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11일 ‘사회통념상 합리성’과 관계없이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시 반드시 노동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며 판례를 변경했다. 성과연봉제 도입 등 근로조건 변경 절차가 엄격해 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할 때는 이유를 불문하고 노동자 과반이 가입한 노조나 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근로기준법에 ‘집단적 동의’ 요건이 도입된 1989년 이후 약 34년간 이어졌던 기존 판례가 뒤집혔다. 종전 판례 태도인 ‘사회통념상 합리성’과 관계없이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시 ‘반드시’ 노동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집단적 동의’ 받지 못한 경우
사회통념상 합리성 유효 여부 쟁점

1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현대자동차 간부급 직원 A씨 등 22명이 현대차를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반환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소송이 제기된 지 9년여 만의 결론이다.

현대차는 2004년 주 5일제가 도입되자 과장급 이상의 간부사원에만 적용되는 ‘간부사원 취업규칙’을 별도로 만들었다. 새 취업규칙은 연·월차휴가 조항을 삭제하고, 연차휴가 일수를 25일로 제한했다. 그런데 취업규칙을 제정하며 전체 노동자 과반수가 가입한 노조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현대차는 당시 간부사원 89% 동의만 받고는 취업규칙을 시행했다.

A씨 등은 취업규칙이 불리하게 변경됐는데도 사측이 일방적으로 변경해 무효라며 2014년 8월 소송을 냈다. 이들은 연·월차휴가와 관련된 부분은 무효로서 2004년부터 받지 못한 수당에 상응하는 금액을 부당이득 반환으로 청구했다.

소송 쟁점은 노동자의 ‘집단적 의사결정’에 따른 동의를 받지 않았더라도, 취업규칙의 변경에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음을 이유로 유효성을 인정할 수 있는지였다. 근로기준법(94조1항)은 이른바 ‘집단적 동의권’을 정하고 있다.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 근로자 과반수로 조직된 노조 또는 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기존 판례는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면 취업규칙 변경이 가능하다는 태도였다.

대법원 “집단적 동의권, 중요한 절차적 권리”

1심은 미지급 연·월차휴가수당을 (부당이득 반환 소송이 아니라) 직접 청구(소송)할 수 있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지만, 항소심은 청구를 일부 인용했다. 간부사원 취업규칙 중 연·월차휴가 관련 부분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해당하는데도 집단적 동의를 받지 않았고, 사회통념상 합리성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그러나 대법원은 달리 판단했다. ‘사회통념상 합리성’ 적용과 관련한 해석이 잘못됐다고 판단했다. 대법관 7명의 다수의견으로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된 취업규칙이 유효하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권은 헌법 32조3항에 근거하고 근로기준법 4조가 명시한 근로조건의 노사대등결정 원칙을 실현하는 중요한 절차적 권리”라고 설명했다.

특히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가 법적 불안정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개념 자체가 확정적이지 않고,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인정되는지 당사자가 쉽게 알기 어렵다”며 “근로조건의 조정은 근로자 동의를 구하는 사용자의 설득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명문에 집단적 동의 절차를 정하고 있는데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이유로 든다면 절차적 정당성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판례 변경, 근로조건 변경 절차 ‘엄격’ 전망

법조계는 이번 판결로 근로조건 변경 절차가 더욱 엄격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과거에는 종전 판례로 인해 폐단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근혜 정부가 2015년 추진했던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전제로 근로자 대표나 노조의 동의를 생략할 수 있는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에 관한 지침’이다. 임금피크제나 성과연봉제 강행으로 연결돼 파장이 일었다. 최근까지도 하급심은 집단적 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임금피크제가 유효하다고 판단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정기호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장)는 “장기간 논란이 됐던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폐기된 것은 근로기준법 도입 취지에 부합한다”며 “윤석열 정부가 추진 중인 직무급제 등 근로조건 변경에도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평가했다. 여연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노동자들이 집단 반대하는 취업규칙의 합리성을 인정한 것은 사용자 요구가 합리적이라고 본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이번 판결로 강행규정인 근로기준법의 엄격성을 다시금 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사 반응은 엇갈렸다. 한국노총은 이날 논평을 내고 “사회통념상 합리성은 주관적 개념으로 공정성에 문제가 많았다”며 “이번 판결로 대항력이 약한 개별 노동자를 움직여 노조를 무력화하고 근로조건을 개악하려는 시도가 종식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반면 한국경총은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는 노동법의 경직성을 완화할 수 있는 법리로 자리 잡아 왔는데도 대법원이 경직된 판결을 내려 유감스럽다”고 입장을 냈다.

‘집단적 동의권 남용’ 새 법리, 불씨 남아

불씨는 남아있다. 대법원이 ‘집단적 동의권 남용’이라는 새로운 법리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에 따르면 ‘집단적 동의권 남용’은 취업규칙 변경의 객관적 필요성이 인정되고 사용자의 진지한 설득과 노력이 있는데도 노동자들이 합리적 이유 없이 반대하는 경우를 말한다.

대법원은 “근로자가 집단적 동의권을 남용한 경우에는 동의 없는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도 유효하다고 인정될 수 있다”며 “남용 여부는 법원이 직권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을 대리한 이환권 변호사(법무법인 이현)는 “이번 사건의 경우 노조 동의가 아예 없었는데도 동의권 남용이라고 해석한다면 불이익 변경이 아닐 수 있게 된다”며 “대법원이 명문 규정에도 없는 하나의 명문 규정을 만들어 낸 셈”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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