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인 지난해 4월15일 한국노총을 찾았다. 그는 "한국노총의 친구가 되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노조를 '적'으로 돌리고 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정부가 올해 노동단체 지원사업을 하면서 노조 회계자료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노동조합’으로 한정했던 지원 대상을 ‘근로자로 구성된 협의체’로 개편하고 지원사업 예산(44억원)의 절반은 새로운 단체에 몰아준다는 계획이다. 정부가 '돈'으로 노동자를 길들이려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원 대상 절반 물갈이 예고
‘돈’으로 노조 길들이기 본격화

23일 고용노동부는 ‘노동단체 지원사업 개편방안’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노동단체 지원사업 공고는 행정예고를 거쳐 3월께 나올 예정이다. 개편방안에 따르면 노동단체 지원사업 수행기관이 ‘노동조합’에서 ‘근로자로 구성된 협의체 등’으로 확대된다. 노동부는 “노조 조직률이 2021년 기준 전체 노동자의 14.2%로 낮고 대기업 중심으로 조직돼 있어 다수의 미조직 노동자 이해를 대변하는 기관들은 참여가 어려웠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원사업 예산의 50%인 22억원은 신규 참여 기관에 배정해 근로자협의체, MZ노조 등 새로운 노동단체가 참여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업 내용도 취약노동자 권익 보호와 격차 해소, 산업안전 중심으로 개편한다. 노동부는 “그간 지원사업 상당 부분을 차지한 노조간부 교육과 국제교류 사업은 노조 자체 예산을 활용하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노조 회계자료를 정부에 내지 않은 단체는 선정에서 배제한다는 방침이다. 노동부는 이달 초 노조 회계가 의심스럽다며 1천명 이상 노조(총연맹과 산별연맹 포함) 344곳을 대상으로 노조 회계장부 보존·비치 의무 자율점검 결과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제출해야 할 서류는 비치 대상 서류 11개 항목 표지와 내지를 1장씩으로 △조합원 명부 △규약 △임원의 성명·주소록 △회의록 △재정 관련 장부와 서류(예산서, 결산서, 총수입원장 및 총지출원장, 수입 또는 지출결의서, 수입관계장부 및 증빙서, 지출관계장부 및 증빙서, 자체 회계감사 관계 서류) 등이다.

양대 노총은 소속 조직에 ‘내지 제출’ 거부 지침을 내리면서 노정이 대립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이번에 점검 대상이 아닌 1천명 미만 노조도 지원사업을 신청하면 회계 관련 서류를 제출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조 회계 관련 서류를 노동단체 지원사업 신청시 필수적으로 제출하도록 하겠다는 의미다.

이번에 지원 대상으로 확대한 근로자협의체의 경우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회계장부 비치·보존 의무가 없어 ‘형평성’ 논란도 제기될 수 있다. 또 국고보조금의 경우 별도의 회계처리 규정이 적용되기 때문에 노조법에 따른 노조비 회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데도 정부가 ‘말 잘 듣는’ 노조에만 선별해 ‘국고’를 지원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게 됐다.

한국노총 내부사업 대대적 정비
지원 없으면 자체 예산으로 가동
교육·정책연구 사업 축소 불가피

노동계도 ‘플랜B’를 검토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노동부의 국고보조금 지원사업 개편 방침에 따라 내부 사업을 대대적으로 정비한다. 노동부 사업 개편이 한국노총에 대한 지원을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이뤄진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국노총의 2022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노총이 노동부 지원을 받아 진행한 사업은 노조간부교육·정책개발연구·법률상담구조·국제교류사업 등 네 가지다. 총 26억원 정도다. 가장 큰 사업은 법률상담구조 분야다. 14억7천700만원을 지원받아 전국 19개 지역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 일하는 상담노동자 32명의 인건비와 사무실 운영비 등으로 지출한다.

한국노총은 30년 넘게 지역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지역상담소는 취약계층 지원의 최일선이다. 임금체불·부당징계 등 법률상담, 산재신청 지원, 구직자 대상 노동기본권 교육 등 하는 일의 범위가 매우 넓다. 대면상담, 전화 담, 온라인 문의 답변 등의 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법률상담, 최저임금 준수 등 기초노동질서 의식을 높이기 위한 길거리 캠페인도 한다. 정부가 할 일을 대신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지역 노조를 상대로 노동법 교육, 매년 바뀌는 노동정책 교육도 한다. 심지어 인사노무관리가 취약한 중소사업장 사측에 올바른 인사관리 방안도 알린다.

수도권의 지역상담소에서 일하고 있는 A씨는 “노동시장 양극화와 이중구조가 문제라고 하면서 대기업 노조 회계 투명성을 강조하는 정부가, 정작 취약계층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상담소 사업을 사실상 없애려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국고지원금 삭감 당시 피해를 겪었던 당사자가 이제 장관이 돼 가해자가 됐다는 점에서 자괴감이 든다”고 말했다.

노조간부교육사업을 수탁한 한국노총 중앙교육원은 기초노동법, 교섭 방법 등을 노조간부에게 교육해 왔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은 지원을 받아 노사관계·노동시장 문제 전반에 대한 정책개발연구를 하는 데 활용했고, 국제교류사업예산은 국제노동기구(ILO)·국제노총(ITUC) 등과 사업하는 데 쓴다.

한국노총은 정부 지원이 끊기면 총연맹 일반회계에서 지역상담소 운영 등 기존 사업을 이어 갈 예정이다. 교육·국제교류·정책연구는 사업축소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인력 재배치 등을 통해 한국노총의 다른 사업에 투입될 가능성도 있다. 교육·정책연구를 했던 전문가들이 일반사업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끝까지 버티겠다는 것”이라며 “다만 인력 재배치 과정에서 원치 않은 일을 하게 된 이들에게 퇴직의 이유가 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 경우에도 한국노총 일반회계로 지역상담소 등 기존 인력을 모두 고용할 여력은 2~3년 정도에 불과해 무한정 사업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지현 대변인은 “노동부는 국고사업으로 한국노총을 굴복시키고 길들이려는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노총 조합원 모두를 정부의 적으로 돌리고 싶다면 계속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김미영·제정남 기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