있다. 아울러 공단이 불승인 근거로 삼은 과로 인정기준은 산재보험법 시행령의 해석·적용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재판부는 “고인의 업무 특성상 작업 시작 전 환복·샤워·인수인계 시간이 소요되므로 실제 업무시간은 공단이 산정한 업무시간보다 길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게다가 동료 휴가로 사망 4일 전부터 이틀 연속으로 3시간 연장 야간근무를 해 신체적·정신적 피로도 상당한 가중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기간 교대제와 소음·고열의 작업환경이 직무 스트레스를 악화했을 것이라는 법원 감정의(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소견도 뒷받침됐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이번 사건처럼 판례는 업무시간이 과로 기준에 미치지 않는다고 해도 가중요인을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제조업·건설업 등 일부 업종에 ‘연장근로 유연화’를 적용하기 어렵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실제 구은회 PL(일환경건강센터)이 올해 발표한 ‘업무상질병 취약업종 탐색을 위한 표준화 질병률비(SIR) 분석’ 논문에 따르면 A씨가 일한 업종인 ‘종이제품 제조업’의 뇌혈관 질환 위험도는 남성의 경우 전체 노동자 대비 1.6배 높았다. 제조업의 뇌심혈관 질환 산재신청 건수와 산재 승인율도 타 업종보다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본지 2023년 11월27일 “‘주 52시간’ 제외한다는 업종, 이미 ‘과로 지옥’” 기사 참조>

법조계는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해 산재를 인정하지 않는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유족을 대리한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뇌심혈관 질환의 경우 업무시간이 급성·단기·만성과로 기준에 미치지 못했더라도 교대근무 여부나 작업환경 등 업무 내용과 환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게 법원의 일관된 태도”라며 “대동맥 박리와 파열도 동일하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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