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한참 뜨거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인1표 방식의 비례대표제가 위헌이라고 민주노동당이 헌법제판소에 위헌소송을 냈던 일 말이다. 1년이 지난 2001년 여름에 결국 위헌 판결이 났고 그래서 그 다음 전국단위 선거인 2002 지방선거부터 ‘1인2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시행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그 사건이 바로 지금의 민주노동당을 만든 직접적인 발판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가장 큰 공은 당원들의 눈물과 땀방울에 있었지만. 지방선거에서의 정당득표와 지지율이 그해 말미에 대통령선거에서 권영길 후보를 TV토론회에 진입할 수 있게 만들었고, TV토론회가 처음 있었던 대통령 선거야말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제대로 된 민주노동당의 데뷔전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총선이 끝난 뒤 당이 거둔 성과 역시 그 당시부터 한걸음씩 잰걸음을 걸어온 연장이었을 것이다.

"한판 붙어보자"

▲ 송무근 경북도당 사무처장은 2001년 영남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뒤 2002년 민주노동당 경북도협의회 간사를 시작으로 당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나이 30살, 전국의 사무처장 가운데 ‘막내’다. 대구와 더불어 보수의 아성이라 불리는 ‘경북’에서 독립운동 하듯 한뼘 한뼘 진보정치 지평을 넓히고 있는 그가 5회에 걸쳐 ‘목전의 사업’과 앞으로의 꿈을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털어놓는다.
아무튼 2002년 양대 선거를 뒤로 하고 짧은 준비기간 끝에 다시 총선이 찾아 왔다. 후보 논의를 하고 선거준비를 하는 과정에 우린 상당히 고무돼 있었다. 당 전체적으로 봤을 때 후보를 21명밖에 내지 못했던 16대 총선과는 달리 243개 지역구에 123명의 후보를 출전시켰고, 당원도 5만을 훌쩍 넘었으니 말이다. 경북에서도 15개 지역구 중 6명의 후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것은 331명으로 출발했던 경북의 당원수가 2,400명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주노총의 결합은 물론 전국농민회 총연맹 역시 역사적 결단을 통해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 방침을 결정하며 당에 결합했던 과정도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당시 민주노동당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었다. 불법 대선자금! 언론에선 연일 기득권 정당들의 불법 정치자금 모금 사건을 다루었고, 한술 더 떠 노무현 대통령은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10도 안 된다고 주장하며 대통령직을 거는 등의 코미디를 하기도 했다. 결국 1/10이 넘었었음을 다들 잘 알고 계시리라. 좋은 분위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썩은 정치에 신물이 나는 국민들에게 민주노동당은 신선한 자극이었고 새로운 기대였을 테니 말이다.

비례대표 후보라도 내자

그러나 어찌 이런 호조건 속에 복병이 없었으랴! 경북지역에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선거법, 정당법 등 정치관계법이 개정되면서 -2004년 3월12일, 지구당이 폐지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 선거법 또한 강화가 되어 사실상 후보가 아니면 선거운동을 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워졌고 후보가 없는 지역은 그야말로 사각지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23개 시· 군 15개 선거구에 후보를 6명밖에 내지 못했던 경북도당으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더구나 6개 지역 중에 5개 지역이 단일 선거구였으니 자칫 잘못하면 적어도 15개 이상의 시·군이 민주노동당을 한번도 접하지 못한 채 선거를 치르게 되는 상황이었다.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 결과 비례대표 후보를 내는 것으로 논의가 모아졌다. 후보가 없이는 최소한의 당 홍보를 위한 선거운동도 할 수 없으니 경북 각지의 시·군 경계를 넘나들며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비례대표 후보를 내는 것이었다. 결국 김병일 도당 위원장님이 지역구 출마를 포기하고 비례대표 후보로 등록하였고, 다시 대선 때처럼 정처 없는(?) 유랑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번엔 두 명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당 위원장님께는 조금 죄송한 일이었다. 특히 미조직지역에 선거운동을 위해 비례대표 후보를 강력하게 추천했던 나로서는. 비례대표 후보 순위 결정을 위해 전국으로 유세를 다닐 때 위원장님을 수행하며 당내 쟁쟁한 스타급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위축되었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243곳 중 123곳 밖에 후보를 내지 못했던, 그리고 정당득표에 사활을 걸어야 했던 당시 민주노동당의 상황에 비춰보면 조금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튼 소형 앰프도 하나 구입하고 위원장님 차도 선거차량으로 꾸며서 선거운동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는 곳마다 선관위와 시비가 붙는 것이었다. 휴대용 앰프도 불법이고 차량도 불법이라는 것이다.

한번은 고령에서 시장과 상가를 순회하고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니 웬 사람들이 차를 뺑 둘러싸고 있었다. 흡사 멀리서 보니 언론에서 취재를 나온 것 같기도 했다. 디카가 2대 무비카메라가 1대,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까이 가보니 선관위 직원 서너명과 부정선거 감시단들이었다. 차에 당을 홍보하기 위해 붙여놓은 스티커, 시트지 작업을 한 구호 등등이 다 불법이라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우리는 태연하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이거 도당차에요.’ 옥신각신 한참을 싸운 끝에 도당차라도 안 된다는 선관위직원들에게 겨우 판정승을 거두고 화해까지 하고 웃으며 해어지려는 찰나 신분확인을 위해 후보의 주민등록증을 잠깐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난 상태여서 별 의심 없이 주민등록증을 보여줬는데 이야기 중에 보니 그중 한 사람이 고지도 없이, 그리고 신분확인만 하면 되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해놓고는 몰래 과태료 스티커를 끊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상상에 맡기겠다. 다시 한번 혈전이 벌어졌고 이번에는 '확인사살'까지 확실히 마치고 유유히 고령을 빠져나왔다. 총선 당시 서울 강북구위원회의 ‘길수차’가 굉장히 유명했는데 선거법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만든 우리 차도 한번 보여주고 싶다.

경북을 순회하는 일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다. 후보와 나 둘밖에 없으니 더 힘들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반갑고 재미있는 일도 많았으니 힘들어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피로회복제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중 가장 재미있는 일은 바로 우리가 장똘뱅이가 되어간다는 생각이었을 것 같다. 대선 당시 경북 각지를 다녀보니 장날이 아니면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던 기억에 후보 동선을 각 시·군에 장이 서는 날로 맞추었더니, 장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다 처음 보지만 파는 사람은 계속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고령장날 만난 생선장수를 성주장에서 또 보고, 옷장사도 과일장사도 마찬가지. 상인들도 장날에 맞춰 이동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몇번 마주치게 되니 나중에는 여기서 거리연설 하라며 자기 자리를 비켜주기도 하고, 영천장날에는 후보명함을 한 움큼 들고 가 명함을 뿌려주던 아주머니도 있었다. 조마조마했다. 부정선거감시단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후보가 아니면 명함을 줄 수 없는 것을 아주머니에게 설명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골라 골라 아무거나 골라~’ 하는 톤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아주는 상인도 있었다.

이런 선거는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찍은 후보는 단 한번도 당선된 적이 없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참으로 외로운 선거만 치러 왔는데, 2004년 총선은 정말 뭐가 되어도 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총선이 끝나고 난 뒤

비례대표의석 8석, 지역구 2석, 과연 누가 상상이나 했었을까 이런 결과를…. 총선이 끝나고 난 뒤 달라진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첫번째는 도당의 애마가 바뀌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낯선 사람에게서 걸려오는 전화가 굉장히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다. 내가 어느 지역에 뭐뭐하는 사람인데 하며 자기자랑을 한참 늘어놓다가 결론은 민주노동당의 공천을 받고 싶다는 것. 당원에 의한 선출, 당원이 가지는 당권 등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친절히 설명을 해준다. 간혹 민주노동당에 당원으로 가입하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오기도 하고…. 이제 정말로 명실공히 제3당이 된 것이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생각에 새로운 힘이 솟았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지금까지 구호만 외칠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면 이제 현실로 만들어갈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민주노동당에 부여한 노동자, 농민, 서민들의 작은 힘들을 이제 희망으로 만들어 그들에게 다시 돌려줄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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