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쿠전자 정수기 홍보 유튜브영상 갈무리

‘근로시간 개편’이 화두다. 정부는 ‘주 최대 69시간(6일 기준)’ 근무를 허용하는 근로시간 개편방안을 입법예고 했다. 여론의 거센 반발에 부닥치자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주당 60시간 이상 근무는 무리”라고 진화에 나섰다. 현행 ‘주 52시간’과 ‘주 60시간’ 사이에서 근로시간이 조정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그럼에도 ‘몰아치기 노동’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크다. ‘과로’를 넘어 노동시간이 한꺼번에 몰리는 ‘폭로(暴勞)’ 사회가 될 수도 있다. <매일노동뉴스>는 장시간 노동, 특히 집중근무로 과로해 숨지거나 쓰러진 노동자들과 유족을 연속으로 심층 인터뷰한다. ‘몰아서 일하는’ 방식의 위험성을 짚는다. 과로사 통계를 분석해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살핀다.<편집자>

‘하루 평균 250킬로미터 운전, 하루 평균 11시간 근무(이동 및 정수기 설치·애프터-서비스), 얼음정수기(20~30킬로그램)와 설치가방(8킬로그램) 들고 이동.’

쿠쿠전자 정수기 수리기사 김한볕(44·가명)씨가 2017년 6월 뇌출혈로 쓰러지기 넉 달 전까지 수행한 근무기록이다. 김씨는 4개월간 평균 주 6일 하루 10시간 이상씩 일하다가 뇌내출혈을 일으켰다. 입사한 지 8개월 만이었다. 3년간 입원했지만 오른쪽 손발이 마비되고 사물이 두 개 이상 보이는 ‘복시’가 발생하는 등 심각한 후유증이 생겼다.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사실상 ‘영구장해’를 입은 것이다. 일을 할 수도, 차를 운전할 수도, 혼자 계단을 오를 수도 없게 됐다. 간단한 문서작업마저 벅차 집에서 그저 멍하게 있는 게 하루 대부분을 차지한다. 김씨는 지난 24일 <매일노동뉴스>와 인터뷰에서 “자유롭게 뛰고 운전하는 꿈을 자주 꾼다. 미래를 모두 빼앗긴 느낌”이라며 울먹였다. 뇌출혈 후유증으로 말은 어눌해졌다. 무엇이 김씨의 미래를 앗아간 것일까.

장거리 이동하며 작업, 주말 근무도 잦아

김씨는 성실하다고 자부해 왔다. 2016년 10월 쿠쿠와 ‘렌탈제품 설치 및 A/S 위임계약’을 체결하고 쿠쿠 전주지점에서 ‘내츄럴닥터’로 일했다. 이듬해 1월까지 충남 서천·장항·오식도 일대의 고객 집을 방문했다. 전북 군산 자택에서 매일 오전 7시께는 집을 나섰다. 오전 8시께 사무실에 도착해 방문할 고객에게 연락해 방문시간을 정했다.

오전 9시부터는 고객 집을 돌며 정수기를 설치하고 수리했다. 무거운 정수기를 등에 메고 계단을 오르는 고된 일이었다. 얼음정수기는 무게가 20~30킬로그램에 달했다. 전동드릴 등 공구가 담긴 가방도 항상 휴대했다. 돌아다닌 만큼 ‘수수료’가 들어오기에 많은 고객을 방문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예약일정을 맞추기 위해 점심은 김밥 같은 간편한 식사로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고객의 불만도 고스란히 안을 수밖에 없었다. 컴플레인이 접수되면 문책이나 고객서비스 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일부 고객은 정수기 기사를 상당히 무시했다. 정수기를 고치지 못하면 눈초리가 따가웠다”며 “가정 스트레스를 기사들에게 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할당된 업무를 제시간에 마치지 못하면 저녁 6시 이후나 주말에도 잔업을 해야만 했다. 일요일 하루만 휴무일이라 휴식시간 자체가 부족했다. 휴일에도 고객에게 급한 전화가 오면 수리를 하는 일이 잦았다. 근로계약을 맺지 않아 정해진 연차도 없었다. 개인사정으로 쉴 경우 복귀하면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만 했다고 김씨는 기억한다. 그는 “지인 결혼식이라도 다녀오면 일이 쌓였다”며 “동료가 휴가를 가면 인수인계를 받아 업무를 처리하는 일반 회사와 완전히 달랐다”고 했다. 이런 탓에 장기휴가를 쓴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동료 퇴사에 하루 11시간 근무 ‘몰아치기’

그마저 2017년 2월 동료기사가 건강 악화로 그만두게 되자 ‘집중노동’이 몰아쳤다. 동료가 맡던 군산 전체 지역을 담당하게 되며 업무량이 2배 이상 늘었다. 정수기 설치 건수가 하루 평균 1곳에서 6곳으로 폭증했다. 대개 40분 정도 소요되는 설치시간을 감안하면 업무시간이 4시간 이상 늘어난 셈이다. 방문하는 집도 하루 6군데서 9군데로 증가했다.

수리시간이 약 4시간30분 소요돼 기존보다 1시간을 더 일했다. 2시간30분 정도의 이동시간을 포함하면 하루 10~11시간 일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김씨는 “혼자 광범위한 지역을 맡다 보니 매일 기름을 가득 채워 운전해야 했다”고 말했다. 근무시간 증가는 수수료 총액 인상으로 이어졌다. 담당구역 추가 이후 월평균 수수료가 230여만원에서 350여만원으로 50% 이상 증가했다.

결국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 몸 상태가 나빠진 것을 느낀 김씨는 2017년 5월 말 쉬겠다고 회사에 말했다. 계약을 종료하고 집에서 쉬던 중 6일 만에 쓰러지고 말았다. 같은해 6월6일 지인 부탁으로 오전 9시께 약 30분간 정수기를 무상으로 수리해 준 뒤 집에 돌아왔다가 오른쪽 손발 마비 증상이 느껴졌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즉시 119에 신고해 병원 응급실에 이송된 결과 ‘뇌내출혈’진단을 받았다.

이후 김씨의 삶은 180도 뒤바뀌었다. 경제적 형편 탓에 초기 치료를 놓치는 바람에 3년 넘게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김씨는 “의사가 수술이 힘들다고 해서 심각한 후유증이 남았다”며 고개를 떨궜다. 오히려 연로한 부모님이 김씨를 돌봐야 했다.

국가유공자 수당으로 생활한 고엽제 환자 아버지(78)와 심부전을 앓는 어머니(70)가 쓰러진 아들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빚까지 졌다. 김씨 아버지는 산재 소송 재판부에 낸 탄원서에서 “5년이 지나면서 병원비 감당이 어려웠고 재활치료비가 부족해 제대로 치료해 주지 못하는 제 모습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호소했다.

사고 5년 만에 산재 인정, 법원 “과로 분명”

‘요양급여’가 절실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김씨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적용대상인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요양을 불승인했다. 김씨를 수수료를 받으며 사업소득세를 내 취업규칙을 적용받지 않는 ‘개인사업자’로 판단했다. 회사가 근무시간을 구속하거나 업무 과정을 직접 지휘·감독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갑작스러운 업무환경 변화도 없었다고 봤다. 공단은 김씨가 주 6일 하루 평균 8시간 일했다고 전제한 다음 사고 발생 전 주당 업무시간을 30~50시간으로 추정했다. 지문인식시스템이나 출퇴근명부가 없다는 이유로 법정근로시간에 따른 근무만 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르면 업무와 질병의 관련성이 적어진다. 고용노동부 고시는 ‘뇌심혈관 질병의 업무 관련성 인정기준’을 12주간 60시간 근무와 4주간 64시간 근무로 정하고 있다. 노동부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 결론도 같았다.

행정소송을 제기한 김씨는 사고 5년 만인 지난해 3월 승소가 확정됐다. 법원은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1심은 “고혈압 등 개인적 소인이 있더라도 원고의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가 분명히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공단이 산정한 업무시간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수리기사들은 매일 아침 8시께 출근해 업무 배당을 받았고 토요일을 포함해 하루 10시간 이상 광범위한 지역을 이동해 업무를 수행했다고 진술한다”며 “사고 발생 무렵 실제 근무시간을 공단이 산정한 시간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특히 동료기사 퇴사 이후인 2017년 2월부터 수수료가 51%가 늘어난 점을 근거로 업무량이 폭증했다고 봤다.

‘누적된 과로와 업무상 스트레스’도 업무부담 가중요인으로 인정됐다. 재판부는 “원고에 따르면 과도한 업무로 인한 건강악화로 위임계약을 종료하게 됐다”며 “(법원) 감정의도 계약 종료 후 일주일 정도의 휴식으로 그간의 피로나 스트레스가 해소됐는지를 판단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김씨가 계약 종료 후 6일째 쓰러졌다고 해서 업무가 단절된 상태에서 발병한 것은 아니란 취지다. 항소심 판단도 같았다. 공단의 상고 포기에 사건은 2심 끝에 확정됐다.

▲ 30대에 뇌출혈로 쓰러진 쿠쿠전자 정수기 수리기사 김한볕(44·가명)씨의 아버지가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의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 내용. <수리기사 김씨측 제공>
▲ 30대에 뇌출혈로 쓰러진 쿠쿠전자 정수기 수리기사 김한볕(44·가명)씨의 아버지가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의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 내용. <수리기사 김씨측 제공>

더 큰 의혹 ‘가짜 서명’ 김씨 “산재 은폐”

문제는 ‘계약해지 위조’ 의혹 등 사측의 대응 태도다. 김씨는 건강악화 이후 계약해지 과정에서 사측이 김씨 동의 없이 ‘가짜 서명’을 한 정황을 포착했다. 사측이 사고에 대비해 책임지지 않으려고 가짜로 서명·날인했다고 김씨는 의심하고 있다.

김씨는 “계약해지 당시 회사가 ‘위촉계약해지통보서’ 양식을 주지도 않았고 서명한 사실도 없다”며 “나중에 동료가 대신 서명했다고 들었다”고 주장했다. 실제 2019년 2월 필적감정원은 “위촉계약해지통보서와 보험계약서상 서명을 대조한 결과 자획구성 조형미와 개인 필력 수준 등에서 일치하지 않는다”는 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반면 사측은 재심사 과정에서 김씨가 직접 서명한 통보서를 직원이 받았다고 주장했다.

‘근무시간 은폐’ 의혹도 있다. 김씨 사고 이후 수리기사들이 퇴근을 보고한 네이버 밴드방의 기록을 모두 없애 버리고 탈퇴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김씨측은 재판에서 “지점장이 기사들에게 원고의 실제 업무량보다 축소해 진술할 것을 지시하고, 근무시간과 관련한 자료를 말소했다”고 주장했다. 동료의 진술도 이를 뒷받침한다. 동료 A씨는 김씨측에 “방장(지점장)이 네이버 밴드에 올렸던 기록을 모두 삭제했다”고 털어놨다.

8개월간의 쿠쿠 근무가 ‘후회’로만 남았다. 김씨는 “뇌출혈 이후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후회도 많이 했다”며 “회사의 고의적 사실관계 은폐로 공단에서 산재가 인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동료들에게 날 만나면 안 좋은 지역에 보낼 것이라고 엄포했다”고 분개했다. 그러면서 “쓰러지고 난 직후 지점에서는 ‘산재를 인정해 줄 것 같냐’며 욕설했다”고 전했다. 그는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할 예정이다.

뇌출혈로 쓰러진 쿠쿠전자 정수기 수리기사 김한볕(44·가명)씨의 위촉계약해지통보서의 서명이 본인 동의 없이 가짜로 작성된 정황이 드러났다. 필적감정원 자료. <수리기사 김씨측 제공>
▲ 뇌출혈로 쓰러진 쿠쿠전자 정수기 수리기사 김한볕(44·가명)씨의 위촉계약해지통보서의 서명이 본인 동의 없이 가짜로 작성된 정황이 드러났다. 필적감정원 자료. <수리기사 김씨측 제공>

“정부 근로시간 개편 방안
특수고용직 죽음으로 떠미는 정책”

김씨는 5년9개월째 요양 중이다. 후유증이 심각해 계속 통원 치료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와중에 최근 ‘근로시간 개편방안’ 논란 보도를 보면서 분노가 치밀었다고 한다. 김씨는 “근로시간 개편 방안은 사업주를 위한 것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근로시간을 유연화한다면 대기업이나 정규직노조는 혜택을 받겠지만, 노조가 없는 중소 하청업체 노동자들과 특수고용직은 죽어 나갈 것이 눈에 훤하다”고 지적했다.

사고 이후 자꾸만 졸리고 자신감이 떨어졌다는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5년 넘게 무의미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어요.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직원이 과로로 쓰러지는데 회사와 정부는 ‘나 몰라라’하고 있어요. 병원에 젊은 산재 환자가 있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팠습니다. 나 같은 환자가 더는 생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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