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삼성전자 홈페이지>

삼성전자 화성 반도체공장에서 물류업무를 하는 A(55)씨는 12시간 근무하는 동안 대부분 서서 일한다. 2017년 삼성전자 협력업체 ㈜명일에 입사한 A씨는 웨이퍼(반도체 원판)를 운반할 때 쓰는 풉(FOUP) 여러 박스를 대차에 싣고 한 라인에서 다른 라인으로 옮기는 업무를 한다. 점심시간과 오전·오후 한번씩 주어지는 휴식시간을 제외하곤 종일 서서 일할 때가 많다.

하루 평균 3만보 이상을 걷는다는 A씨는 “의자에 앉아 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말했다. 다리가 붓거나 쥐가 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다리에서 시작된 통증은 발등으로 퍼졌고, 결국 지난해 11월 양쪽 다리 하지정맥류 시술을 받았다. 같은 업무를 한 B씨도 “물량이 많을 땐 1초도 앉아 있기 어려웠다”며 “(퇴근하고 집에 오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고 말했다. 지난해 걸을 때마다 발바닥 통증이 심해졌는데 최근 섬유종증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들이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내몰려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고 호소하고 있다. 통상 ‘하루 1만보 걷기’가 건강증진을 위해 장려되고 있지만, 일상적으로 지나치게 많이 걷는 작업은 적정 수준의 ‘운동’이 아니라 고강도 ‘노동’으로서 육체적 과부하가 걸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2시간 교대근무, 중량물 취급, 종일 서서 작업
산재신청 노동자 “의자에 앉는 게 소원이었다”

3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삼성전자 협력업체 ㈜명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호소하는 질병은 12시간 교대근무라는 장시간노동, 5킬로그램 이상 중량물 취급, 쉴 새 없이 라인을 오가며 서서 일해야 하는 노동환경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명일은 삼성전자 기흥·화성·온양 사업장에서 반도체 원·부자재 등을 운반하는 물류전문기업이다. 워크넷 고용형태공시제를 보면 명일 소속 노동자는 1천446명인데 이 중 정규직·무기계약직은 892명이고, 기간제는 554명이다. A씨와 B씨처럼 라인 간 풉을 옮기는 노동자들은 12시간씩 교대근무를 한다. 3조2교대로 4일 주간근무 뒤 2일 휴무를 하고 4일 야간근무를 하는 식이다. 주간조는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한다. 점심시간(1시간20분)을 제외하고 오전과 오후에 각각 50분, 40분 한 번씩 휴식을 취한다. A씨는 “원래 30분씩 휴식시간을 줬는데 공장라인에서 걸어 나오는 시간, 방진복을 벗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쉬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늘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나의 풉 안에는 최대 25개 웨이퍼를 담을 수 있다. 풉이 가득 찼을 때 박스당 8~9킬로그램 정도라는 게 현장노동자들 설명이다. 풉 8박스를 대차에 싣고 라인에서 다른 라인으로 옮기고 싣기를 반복하는데 대기시간이 거의 없어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고 한다. 풉을 이동시키는 자동화 설비가 마련돼 있지만 라인 간 이동이 건물이나 층을 이동해야 하는 경우 기계가 아닌 사람이 직접 실어 나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근로복지공단 산재불인정 “걷는 동작, 혈류순환에 도움”
“운동 아닌 노동, 업무내용 구체적으로 따져야”

A씨는 하지정맥류를 직업성 질환으로 보고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 신청을 했지만 불승인 통보를 받았다. 경인지역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정적으로 서 있는 자세보다 걷는 동작은 근육의 반복적인 수축 및 이완으로 하지정맥의 저류를 감소시키고 혈류 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업무와 상병과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A씨는 공단 불승인 결정에 불복해 심사청구를 제기했다. B씨도 공단에 산재신청을 한 상태다. 같은 상병으로 산재승인을 받은 선례를 참고했다.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은 “업무 내용을 구체적으로 따지지 않고 단순히 걷는 동작이 혈류 순환을 원활하게 한다고 판단하기보다 충분한 휴식을 취했는지 여부, 실제 서서 일한 시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2020년 KTX 승무원에게 발병한 하지정맥류가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받은 사례를 보면 재해자는 하루 1만8천보 이상 걸었다. 당시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는 △하루 5시간 이상 서서 일한 점 △열차의 진동으로 하지에 많은 힘을 줄 수밖에 없었던 점 △불편한 구두 및 복장으로 인한 피로 누적 등 여러 요인을 고려했다.

자동차 부품사에서 장시간 선 채로 작업하다 족저근막염과 하지정맥류가 발병한 노동자가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받은 선례도 참고할 만하다. 이들은 도어트림 조립작업시 하루 10시간 이상 주 6일 일하며 하루에 1만5천~2만보 정도를 걸었다. 하루 30개 박스(하나당 7~13킬로그램)를 적재하고 생산제품을 대차로 옮기는 업무도 했다. 금속노조 울산지부에 따르면 해당 노동자들은 공단에서는 산재 불승인 통보를 받았지만 이후 행정소송에서 조정을 거쳐 요양불승인 처분을 취소해 사실상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받았다.

한인임 정책연구소 이음 이사장은 “하루 1만보 걷기가 적정 수준이라는 점은 대체적으로 알려진 사실인데 3만보 이상이라고 했을 때 일반 노동자 집단에서는 보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운동도 적당히 해야 하는데 이것은 노동이고, 일상적으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노동을 하게 되면 많이 걷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동시간이 길고, 교대로 야간근무를 하는 데다, 중량물을 취급하며 많이 걸어야 한다면 피로가 누적되고 신체적으로도 큰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 서비스일반노조
▲ 서비스일반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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