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정부가 노조에 회계자료 제출을 요구한 것은 위법하다는 취지로 국회입법조사처가 분석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 따라 보고를 요구할 수 있는 ‘결산 결과와 운영상황’ 자료에 ‘재정에 관한 장부와 서류’가 포함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분석대로라면 회계 장부의 표지·내지 제출을 요구하고 과태료 처분까지 예고한 고용노동부 행정이 법률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비치·보존 의무 있지만 정부 제출 대상은 아냐

국회입법조사처는 21일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이런 내용을 담은 ‘노조법 제26조·제27조와 제14조의 관계’ 조사·분석 보고서를 제출했다. 노조법 14조에는 노조사무실에 비치·보존해야 하는 서류 항목이 열거돼 있다. 조합원 명부·규약·임원의 성명 등은 노조 사무실에 비치하고, 회의록과 재정에 관한 장부와 서류는 3년간 보존해야 한다.

같은 법 27조는 “노동조합은 행정관청이 요구하는 경우에는 결산 결과와 운영상황을 보고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26조는 노조 대표자는 회계연도마다 결산 결과와 운영상황을 공표하고, 조합원이 요구하면 열람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취지의 조항이다.

노동부는 지난 1일 노조법 14조에 따른 재정에 관한 장부와 서류 등의 비치·보존의무 이행 여부를 점검하겠다며 “비치·보존 대상 서류별로 증빙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회계서류의 경우 표지와 내지를 사진 등으로 첨부하라고 적시했다. 조합원수 1천명 이상의 단위노조와 연합단체 334곳을 대상으로 했다. 노조법 27조에 따라 ‘결산 결과와 운영상황’을 보고받겠다는 취지다.

노동부의 이 같은 법령 적용이 합당한지는 발표 당시부터 논란이 됐다. 노조법 14조에 적시된 ‘재정에 관한 장부와 서류’가 무엇인지는 노조법 시행규칙 8조에 나와 있다. 예산서·결산서·총수입원장 등이다.

그런데 노조법 27조에서 행정관청이 노조에 제출을 요구할 수 있는 결산 결과와 운영상황에 시행규칙 8조에 적시된 회계 관련 서류가 포함되는지는 노동관계 법령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결산 결과와 운영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하위 법령이 없다는 의미다. 입법조사처도 이에 대해 “26조 및 27조의 ‘결산 결과와 운영상황’의 범위에 14조에 규정된 ‘재정에 관한 장부와 서류’가 포함되는지 여부는 현행 노조법에 명확히 규정되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재정에 관한 장부와 서류를 조합원이 아닌 외부에 공개하지 못하도록 외부반출·복사를 금지한 대법원 판례에 근거해 행정기관에 대한 자료 제출도 의무가 아니라고 진단했다.

정부 요구, 대법원 판례와 ILO 기본협약 위배

정부의 회계자료 제출 요구가 국내법 효력이 있는 국제노동기구(ILO) 87호 협약(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에 위반된다고도 했다. 입법조사처는 “ILO 협약 87호는 노조가 자유롭게 사업을 수립할 권리와 행정기관의 노조 권리행사 방해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며 “노조 운영에 대한 감독 조치는 남용을 방지하고, 노조 구성원들이 그들 자금(조합비)의 잘못된 관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에만 유용할 수 있으며 당국에 의한 간섭이 위험을 수반할 수 있는 경우에는 협약에 위반된다”고 밝혔다.

정부가 노조에 회계서류 제출을 요구하려면 법령 개정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입법조사처는 “현행법 체계상 노조법에 행정관청이 노조에 요구하는 결산 결과와 운영상황의 범위를 위임한 바 없으므로 위임명령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최근 대통령실은 노조회계 투명성 강화를 위해 노조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입법조사처도 지적하고 있는 법령 미비 지적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노조 회계자료 공개 문제에 대한 외국 사례는 어떨까. 입법조사처는 ILO 기준과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 실태를 담은 조사회답서를 이날 우원식 의원에게 제출했다. 미국은 회계장부를 조합원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연차회계보고서를 노동부 장관에게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 영국은 연차보고 의무와 조합원에 의한 회계정보 접근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미국과 유사하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이 두 나라를 콕 집어 선진국 사례로 소개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정부의 관리·감독을 규정한 법률은 없고, 노조 규약 등으로 스스로 규율하고 있다. 일본도 재정관련 문제를 법률에 명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노조 회계감사를 직업적 자격이 있는 (공인회계사 등) 회계감사인이 확인하도록 노조법에 명시하고 있다. ILO 결사의 자유위원회는 노조 회계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정부가 회계에 관한 통상적인 사항의 제출 요구는 할 수 있지만, 간섭이나 위험을 수반하면 기본협약 87호를 위반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ILO 87호 협약을 비준하지 않아 노동기본권 후진국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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