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취업규칙을 불이익하게 변경할 때 ‘사회통념상 합리성’과 관계없이 노동자 과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새 법리가 적용된 대법원 첫 판결이 나왔다. 올해 5월1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따른 것이다. 전원합의체는 ‘사회통념상 합리성’ 개념이 모호해 법적 불안정성이 크다는 취지로 기존 판례를 파기했다. 두 달여 만에 새로운 법리가 적용된 판결이 나오면서 비슷한 판례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성 비위’ 공공기관 팀장, 강등되자 소송
1·2심 ‘사회통념상 합리성’ 엇갈린 판단

2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전라북도경제통상진흥원 직원 A씨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강등구제 재심판정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지난달 29일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번 사건은 A씨가 성 비위 사건으로 2019년 5월 일반직 3급(팀장)에서 4급으로 강등되면서 촉발됐다. A씨는 언어폭력을 포함해 여직원들을 안거나 신체 부위를 만지는 등 성추행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진흥원은 2018년 2월 개정한 인사규정을 근거로 징계했다. 개정 규정에는 징계 종류에 강등이 추가되고 ‘성 관련 위법행위자’에 대한 양정기준이 별도로 마련됐다.

그런데 취업규칙 변경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집단적 동의’ 여부가 문제가 됐다. 지방노동위원회와 중노위 모두 강등이 정당하다고 판정하자 A씨는 2020년 1월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개정 전 규정에는 징계 종류로 강등을 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강등 처분은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쟁점은 ‘사회통념상 합리성’ 인정 여부였다. 1·2심 모두 노동자들의 집단적 동의가 없는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이라고 봤지만, 취업규칙 적용에 관해선 판단이 엇갈렸다. 1심은 노동자 동의를 얻지 않아도 될 만큼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는지에 대한 사측 증명이 없었다며 개정 후 규정의 효력을 부인하며 A씨 손을 들어줬다.

반면 2심은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개정된 규정은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으로 볼 수 없는 징계의 종류에 관한 것이며, 징계양정 기준에 관한 규정이므로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해석했다. 시행 후 2년이 지나도록 노동자들의 특별한 반대가 없었다는 점도 근거로 삼았다. 특히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오랜 기간 성희롱·성추행에 시달렸는데도 불이익이 두려워 감내해 오면서 가해자와 일상적으로 접촉할 수밖에 없어 피해 정도가 중하다고 꼬집었다.

대법원 “동의 없는 불이익 변경, 유효성 불인정”
‘절차적 정당성’ 따지는 판례 흐름 이어질 듯

하지만 상고심에서 사건은 반전을 맞았다. 지난 5월1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현대자동차 간부사원들이 낸 부당이득금 반환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사회통념상 합리성 이론’을 전면 폐기했기 때문이다. 1978년부터 이어 오던 기존 판례를 45년 만에 뒤집고 새 판례를 선언했다. 근로기준법 명문에 집단적 동의 절차가 있는데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이유로 든다면 절차적 정당성을 도외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취지다.

새 법리는 A씨 사건에 그대로 적용됐다. 대법원은 상고이유는 생략한 채 직권으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면서 근로자의 집단적 의사결정 방법에 따른 동의를 받지 못한 경우, 노조나 근로자들이 집단적 동의권을 남용했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해당 취업규칙의 작성 또는 변경에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유효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원심은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에 해당함에도 근로자의 집단적 의사결정 방법에 따른 동의를 받지 않은 (인사규정) 개정에 관해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는 이유로 유효하다고 봤다”며 원심을 전부 파기했다.

이후 ‘절차적 정당성’을 중요시 판단하는 판례가 쌓일 것으로 보인다. 다만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판단기준이 엄격해질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법조계는 “A씨는 성 비위에 연루돼 중징계 대상이 됐는데도 절차적 하자로 징계처분이 무효가 됐다”며 “향후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여부에 대한 법리 다툼이 더 심해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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