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세탁물을 분류한 작업자의 흰 장갑이 까맣게 변했다. 세탁이 끝나고 물탱크로 모인 물도 시커멨다. 지난달 20일 경기도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블루밍’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작업복에 묻은 쇳가루와 기름때 냄새로 세탁소 안은 매캐했다. 작업자들은 “세탁시 장갑과 마스크는 필수”라면서 “우리가 이런 데 일하는 사람들은 오죽하겠냐”고 입을 모았다. 지난 7월12일 블루밍이 문을 열기 전까지 노동자들은 이런 작업복을 집에서 빨거나 더러운 채로 계속 입었다.

오염된 작업복, 가족 건강까지 위협

블루밍은 영세·중소사업장 노동자의 건강권 보호를 위해 반월국가산업단지가 있는 안산시 단원구에 마련됐다. 각종 공정에서 발생한 분진과 화학약품 등 유해물질로 오염된 작업복은 그 자체로 ‘산업폐기물’과 같다. 그러나 영세·중소사업장은 수천만 원 상당의 산업용 세탁기를 마련할 여유가 없다. 오염된 작업복을 장기간 착용하면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고, 집에서 세탁할 경우 가족들까지 질병에 노출될 수 있다. 이에 지방정부가 나섰다. 블루밍은 경기도가 지원하고 안산시가 경기도장애인복지회에 위탁해 운영하고 있다.

작업복 세탁처리 및 공정은 7단계로 이뤄진다. 수거→세탁물 분류→세탁물 전처리 작업→세탁→건조→다림질→배송이다. 수거·배송 서비스가 있어 노동자들은 직접 세탁소를 찾지 않아도 깨끗한 작업복을 입을 수 있다. 단돈 1천원(여름 상·하의 각 500원씩)이면 가능하다. 오전 9시 시작된 수거는 오후 2~3시 무렵 끝난다. 하루에 사업장 7~8곳을 들려 작업복 1천200~1천300벌을 수거한다. 비슷한 건물들 사이 지도에도 잡히지 않는 50명 미만 사업장을 찾아내는 게 첫 번째 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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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물질 범벅 작업복 3주나 입었는데…”

매주 수요일 블루밍을 이용하는 Y테크의 작업복은 기름때로 얼룩져있다. 의뢰업체의 요청에 따라 산업용 부품을 임가공하는 과정에서 기계를 사용하는 만큼 작업복에 기름때가 묻지 않는 날이 없다. 하지만 전 직원이 6명인 탓에 별도 세탁 시설은 없었다. Y테크 관계자는 “블루밍에 작업복을 맡기기 전까진 회사에서 대충 빨아 입거나 집에서 빨았다”며 “(집으로 작업복을 가져가면) 가족들이 싫어했다”고 말했다.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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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기업은 작업복 수거를 위해 사업장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유해 화학물질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C기업은 반도체 등에 이용되는 분말 소재를 코팅해 전기적 특성 등을 부여한다. 코팅 작업에서 발생하는 유해 화학물질이 사업장 벽에 빼곡히 쓰여 있었다. 파란색 방진복은 필수다. 블루밍 이용 전까진 3주간 입다가 폐기했다. C기업도 7명이 근무하는 소규모 사업장이라 산업용 세탁기를 구비하기 어려웠다. C기업 관계자는 “한 벌당 1만6천원 상당의 유지비를 줄일 뿐 아니라 직원들도 청결하게 입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작업복이 한 벌밖에 없는 사업장도 많다. 경기도와 안산시는 블루밍 이윤으로 여벌 작업복을 구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노동자엔 깨끗한 작업복, 장애인엔 공공 일자리 제공

수거가 끝난 작업복이 바로 세탁기로 들어가는 건 아니다. 사업장별로 분류할 수 있는 색깔 라벨을 붙이고, 주머니 검사를 하는 등 전처리 작업이 필요하다. 작업복에서 휴지·열쇠·장갑부터 나사·라이터·드라이버까지 갖가지 물건들이 나온다. 주머니 속 쇳가루도 털어줘야 한다. 때가 많이 묻은 부분은 산업용 세제를 묻혀 칫솔질을 한다. 고온살균스팀 세탁과 건조를 마치면 뽀송뽀송한 작업복이 나온다. 스팀프레스(다림질)는 이용자들을 위한 서비스다.

이 모든 작업을 진행하는 블루밍세탁소 노동자들은 모두 장애인이다. 이영식 블루밍세탁소 소장을 포함해 중증 장애인 3명, 경증 장애인 3명이 일하고 있다. 이 소장은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일을 못하는 게 아니다”며 “편견을 없애기 위해 더욱 깨끗이 세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블루밍을 이용하는 사업장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기존 이용자들은 입을 모았다. 블루밍 직원들도 산단 회의체에 홍보하는 등 영업 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경기도는 시화국가산업단지가 있는 시흥시에 두 번째 세탁소를 이번 달 개소할 예정이다.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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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산단으로 확장하는 작업복 세탁소
9곳에서 운영 중 … 올해 2곳 더 개소 예정

블루밍과 같은 공공 작업복 세탁소는 전국 9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2019년 11월 경남 김해의 ‘가야클리닝’이 국내 첫 작업복 세탁소다. 광주, 구미, 거제, 울산, 의령 등 6곳이 뒤를 이었다. 올해엔 당진과 여수, 안산에서 작업복 세탁소를 열었고, 시흥과 영암에서 개소를 앞두고 있다.

전국 주요 산단으로 작업복 세탁소가 확산하는 모양새지만 비용과 운영 측면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문길주 전남노동권익센터장은 “작업복 세탁소의 원래 취지는 비정규직 등 취약한 노동자들에게 정규직처럼 무료로 작업복을 세탁해주자는 것이었다”며 “현재 사용료가 저렴한 편이지만 나중에 비용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지금도 물가를 고려해 요금을 올려야 한다는 세탁소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황훈재 금속노조 경기지부 시흥안산지역지회 동양피스톤분회장은 “작업복 세탁소의 제안 취지는 정부 지원을 통해 무료로 세탁소를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었다며 “산업안전보건법에 근거해 노동자의 건강과 환경을 지킨다는 접근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우려가 나오는 건 작업복 세탁소 운영에 노동자 참여가 배제됐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문 센터장은 “현재는 지자체들의 일방통행이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를 위한 세탁소에 노동자 참여가 배제됐다”며 “작업복 세탁소 회의체계에 노사와 지자체가 머리를 맞대야 애로사항이 전달되고 문제점도 해결된다”고 강조했다.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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