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유니온이 지난 24일 서울 중구 오전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과 간담회를 하기에 앞서 정부 노동시간 개편안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간담회는 비공개로 진행됐다. 청사 주변으로 경찰이 배치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정부가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 발표 후 뒤늦게 여론 수렴에 나섰지만 국민 대다수가 납득할 만한 새 개편안이 나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고용노동부가 ‘의견을 듣겠다’는 대상을 기준 없이 자의적으로 선정하면서 ‘노동자 대표성’ 자격 논란이 반복되는 탓이다. 게다가 이런 의견수렴을 위한 만남도 대부분 일회성에 그친다. 의견청취 과정마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아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만나고 싶은 단체만 만나고, 듣고 싶은 말만 들은 뒤 결국 노동부가 원하는 결론을 끼워 맞출 것이라는 우려가 계속되는 이유다.

노동부, 청년유니온 간담회 하루 전 ‘전체 비공개’ 통보

노동부는 지난 6일 연장근로 시간을 월·분기·반기·월·연 단위 총량제로 관리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을 허물고 주 69시간 장시간 노동을 유발시킨다는 비판에 윤석열 대통령이 나서 민의 수렴과 모든 것을 열어두고 재검토를 약속한 상황이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 일정은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 ‘제대로’ 알리고 현장 의견을 수렴하는 것으로 온통 짜여지고 있다. 지난 21일 20·30대 청년 대다수로 구성된 ‘노동의 미래 포럼’ 발족부터 22일과 24일에는 MZ노조라 불리는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와 청년유니온과의 간담회를 각각 진행했다. IT·제조업체 등 현장을 찾아 노사 이야기도 들었다.

적극적인 의견수렴에 나선 것처럼 보이지만, 형식에 그친다는 의구심은 남아있다. 대부분 간담회는 장관의 인사말만 공개하고 현장의 이야기는 노동부가 정제해 사후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급기야 이정식 장관과 청년유니온 간담회 하루 전인 지난 23일 노동부는 전체 비공개로 간담회를 진행하자고 일방통보 했다. 근로시간 제도 개편에 대한 공방으로 부정적 의견 새어나가는 것을 막는 데 급급한 모양새다.

“입맛 맞는 사람만 만나” 비판

노동자들의 우려와 불만은 쌓이고 있다. 청년유니온은 24일 오전 간담회 직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부의 이런 태도를 강하게 규탄했다. 강지은 청년유니온 기획팀장은 “간담회를 통해 무노조·소규모 사업장, 프리랜서 등 청년 222명의 의견과 함께 청년유니온의 문제의식과 요구안을 전달하려 했지만 간담회 직전에 비공개 통보를 받았다”며 “청년들과 소통하겠다면서 어떤 의견이 수렴되는지, 의견수렴 내용을 노동시간 제도 개편안에 어떻게 반영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게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간담회 당일 기자회견으로 기자들이 모여들자, 경찰 수십 명이 서울노동청 출입문을 막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장관은 정문이 아닌 다른 쪽 출입구를 이용, 끝내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한주 금속노조 언론국장은 “노동부는 윤석열 대통령 입맛에 맞는 청년들만 골라서 만나고 있다”며 “처음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를 띄우다가 정부 정책에 반대 의견을 내니 바로 선회해 다른 청년집단을 물색하는 모습”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윤석열 정부가 ‘법치주의’를 강조하며 양대 노총 때리기만 골몰하면서 이미 예상됐던 문제다. 국민의 삶과 밀접한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을 설계하면서도 노동계를 대변하는 양대 노총을 배제하고, 모두 교수로만 구성한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연구안을 바탕으로 개편안을 완성했다.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가 기존 노조와 차별된 활동을 내걸고 출범하자 노동부는 주요 대화 상대로 낙점했다.

“양대노총 의견 수렴, 한계 있지만
배제하고 노동계 의견수렴 불가”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을 둘러싼 혼란은 노동부가 현장 노동자와 간담회를 진행하지 않았거나 적어서가 아니다. 노동부 스스로가 밝혔듯 지난해 6월23일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에 대한 대략적인 정책방향이 발표한 뒤 “정부는 31차례 현장 방문 및 간담회, 대국민 토론회 등을 통해 다양한 업종의 노·사 의견을 수렴”했다.

문제의 핵심은 노동자를 대표하는 단체와 대화하지 않고, 현장 노동자의 이견을 조정하거나 중재할 의지도 없는 것이다.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한국노총, 민주노총의 조직률을 가지고 노동계를 대표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사실 한계가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조직노동을 배제한 채 노동계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며 “소수 MZ노조 이야기를 몇 번 듣는다고 해서 노동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고 지적했다. 박 선임연구위원은 “자신의 입맛 맞는 전문가 몇 명 끌어들여서 자기들 의견을 전문가 의견으로 포장하고, 이른바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수렴한 듯이 포장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근로시간 제도 개편 부작용
미조직 노동자로 쏠리는데 의견수렴은?
정기훈 기자
정기훈 기자

 

“아직도 병·의원 종사자들은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원무과 직원 등 직종을 가리지 않고 법정 연차 15일을 못 쓰는 경우가 대다수예요.”

청년유니온이 지난 18일부터 닷새간 온라인을 통해 장시간 노동 경험을 묻는 설문에 오맹달씨가 남긴 글이다. 의료업계에 종사자인 오씨는 “원장을 포함한 직원들도 대부분 주 5.5~6일 이상 일하고 일주일에 1~2일은 야간진료를 한다. 업계에서 주 40시간 법정 기준을 지키는 쪽이 드물다”며 “원장은 5명 미만 사업장은 근로기준법 적용 제외라며 직원들의 연차 요구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비정규·소규모·미조직 사업장 노동자는 주 최대 69시간 정책의 부작용이 가장 크게 미칠 수 있는 대상이다. 노동부가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이런 상황을 충분히 살피지 않다는 비판이 크다.

정부는 “필요할 때 일하고 일한 만큼 자유롭게 쉰다”는 문화를 형성하겠다며 근로시간 저축휴가제를 제안했다. 초과근로를 누적해 ‘근로시간 계좌’에 저장하고 노동자가 휴가나 임금으로 보상받도록 한 제도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근로시간 저축계좌 제도가 온전히 시행될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

김근주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공공기관과 대기업 사업장은 근로시간계좌제가 (시행)될 수 있더라도, 중소·영세사업장은 실효성이 없다”며 “연차 휴가도 다 못 쓴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에서 제도 이용에서도 이중구조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노동부는 미조직·소규모 위한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들의 의견을 대변할 창구는 마땅찮아 보인다. 30명 미만 서비스업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박진수(29)씨는 청년유니온에 “공정과 상식보다 그냥 기본적인 것만 지켜지면 좋겠다”고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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