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직장인 김아무개(32)씨는 지난달 카드회사로부터 황당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신용카드 한도가 ‘0원’이 됐다는 것이었다. 30만원을 연체한 것이 문제가 됐다. 김씨는 그동안 월급(150만원)을 감안해 한도를 40만원으로 낮춰 썼는데 이마저도 포기해야 했다. 카드연체 기록이 다른 카드사에 전해지면서, 그가 가진 다른 한 장의 신용카드도 금세 무용지물이 됐다.

#2.직장인 박아무개(34)씨는 얼마 전 월급통장을 바꾸면서 신용카드 발급을 권유받았다. 기왕이면 신용카드도 함께 신청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신청서를 접수했다. 하지만 은행 직원은 며칠 뒤 “지난해 카드연체기록이 있어 신규발급이 안 된다”고 통보했다.

꽁꽁 얼어붙은 카드 신규발급

카드대란의 학습효과로 카드사들은 지난해부터 과도한 마케팅을 자제하고, 신규가입 자격기준을 강화하는 등 리스크 관리를 엄격히 하고 있다. 기존 고객의 신용한도를 축소한 데 이어 이자율도 올렸다. 카드사들은 고객 신용도를 예의주시하고 있고, 신규가입은 한층 까다로워졌다. 고객의 과거까지 들춰내며 카드발급을 꺼리고 있다. 카드를 쓰며 생기는 혜택도 덩달아 줄었다. 신한카드는 오는 7월1일부터 직전 3개월 이용 금액이 월 10만원 이상이던 카드 할인서비스 조건을 전월 20만원 이상으로 올린다.

현대·하나·삼성카드 등도 지난해까지 ‘직전 3개월 30만원 이상 사용’ 조건을 매월 30만원 이상 써야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할인혜택도 대폭 축소했다. 우리카드는 7월1일부터 모아 포인트 적립 국내가맹점 이용액을 0.2∼0.1% 축소할 계획이다. 반면 매달 30만원 이상 사용한 고객에게 면제해 주던 현금서비스 수수료를 부활했다.

KB카드는 5월15일부터 신용카드 포인트 적립률을 0.2%에서 0.1%로, 체크카드는 0.5%에서 0.2%로 각각 낮추겠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1월 현금서비스 수수료율을 9~26.95%에서 7.9∼27.4%로 확대했다. 현대카드는 ‘SK오일백 현대카드’의 연회비를 5천원에서 1만5천원으로 3배 인상했다. 현대 H·M·V 등 대표 카드의 신규 연회비도 5천원 인상됐다. 카드사들은 자산으로 연결되는 가입자수는 물론 각종 혜택까지 줄이고 있다. 소비자 감소를 감수하더라도 연체율과 채무불이행의 위험을 피하겠다는 것이다. 카드업계가 현재 느끼는 위기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6년만에 처음 오른 연체율

카드업은 이른바 ‘경기후행적’ 업종으로 경기침체가 당장 회사 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업계 관계자는 “경기침체의 영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6개월 정도의 기간을 두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금융위기가 본격화한 지난해 4분기에도 겉으로 드러난 카드사의 경영실적은 나쁘지 않았다.

금융감독원이 지난달 2일 발표한 ‘2008년 신용카드사 경영실적’에 따르면 지난해 신한카드 등 5개 카드사는 모두 흑자를 기록했다. 신한카드 9천406억원, 삼성카드 2천577억원, 현대카드 1천969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지난해 전업카드사의 연체율은 3.43%로 2007년 말(3.79%)보다 오히려 0.36%포인트 감소했다. 이런 까닭에 금융당국은 제2의 카드대란 가능성을 ‘기우’라고 반박했다. 김영기 금융감독원 여신전문총괄팀 팀장은 “과거 카드사태의 학습효과 때문에 리스크관리를 강화해 큰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카드업계 관계자도 “경제지표 자체가 안 좋고 위기상황이 발생하니까 연체율이 다소 올라가는 것”며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당시 저소득층에게 소득 수준에 비해 높은 수준의 한도를 줬고, 이들이 이른바 ‘돌려막기’를 하면서 부실이 커졌기 때문에 2003년과 지금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위기가 본격화한 지난해 9월말 이후 하락세를 보이던 연체율이 상승세로 돌아섰다.<표1 참조>


연체율이 오른 것은 2003년 이후 처음이다. 카드 사용액도 줄었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9월까지 평균 21.05%를 기록하던 카드 사용액 증가율은 같은해 11월부터 증가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장도중 한국신용평가정보노조 위원장은 “카드사 연체율이 올라가고 있는 상황에서 인적 구조조정으로 실업이 증가하면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연히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과 같은 카드대란 수준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위기는 충분히 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정부는 지난달 12일 6조원의 추가경정예산을 반영한 민생안정 긴급지원대책을 발표했다. 금융 소외계층인 저신용자 대출상품을 확대해 서민금융을 활성화하겠다고 밝혔다. 신용취약계층은 신용등급 7~10등급으로 금감원 추산 816만명에 달한다. 2007년 말에 비해 50만명이 증가했다. 7등급이면 은행에서 대출이 가능하고, 그 이하면 고금리를 감수하고 상호저축은행이나 캐피털회사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현재 신용취약계층을 위한 대출상품을 취급하는 은행은 우리은행 등 5곳이다. 10곳은 상품판매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2천억원 한도에서 서민대출을 취급하고 있는 한 시중은행은 지난달 20일 현재 8억7천만원의 실적을 올리는 데 그쳤다. 연체나 부실 가능성이 높은 이들에게 대출하는 것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된 ‘카드 위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 신용취약계층을 위한 금융 지원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시장에서는 돈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나 자산 등을 따져 신용취약계층을 걸러낸다”며 “공적기구가 대출을 해 주는 방식으로 맞춤형 서민금융을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와 신용부도스와프(CDS) 부실은 금융위기의 도화선이었다. 여기에 민생경제에 큰 파괴력을 줄 신용카드 부실이 미국에서 이미 가시화하고 있다. 미국에서 발행된 신용카드는 지난해 말 기준 6억9천440만장이다.
금융전문가들은 서브프라임사태를 뛰어넘는 금융경색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크레디트카드가 다음번 신용경색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 최대 신용카드회사인 아메리칸익스프레스는 지난달 16일 대출 디폴트(채무상환 불능) 비율을 나타내는 대손상각률이 한 달 전(8.3%)보다 0.4%포인트 오른 8.7%를 기록했다.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미국의 다른 카드회사인 아멕스가 발표한 ‘30일 이상 카드대금을 연체한 비율’도 2월 5.1%에서 3월 5.3%로 증가했다. 씨티그룹의 지난달 카드부도율은 전달 6.95%에서 9.33%로 급증했다. 금융위기와 실물경기 침체로 대량실업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어 신용카드 연체율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올해 미국의 실업률이 10%에 육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카드사 걱정하다 민생경제

카드업계는 구조조정과 실업률 증가에 민감하다. 실업자 증가는 카드사 입장에서는 ‘고객감소’이며 부실채권의 증가로 이어진다. 신한카드노조 관계자는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노동자중 현금서비스를 받지 않으면 생활이 안 되는 노동자를 20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드사들은 신용도 조사를 철처히 하는 등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에 따라 경기위축에 대응하기 위한 카드사들의 선제적 대응이 오히려 경기위축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노동계 관계자는 “카드회사 수익의 절반이 현금서비스와 카드론 이자”라고 꼬집었다. 김영기 금감원 여신전문총괄팀 팀장은 “카드사 부실과 소비위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며 “지나친 리스크관리로 문제가 안 생길 계층까지 문제가 생기는 일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9년 3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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