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총이 지난 20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윤석열정부의 노조활동 부당개입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정부가 노조에 회계자료 제출을 요구한 것은 대법원 판례와 배치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고용노동부는 노조에 회계장부 표지와 속지를 제출하라고 요구했지만, 노동계는 자율성 침해라며 반발하고 있다. 정부는 회계장부 비치·보존 결과를 미제출한 노조에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방침이다. 사실상 정부가 노조 회계자료를 ‘등사(옮겨 베낌)’하려는 의도가 깔렸다는 비판이 나온다.

법원, 회계자료 ‘등사청구권’ 제한 해석
“노조 자주적 운영, 이익 저해될 우려”

21일 <매일노동뉴스>가 입수한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대법원은 재정에 관한 서류가 외부로 반출되면 노조의 자주적 운영을 침해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등사청구권을 인정하면 재정에 관한 장부와 서류가 제3자에게 유출될 우려가 있다는 뜻이다. 정부 등 국가기관의 등사 요구에도 접목할 수 있다고 법조계는 평가한다.

이 사건은 고속노조 C지부 조합원 A씨 등 2명이 2015년 4월 지부를 상대로 문서열람 등 허가 청구소송을 제기하며 시작됐다. A씨 등은 지부에 회계자료의 열람·등사를 요구했다. 재정에 관한 장부와 서류를 사무소에 비치해 3년간 보존해야 한다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14조를 근거로 제시했다. 같은 법 26조에 따라 조합원의 요구가 있을 때는 결산결과와 운영상황을 열람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1심은 A씨 등의 열람·등사 청구 권한 모두 없다고 봤지만, 항소심은 열람권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노조법 규정의 취지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조직 유지와 활동을 위해 노조 재정의 민주성과 투명성을 확보한다는 데에 있다”며 조합비 운영을 공개하는 것이 조합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핵심 쟁점인 장부 ‘등사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노조 장부가 ‘외부’로 반출될 경우 ‘조합원이 아닌 사람’에게 서류가 유출될 우려가 있어 노조의 자주적인 운영이나 전체 이익이 저해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아울러 재판부는 “등사에는 장비와 시간이 소요되므로 이를 널리 허용할 경우 노조의 업무수행이 저해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2017년 2월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노조의 독립성·자주성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재정에 관한 장부와 서류의 ‘외부 반출’을 제한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노동계 “내지 제출 요구는 등사권 요구”
입법조사처 “최소한 제한” 법원 판가름 전망

노동계와 법조계는 대법원 판결을 국가기관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민주노총은 일괄적인 회계자료 요구는 노조탄압 수단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20일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은 “노동부가 자율점검 목적으로 서류의 비치·보존 여부 확인을 제시한 만큼 그 결과도 해당 조항의 이행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서류제출 요구에 그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노동부가 ‘내지 제출’을 문제로 삼은 것은 열람권을 넘어 ‘등사권’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조 요청이 있는 경우에 한정해 사후적으로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얘기다.

법조계 역시 회계장부 요구는 ‘월권행위’라고 해석했다. 정기호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장)는 “노조법 규정은 노조 운영의 민주성을 확보하기 위해 구성원 전체에게 공개돼야 한다는 것이지, 행정관청이 관리·감독하라는 의미가 아니다”며 “노조법은 장부와 서류를 비치하라고 규정했을 뿐 행정관청의 보고 의무는 부과하지 않는다. 고용노동부는 노조에 의무 없는 행위를 강요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노조 규약의 위법성이 드러나면 사법부가 판단할 문제인데도 행정관청이 나서 규약을 변경할 수 있도록 심사권을 부여하는 것은 단결자치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꼬집었다.

최종연 변호사(법률사무소 일과사람)는 “노동부가 노조법 27조에서 정한 결산 결과를 보고받을 권한에서 그 범위를 재정 관련 장부나 서류 일반으로 보는 것은 근거가 없는 확장해석”이라며 “만약 후속조치로 재정에 관한 장부를 조사하기 위해 노조사무실에 들어오거나 등사해서 반출하려고 한다면 노조의 자주적인 운영이 침해되는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회입법조사처 역시 회계자료 제출 범위를 제한해야 한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국회입법조사처는 21일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노조법 제26조·제27조와 제14조의 관계’ 보고서에서 “행정관청은 노조의 자주·독립성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노조가 최소한의 민주성을 보장하고 있는지, 해당 법률을 준수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결산결과와 운영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는 것”이라며 “그 대상은 취지에 부합하는 범위로 제한적이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노조가 행정관청에 보고할 때의 ‘재정에 관한 장부와 서류’ 범위가 조합원과 동일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결국 회계자료 제출 논란은 법적 분쟁으로 비화될 것으로 보인다. 노동부는 의무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표지와 내지를 요구하고 있지만, 노동계는 모두 제출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다. 정기호 변호사는 “노동부가 시정 기한 이후 노조에 과태료를 부과한다면 법원에서 행정처분의 적법성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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