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열악한 처우와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마필관리사가 잇따라 자살한 뒤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을 위해 설립했던 제주경마장조교사협회가 해산한다. 마필관리사의 고용과 처우가 협회 설립 이전의 열악했던 구조로 회귀될 처지에 놓였다.

5월 총회 열고 마필관리사에 “근로관계 해지” 통보

14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협회는 지난달 26일 사원총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했다. 비영리 사단법인인 협회는 설립시 주무부처인 농림식품축산부의 설립 승인이 필요하지만 해산은 신고제라 별도의 승인이 필요 없다. 해산일은 다음달 14일이다. 협회는 이미 해산 등기를 마친 상태로, 이미 소속 마필관리사 자택으로 근로관계 해지를 통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협회 소속 마필관리사는 현재 쟁의행위 중이라 부당노동행위 소지가 크다.

협회가 해산하면 현재 협회 소속으로 일하던 마필관리사는 개별 조교사와 고용관계를 맺어야 한다. 현재도 임금체불 등이 얽혀 있는 상황에서 만약 조교사와의 개별 고용계약으로 전환하면 만성적인 고용불안과 열악한 처우에 시달릴 우려가 크다.

김석수 마필관리사노조 제주경마공원지부장은 “해산 후 개별 고용계약으로 전환해 조교사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취업규칙을 개악할 것으로 보인다”며 “협회 설립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맞서 싸우는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설명했다.

잇딴 죽음 막고자 2018년 설립 “집단고용 보장”

협회는 2018년 7월30일 설립했다. 2017년 12월27일 노동계와 정부, 마사회, 그리고 국회가 함께 체결한 말관리사 고용구조 개선 협약에 따른 것으로 고용불안과 과로, 산업재해, 낮은 임금을 비롯한 열악한 처우에 시달리던 마필관리사와 기수가 잇따라 자살한 뒤 진통 끝에 이룬 합의다. 합의한 그해에만 5월 마필관리사 박아무개씨가 생을 스스로 등졌고, 이어 7월에도 이아무개씨가 목숨을 끊었다. 이후 같은해 9월에야 공공연맹·공공운수노조·한국마사회·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농림부가 참여하는 말관리사 직접고용 구조개선 협의체가 구성돼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마필관리사의 다단계 고용구조가 문제로 지적됐다. 마주가 조교사에게 경주마를 위탁하면 조교사는 기수와는 기승계약을 체결하고 마필관리사와는 말을 관리하는 고용계약을 맺어 고용하는 구조다. 경마시행처인 한국마사회는 기수와 마필관리사 고용구조에서 이탈한 모양새지만 마주와 조교사에게 지급되는 상금이 마사회 결정에 매여 있는 탓에 사실상 종속된 고용구조다. 마필관리사는 개인적으로 계약을 체결하는 터라 계약기간과 임금·처우 등에 차별이 심했고, 경력을 쌓아야 조교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구조 때문에 개선을 요구하기도 힘들었다.

사회적 합의 당시 노사정은 말관리사를 집단고용해 고용안정을 보장할 수 있도록 서울과 제주·부산에 각각 조교사협회를 설립하고 협회가 △조교사 소속 마필관리사를 직접고용하고 △마필관리사의 채용, 단체교섭, 단체협약 체결, 예산편성 및 배분권한을 갖고 △마필관리사에 대한 고용주체성을 명시하기로 했다. 당시 일부 마필관리사들은 마사회 직접고용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약 협회가 예정대로 해산한다면 마필관리사들은 협회 구성 이전의 불안정한 고용형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또다시 죽음이 이어질까 하는 공포감 섞인 우려가 생기는 배경이다.

임금체불 17억원 노동부 진정 이후 “못 주겠다” 꼼수?

협회 해산 배경에 대해서는 추측만 있는 상황이다. 노동계는 지부와 임금체불 갈등이 기폭제가 된 게 아니냐고 짐작하고 있다. 현재 지부는 최근 3년간의 임금체불액 17억원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이 돈은 마필관리사의 당직수당이다.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업무가 종료한 뒤 말 관리를 위해 약 네 시간 동안 마방(마구간)당 한 명의 당직근무자를 투입하는데 이 수당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훈 정의당 비정규직상담창구 전문위원(공인노무사)은 “당직근무에 대해 휴일은 4만원, 평일은 2만원 수당을 지급하는데 법에서 정한 연장·당직근로 수당에 현저히 미치지 못해 이에 대한 3년치 미지급 임금을 지급하라고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협회가 이 돈을 지급하지 못할 상황이라 아예 문을 닫는 방식이 아니냐는 관측이다.

만약 협회가 예정대로 해산한다면 이 돈은 받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지부는 해산 소식을 접한 이후 다급하게 협회 재산에 대한 가압류를 신청한 상태지만 협회가 실제로 해산하고 이후 재산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지급할 돈이 없다면 채권은 살아 있더라도 실제로 지급받을 방법은 요원하다. 이 때문에 임금체불을 회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도 나온다.

문제는 제주뿐 아니라 서울과 부산의 조교사협회도 재정 상황이 비슷해 자칫 협회 해산이 도미노식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김보현 노조 서울지부장은 “마사회가 예산을 사실상 통제하는 상황에서 서울과 부산도 협회 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라며 “협회 해산이 전국으로 확산할 염려도 있어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회적 합의 주체 정부·마사회 ‘강 건너 불구경’

관건은 사회적 합의 주체였던 정부와 마사회다.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마사회는 개별 법인의 노사관계라 개입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마사회 관계자는 “안타깝다”는 말을 전했다. 농림부 관계자도 노사관계 문제라며 좀 더 대화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전했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사용자 책임을 저버리는 협회에 우선 책임을 물어야 하겠지만 마필관리사의 고용과 처우를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마사회가 사회적 합의 이후 실질적인 개선에 나서지 않고 방관해 온 것이 문제”라며 “사실상 마사회가 정한 틀 안에서 조교사도 마필관리사도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구조임을 고려하면 사회적 합의 파기의 책임과 마필관리사 노동환경 개선의 책임을 마사회에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김 상임활동가는 “2017년 사회적 합의의 주체이자 움직이지 않는 마사회를 움직이는 공적 역할을 해야 하는 정부(농림부)와 국회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특히 정부와 국회는 마사회뿐 아니라 최근 잇따르고 있는 택배와 파리바게뜨 같은 사회적 합의 파기에 공동책임을 지고 합의를 실효적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역할을 하루빨리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협회쪽은 해산의 배경 등에 대한 질의에 아무런 응답을 내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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