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밥차 ‘밥통’ 연대 참여자들이 19일 낮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앞에서 청소노동자에 전달할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매번 받기만 하다 이렇게 직접 참여할 수 있어서 기뻐요. 제 손으로 조합원들을 먹이는 거나 다름없네요.”

집단해고에 맞서 고용승계를 외치며 농성 중인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 박상설(63)씨가 반찬을 도시락 용기에 담으며 말했다. 장기투쟁 농성장을 찾아 밥차를 펼치고 한 끼로 연대하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밥차, 밥통(밥통)’은 용역업체 변경 과정에서 새해 첫날부터 해고된 LG트윈타워 농성장을 지난달까지 네 차례 방문해 도시락을 전달했다. 박씨는 밥통의 다섯 번째 방문 날인 지난 19일, 함께 농성 중인 청소노동자 유재순(64)씨와 일일 자원봉사자로 배식에 참여했다.

19일 정오께 서울 영등포구 LG트윈타워 앞에 노란색 트럭 한 대가 섰다. 밥차가 열리자 ‘밥알단(배식단을 일컫는 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접이식 식탁을 펼치고 식탁 위 25개 도시락 용기를 일렬로 줄지어 놓았다. 빨간색 앞치마를 두른 밥알단 7명이 용기에 반찬을 하나씩 담기 시작했다. 마포대교 사거리를 오가는 차량의 매캐한 매연 위로 LG트윈타워 앞 거리에는 짭짤하고 달콤한 음식 냄새가 번져 갔다.

이날 밥차 메뉴는 경기도 평촌에 위치한 밥통 부엌에서 미리 준비해 온 쌀밥과 육개장에, 강원도 홍천 주민들이 보내 준 김장김치, 경북 성주군 소성리 어르신들이 내어준 국간장으로 맛을 낸 달걀장조림이었다. 여기에 한광주 밥통 이사가 만들어 온 마늘종 장아찌와 오이깍두기가 더해졌다. 후식으로 세월호 참사 희생자 고 임경빈군 어머니 전인숙씨가 보낸 사과즙이 올랐다.

유재순씨가 칼을 들고 달걀 한 알을 반으로 가르면 박상설씨가 옆에서 도시락 용기에 담았다. 용기에 반찬이 하나둘 채워지는 사이 한편에선 기아자동차 판매대리점에서 일하다 내부고발로 해고된 뒤 8년째 복직투쟁 중인 박미희(61)씨가 이날의 메뉴를 빨간색 입간판에 분필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7년간 전국 곳곳 투쟁현장 찾아
손님이었던 노동자, 이제는 밥알단으로

▲ 도시락을 로비 농성장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보안 직원들이 기자의 출입을 막았다. 밥통 관계자와 농성 중인 청소노동자들이 항의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 도시락을 로비 농성장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보안 직원들이 기자의 출입을 막았다. 밥통 관계자와 농성 중인 청소노동자들이 항의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밥통은 2014년부터 7년 동안 전국 곳곳 장기투쟁을 하는 노동자·여성·장애인·농민을 따라다니며 밥상을 폈다. 쌍용자동차 투쟁현장을 시작으로 KTX 해고승무원 시위, 하이디스 농성장, 삼성전자서비스 노숙농성장, 세월호 추모제 같은 현장에는 노란색 트럭이 늘 함께 있었다. 한광주 밥통 이사는 “밥통 출동 원칙은 투쟁현장에 가는 것”이라며 “밥이 주는 에너지를 승리의 에너지로 바꿔 나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밥통은 대공장 노조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향성을 고민하는 데서 출발했다. 밥을 매개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만나는 연대의 장을 마련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현대·기아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돈을 모아 밥차를 샀다.

밥통 설립 과정부터 참여한 신태섭(54) 이사도 이날 월차를 내고 밥알단으로 농성장을 찾았다. 기아차 화성공장에서 30년째 일해 온 신 이사는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투쟁하는 것 못지않게, 드러나지 않을 뿐 뒤에서 연대와 지원을 통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며 “먹고살기 위해 투쟁하는 만큼 ‘밥은 먹고 싸우자’는 의미와 먹을거리를 통해 연대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밥통의 배식 풍경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100여명이 모인 집회 현장에 찾아가 현장에서 음식을 만들고 배식하던 방식에서 농성장에 미리 만든 음식을 도시락에 담아 전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떠들썩한 잔칫집 분위기는 사라졌지만 밥통은 여전히 연대하는 노동자의 플랫폼이다. 밥통의 한 끼 식사를 대접받았던 노동자가 밥알단으로 참여해 또 다른 투쟁현장의 노동자에게 밥을 먹이는 일들도 잦다.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씨 고공농성 당시 지상에서 철탑에 식사를 올려 보내며 연대했던 박미희씨는 밥통의 ‘단골손님’이었다. 박씨는 이날 손님이 아닌 밥알단으로 참여해 정성스레 이날의 메뉴를 적고 입간판을 꾸몄다.

정규직·비정규직 만나는 연대의 플랫폼
“밥은 인권 … 연대로 스스로 바꿔 나갈 힘 생겨”

 

"맛있게 드시고 힘내세요" 따뜻한 육개장에 따뜻한 말 한마디가 붙어 훈훈했다. <정기훈 기자>">
▲ "맛있게 드시고 힘내세요" 따뜻한 육개장에 따뜻한 말 한마디가 붙어 훈훈했다. <정기훈 기자>

밥알단이 25인분 도시락을 완성하고 청소노동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LG트윈타워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사측의 경비인력이 “기자는 출입할 수 없다”며 앞을 막아섰다. 청소노동자들은 출입을 막는 직원들과 실랑이를 하다 “그럼 여기서 먹자”며 출입문 앞에 하나둘씩 앉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보안직원이 출입문을 열어 줬다.

오후 12시30분께 중식 선전전을 마친 LG트윈타워 해고노동자들은 건물 지하 1층 구내식당에서 도시락을 받고 자리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들은 1월부터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구내식당 이용이 금지됐다. 홍이정(63)씨는 “용역경비가 초코파이를 짓밟았을 때 밥이 인권이란 것을 알게 됐다”며 “사 먹는 도시락과 밥통 도시락은 온기부터 다르다. 정말 눈물 난다”고 말했다.

공공운수노조 LG트윈타워분회(분회장 박소영)에 따르면 지난 1월1일 LG트윈타워에서는 전기와 난방이 끊기고 음식 반입마저 차단됐다. 청소노동자들을 위해 음식을 반입하려는 시민들이 문틈으로 밀어 넣어 준 도시락은 내팽개쳐지며 엎어졌다. 농성자들에게 주려고 던진 초코파이를 경비들이 빼앗는 영상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퍼지며 공분이 일기도 했다. 청소노동자를 위한 구내식당 식권 한 장값을 후원하는 ‘한 끼 연대’에 4천명가량이 참여했고 SNS를 중심으로 LG 제품 불매운동이 퍼졌다.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투쟁이, 도시락이 엎어지며 좌절됐지만 다시 시민들의 연대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박소영 분회장은 희망을 봤다고 전했다. 박 분회장은 “한 끼 연대를 보고 이 싸움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며 “노조활동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노조가 어디에서 힘을 얻는지 알지 못했다. 정부가 사실상 손을 놓고 있지만 연대의 힘을 받아 우리 스스로 세상을 바꿔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은 22일부터 LG트윈타워 앞에서 ‘행복한 고용승계 텐트촌’을 차린다. 농성 100일이 되는 25일에는 100개의 텐트가 입주한다. 건물 앞 비워져 있던 주차장에 차량들이 세워지고 인도에는 없던 화분이 생겨나는 등 텐트촌을 방해하기 위한 움직임이 보인다는 게 분회 설명이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끝장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따뜻한 밥 한 끼로 허기를 달래고 온기를 채운 청소노동자들 싸움이 계속되는 한 밥통의 연대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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