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1만2천582일. 23일 현재 김진숙(60·사진)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해고노동자로 산 세월이다.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서 노조 대의원으로 활동하다 보자기로 얼굴이 덮인 채 대공분실에 끌려간 1986년 이후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김 지도위원은 2003년 한진중공업이 해고자 전원 복직을 발표했을 때도, 2011년 크레인 고공농성으로 정리해고가 철회됐을 때도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다. 용접공으로 보낸 세월보다 조선소 밖에서 노동운동가로 투쟁한 세월이 길다. 정년까지 남은 시간은 8일이다.

김 지도위원은 35년간 복직을 포기한 적이 없다. 지난 6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서 복직투쟁을 할 때도 “제 목표는 정년이 아니라 복직”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정치권도 호응했다. 부산시의회는 김 지도위원 복직 촉구 결의안을 냈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의원들은 여야를 넘어 한진중공업에 결단을 촉구했다.

하지만 한진중공업은 부당해고 기간에 따른 임금 산정이 ‘업무상 배임’에 해당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은 채 버티고 있다. 지난 22일에는 동부건설 컨소시엄이 한진중공업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매각에 속도가 붙을수록 ‘연내 복직’ 가능성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김 지도위원은 지금 암 재발로 수술을 받고 치료 중이다. 그럼에도 김 지도위원은 지난 22일 전화인터뷰에서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왜 복직투쟁을 이어 나가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런 얘기는 하도 많이 해서”라며 웃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35년 전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 노조활동을 이유로 대공분실에 보자기를 덮어쓴 채 끌려갔거든요. 사람이라면 자유의지가 있고, 판단능력이 있고, 자존감이 있는 건데, 그렇게 끌려 나오고 공장에 못 돌아갔어요. 35년을 밖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정년이 며칠 안 남았지만 그 시간 동안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게 제 필생의 업입니다.”

“노동자들이 목소리 내기 시작하자
‘시끄럽다’고 받아들였다”

1981년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한 김 지도위원은 ‘최초 여성 용접공’으로 선각공사부 선대조립과에서 일했다. 김 지도위원은 1986년 23차 정기대의원대회를 다녀온 뒤 노조 집행부의 문제를 폭로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후 대공분실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회사로부터 직업훈련소로 발령을 받았다. 이에 항의하자 1986년 7월14일 ‘상사명령 불복종’으로 해고됐다.

해고 이후 몇차례 복직의 기회가 있었다. 2003년 김주익 지회장과 곽재규 조합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회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사는 정리해고 철회, 임금인상, 해고자 전원 복직을 발표했다. 단 김 지도위원은 제외였다. 한국경총이 반대한다는 이유였다. 2009년 이명박 정부 때에도 기회가 있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김 지도위원의 노조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사측에 복직을 권고했다. 하지만 한진중공업은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8년까지 단협에 ‘해고자 관련해서 추후 논의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었지만 이마저도 2012년 복수노조가 생기고 교섭대표노조가 바뀌면서 사라졌다.

김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에 돌아가지 못한 마지막 해고자다. 그도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단다. “왜 이렇게 나만 안 된다고 그러는지 아직도 저도 너무 궁금해요. 얘기를 좀 해봤으면 좋겠는데 아예 (사측하고) 대화조차도 안 되고 있으니까. 그런 일들이 갑갑하죠.”

처음부터 자본가들이 꺼릴 정도로 위험인물은 아니었다. 기질도 참는 쪽에 가까웠던 듯싶다. 김 지도위원은 고향 강화도에서 가장 먼 곳을 찾아 열여덟에 부산으로 갔다. 대우실업에서 ‘시다’로 일하다 해운대 백사장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기도 하고 신문·우유배달도 했다. 김해 122번 시내버스 안내양으로 일할 땐 수금액이 적다며 알몸으로 검신을 당하기도 했다. 여러 곳을 전전하던 김 지도위원은 월급을 많이 주는 곳을 찾아 조선소에 닿게 됐다.

“그때는 가릴 만한 형편이 아니었고 제일 중요했던 건 월급을 많이 준다는 거였어요. 대체로 여성노동자들이 하는 일을 했는데 노동시간은 길지만 임금은 지나치게 작았어요. 자취방 월세로 3만원을 내야 하는데 그 돈을 허덕거리면서 내야 될 정도였어요.”

‘아저씨’들만 있었던 조선소 노동환경은 녹록지 않았다. 성희롱이 비일비재했다. 20대 초반의 김 지도위원은 그런 말들을 듣고 싶지 않아 당배꽁초를 주워서 필터를 빼고 귀에 넣어 귀를 틀어막았다. 월급도 잔업을 해야 ‘많이’ 받을 수 있는 구조였다.

무엇보다 조선소는 수십 명의 노동자가 매년 골반압착·두부협착·추락 등으로 죽어 나가는 공장이었다.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본인 부주의’로 종결되기 일쑤였다. 회사에는 제대로 된 식당도 없었다. 여름이면 쉬고 겨울이면 살얼음이 덮인 도시락을 먹었다. 새까만 꽁보리밥을 냄새 나는 공업용수에 말아서 후루룩 삼켜야 했다.

김 지도위원은 바꾸고 싶었다고 한다. 1986년 2월 노조 대의원에 출마했다. “우리는 개밥을 먹을 수 없다”며 도시락 거부운동을 했다. 사흘 만에 게시판에 사장 명의로 연말까지 식당을 지어 주겠다는 대자보가 붙었다. 일하다 다친 조합원에게 돌아가야 할 위로금을 횡령한 노조 비리도 폭로했다. 회사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김 지도위원은 ‘위험인물’로 찍혔다.

“그동안 해 왔던 방식대로 조용하게 안정을 추구하면서 가야 하는데 저는 그 안정에 파열구를 냈던 거죠. 한마디로 왜 시끄럽게 하냐는 거예요. 그런데 만 명이 넘게 모인 집단이 조용한 건 오히려 이상하잖아요. 최대한 시끄러워야 하고 그런 시끄러운 과정들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목소리들이 나오는 거잖아요. 그간 힘으로 억눌려 왔던 노동자들이 작게나마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그걸 회사는 시끄럽게 받아들였던 거예요.”

“노동자들 극단으로 몰리는 현실 안타까워”

‘시끄러운’ 삶을 살아온 김 지도위원은 2011년 정리해고 사태 해결을 위해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309일간 고공농성이 이어졌고 전국에서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달렸다. 5차례 3만5천여명을 실어 나른 희망버스는 정치권을 움직였고, 조남호 한진중공업 당시 회장을 국회로 불러냈다.

김 지도위원이 복직투쟁을 시작하고 9년 전 희망버스처럼 각계각층에서 복직 촉구에 한목소리를 내며 연대하고 있다. 이를 보며 김 지도위원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한다.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은 청와대 앞에서 1천배를 하고, 정홍형 금속노조 부양지부 수석부지부장은 단식농성 중이다. 김 지도위원은 “더할나위 없이 고맙지만 다들 건강하게 싸웠으면 좋겠는데 그게 마음이 아프다”며 “노동자들이 극단으로 몰리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 아쉬움을 표했다. “4년이 지나서 정권 말기로 가고 있는데 대통령이 출마하면서 했던 공약들이 이행되지 않는 현실이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단식을 하고 오체투지를 하고,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했던 일들을 되풀이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특히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해 유가족들이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하고 계시잖아요. 노동자들이 계속 죽어 나가고 있으니까 제일 시급한 문제 같아요. 또 비정규직 문제도 인천공항을 문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만 해도 금방 뭔가 이뤄질 줄 알았는데 자회사를 통한 방식은 기만이죠. 비정규 노동자들을 우롱하는 기만책이라고 생각합니다.”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박창수·김주익·곽재규·최강서
일했던 공장 먼저 가고 싶다”

가시밭길만 걸어온 그에게 이제는 조금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지나간 삶이 후회된 적은 없는지 조심스레 묻자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암이 발병하고 나서 제가 너무 몸한테 가혹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다시 돌아간다고 다르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웃음) 저는 정말 겁도 많고 주눅이 든 채 살아온 사람이었어요. 어려서 공장생활을 할 때 조장이나 반장들한테 맞아가면서 늘 울었거든요. 그런데 노동운동을 하고 나서부터는 그런 이유들로 더 이상 울지 않습니다. 단순히 수치상으로 성과가 나타나지는 않아도 자신감 있게, 당당하게 변화되는 과정을 봐왔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

김 지도위원은 복직하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바로 한진중공업에서 노조를 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를 만나는 일이다. “제가 해고된 이후에 박창수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이 목숨을 잃었고, 김주익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도 ‘85호 크레인’에서 목숨을 잃고, 곽재규형도, 최강서도 목숨을 잃었던 공장이라 그 사람들이 일했던 공장들을 제일 먼저 가보고 싶어요. 동일방직을 비롯해 아직 해고된 상태로 남아 있는 노동자들이 많잖아요. 제가 복직하는 게 단순히 저 혼자만의 복직이 아니라 그렇게 억울하게 해고됐던, 그리고 아직도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함께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박창수 위원장도 해고된 채로 있는 거고, 김주익 지회장도 사전구속영장이 떨어진 상태였고, 최강서도 휴업상태에서 목숨을 끊었어요. 제 복직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돌아간다는 것이고, 당시 상처를 입은 우리 조합원들한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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