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한번 추진해 볼랍니다.”

그에게서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얘기를 들은 게 벌써 3년 전이다. 2017년 지나가듯 들었던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가 2018년 지방선거에서 요술처럼 의제화되더니, 올해 4·15 총선에서는 ‘핫 아이템’이 됐다.

그랬던 그가 이번엔 “농민 이동세탁소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좀 엉뚱하더라도 이해해 달라”는 말과 함께.

3년 전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아이디어를 처음 제출한 주인공이자, 이제 농민세탁소 만들기에 시동을 걸고 있는 문길주(48·사진) 전남노동권익센터장을 지난 2일 오전 서울 정동 민주노총에서 만났다. 그는 왜 그리도 세탁소에 ‘집착’하는 걸까.

묻어 뒀던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기억 소환한
산업단지 노동자들의 종이가방 


“말도 마세요.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조차 쓸데없는 거 한다고 말렸으니까요.”

그가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를 처음 구상한 때는 8~9년 전이다. 2011~2012년 6기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실장 시절 ‘직업성 암환자 찾기 운동’을 하면서 노동자들의 ‘씻을 권리’에 대한 문제의식이 움텄을 때다. 당시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만들기를 노안실 사업계획으로 냈다가 대차게 ‘까였다’. 노동계가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철폐투쟁에 화력을 집중하던 시절이었다.

금속노조를 떠나 2013년 광주근로자건강센터로 자리를 옮긴 뒤 잊고 있던 ‘작업복 세탁소’를 소환하게 한 이는 센터를 찾아온 노동자들이었다. 50명 미만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 건강관리를 지원하는 센터에는 주로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찾아왔는데, 이들의 손에는 항상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종이가방에는 더러워진 작업복이 담겨 있었다.

일반세탁소에서는 쇳가루·분진·기름때가 묻은 두꺼운 작업복을 받아 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집에 가져가 빤다”는 노동자들을 보고, 무릎을 쳤다고 했다.

“물어보면 자기들도 찝찝하다는 거예요. 오염 물질이 묻은 작업복을 집에 가지고 가면 매번 따로 빨 수도 없으니 그냥 일반 세탁물이랑 섞어 빠는데, 가족들 피부에 트러블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는 거예요. 간혹 세탁기 두 대를 놓는 집도 있는데, 이런 우려 때문이죠.”

기아자동차·금호타이어·삼성전자 같은 대기업들은 공장에 자체 세탁소가 있지만, 중·소 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은 작업복을 집으로 가져가 세탁한다.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평등한 구조에 놓여 있다는 걸 확인한 그는 마음 한구석에 접어 뒀던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계획안을 2017년 다시 꺼내들었다. 하지만 당시 A4용지 2장짜리 계획안을 보는 주변의 시선은 찼다. “아이디어는 괜찮은데 지방자치단체를 설득할 수 있겠냐”는 우려가 많았다. “길주야, 너는 왜 안 되는 일만 벌이냐”는 타박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접을 수 없었다. 때를 기다리던 그는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광주시장선거에 출마한 3개 정당(더불어민주당·정의당·민중당) 후보들에게 ‘하남산단 노동자 세탁소 건립’을 제안하는 질의서를 보냈고, 모든 후보들에게서 ‘오케이’ 답변을 받아냈다.

“하남산단뿐 아니라 광주지역 모든 산단을 대상으로 작업복 세탁소를 건립하겠다”고 약속한 이용섭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광주시장에 당선되면서, 문 센터장은 전국 최초 ‘광주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건립’이 당장 실현될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광주시는 작업복 세탁소 건립의 법적 근거가 없다거나 예산이 없다는 이유를 대면서 미적댔다. 지역 여론에 호소해 겨우 작업복 세탁소 건립 타당성조사 연구용역을 시작할 수 있게 됐지만 이번에는 광주시의회가 발목을 잡았다. 전례가 없고, 다른 지역 노동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들며 연구용역비 4천만원을 전액 삭감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예산 절반을 되살려 연구용역에 착수했는데, 이 기간이 1년에서 1년반이 걸렸어요.”

광주시가 ‘지지고 볶는’ 사이 전국 최초 작업복 세탁소 타이틀은 경상남도가 가져가게 됐다. 광주시의원을 지낸 윤난실 경남도 사회혁신추진단장에게서 “기획안을 보고 싶다”는 연락을 받은 문 센터장은 지역이 어디든 노동자들을 위한 세탁소가 빨리 세워져야 한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기획안을 건넸다. 지난해 11월 광주가 아닌 경남 김해에 전국 최초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가 세워진 배경에는 이런 곡절이 있었다.

“광주는 하남산단 인근에 올해 7월1일 개소를 목표로 추진하고 있어요. 노동자들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행정이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죠. 제가 햇수로 4년째 세탁소에 집착하고 있는 것도, 게으른 행정 때문인 것 같아요. 노동자들이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 뭘 필요로 하는지 조금만 들여다보면 해야 할 일들이 나오는데 말이죠.”

전남지역 총선 출마자들 너도나도 공약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실현 불가능한 꿈처럼 여겨졌던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는 올해 전남지역 4·15 총선 출마자들의 필수 노동공약이 됐다. 지난해 12월 광주근로자건강센터를 그만둔 그가 올해 1월 전남노동권익센터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꾸준히 지역에 세탁소 바람을 일으킨 결과다.

실제 전남노동권익센터가 지난 2월 전남지역 국가산단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수요조사 결과를 보면 여수국가산단 플랜트건설 노동자 99.6%는 일이 끝난 뒤 샤워를 하지 못한 채 퇴근했고, 95.2%는 집에서 작업복을 빨았다. 화학물질·용제·페인트·용접흄 같은 유해물질 취급사업장이 많은 대불산단 노동자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75%가 집에서 작업복을 빨았고, 80%가 산단 내 세탁소 설치를 원했다.

한데 여수시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이다. 김해·광주 사례를 살펴 관련 조례를 제정하고, 내년 고용노동부의 ‘산업단지 산재예방시설 지원 공모사업’을 통해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준 것이다. 문 센터장은 “여수시 모습에서 예전 광주시가 떠오른다”며 “이 또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행정이 못 따라가는 사례 아니겠냐”고 씁쓸해했다.

“산업안전보건법에는 노동자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명시하고 있는데, 비정규직이나 50명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은 이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해요. 이를 융통성 있게 채워 줄 수 있는 게 바로 작업복 세탁소이자 샤워실이라고 봅니다. 노동자도 좋고, 사업주도 좋고, 공공일자리 창출로 지자체도 좋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업이죠. 작업복 세탁소를 통해 새로운 지역 노사민정 협력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정기훈 기자


농번기 농약·흙먼지 빨래에서 해방시켜 줄 농민 이동세탁소

작업복 세탁소를 궤도에 올린 그가 이번에 시작한 사업은 ‘농민 이동세탁소’ 설치다. 다소 엉뚱해 보일 수도 있지만, 농민들의 일상을 생각해 보면 무엇보다 필요한 시설이란 게 문 센터장의 생각이다.

전남 보성군 농촌마을에서 자란 그는 “어렸을 때 논에서 흙과 땀, 농약으로 범벅이 된 채 일한 뒤 집에 와서 옷을 털기만 하고 다음날 바로 입고 나가던 아버지 생각이 난다”며 “요즘처럼 특히 고령화된 농촌에서 어르신들이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와 집에서 농약과 흙먼지 묻은 옷을 세탁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농번기인 4~6월, 9~11월만이라도 마을회관이나 면사무소 앞에 이동용(차량) 세탁소를 두고 농민들의 작업복을 빨아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자고 제안했다.

“이장들이 마이크 잡고 ‘농약 묻은 작업복을 빨아 줄 테니 옷 놓고 가시라’고 방송하는 거죠. 농민들, 특히 여성농민들이 조금이나마 농약·흙먼지 빨래에서 해방되지 않을까요?”

인터뷰 이튿날 문 센터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동용 농민 세탁소 민원을 넣은 나주시·해남군에서 썩 만족할 만한 답변을 받지 못한 사실을 전했다. “농가마다 작업시간이 달라 수집과 배부가 어렵다”(해남군)거나 “계획과 예산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것 같다”(나주시)는 이유다. 보성군에서는 아직까지 답변을 받지 못했단다.

그는 “농민들의 직업력을 이해하면 될 텐데 아쉽다”면서도 “농민 세탁소도 반드시 만들어 보겠다”며 의지를 다졌다.

“길주야, 너는 왜 안 되는 일만 벌이냐”에서 “길주는 무슨 아이디어가 그렇게 많냐”로 주변의 인사가 바뀌기까지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 해냈다. ‘문길주표 농민 세탁소’ 또한 머지않은 일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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