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지나가는 시민 중 아무나 붙잡고 2002년에 가장 기억나는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모르긴 몰라도 95%이상이 아마 2002 월드컵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그랬다. 그해는 온 국민이 ‘오~필승 코리아’를 외쳤고, 온 국토가 붉은 티셔츠로 물들여졌던 역사적인 해이다. 무수히 많은 감독들이 경질되어가며 또 수비수 문제, 골 결정력 문제 등 많은 고질적인 문제가 한국축구에 잔존했음에도 월드컵 역사상 길이 남을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쓰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 송무근 경북도당 사무처장은 2001년 영남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뒤 2002년 민주노동당 경북도협의회 간사를 시작으로 당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나이 30살, 전국의 사무처장 가운데 ‘막내’다. 대구와 더불어 보수의 아성이라 불리는 ‘경북’에서 독립운동 하듯 한뼘 한뼘 진보정치 지평을 넓히고 있는 그가 5회에 걸쳐 ‘목전의 사업’과 앞으로의 꿈을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털어놓는다.
참 5% 중 일부는 효순이 미선이를 기억하는 고마우신(?) 시민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그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다른 역사를 써나가고 있었다. 바로 ‘제3회 동시지방선거’. 물론 그 때까지 도지부도 만들지 못한 도협의회 상태였고, 여전히 우리의 정책을 알리는 것보다 민주노동당이 무엇인지, 후보는 뭐하는 사람인지를 한참 동안 설명해야 하는 그런 선거였다. 차라리 선거라기보다는 선거하는데 가서 집회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도지사후보도 만들지 못한 상황에서 경북지역 내 4개 지구당이 3개 지역에서 20여 명 정도로 선거를 치렀다. 3월말 경상북도 선거대책위원회를 꾸리긴 했지만 선거에 돌입하면서 경북선대위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하는 것을 느끼는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공동선대위는 절실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기보다는 명분에 의한 단순한 합의 속에서 건설되었던 것이었으므로.

망망대해에 떠 있는 쪽배 신세

결국 경북선대위는 유명무실해지고 나는 비례대표후보가 있는 구미로 올라갔다. 도단위 선거운동이 전무한 상황에서 비례대표후보를 통한 당 선거운동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매형에게 차를 빌려(나중에 도지부의 ‘애마’를 설명할 때 이야기 하겠지만 이 차는 대선이 끝나고야 돌려줬다) 구미로 올라가 비례대표후보와 함께 경북지역을 대상으로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쪽배에 오른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후보와 함께 경북 각지의 노동조합, 농민회 등등 많이도 쫒아 다니던 기억이 난다. 두서없이 이리저리 연락되는 곳을 다녔던 것이, 바로 이것이 비례대표 선거운동의 전부였다.

끝내 6·13 지방선거는 국민들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역대 지방선거 사상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하며 ‘한나라당 압승, 민주당의 완패, 민주노동당의 부상’으로 끝이 났다. 선거가 전반적으로 승리 분위기로 전 당원이 감격적인 기쁨을 맛볼 때 정말 기쁘면서도 가슴 한구석에는 왠지 모를 허전함이 있었다.

16개 시·도 중 9개 지역에서 비례대표를 당선시키고, 정당득표 8.13%를 얻었지만, 경북은 비례대표도 당선시키지 못하고 정당득표도 꼴지에서 2등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경북에선 이 정도도 잘한 거야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전국의 당원 동지들께 평균 까먹어서 죄송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선거가 끝나고 나서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당원이 두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경북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웅크리고 있을 수 없었다. 당원이 곧 천명을 돌파한다는 사실 또한 엄청난 기폭제가 되었다. 지방선거가 끝나고 그 여세를 몰아 드디어 도지부를 창당한 것이다.

도지부의 창당과 그해 겨울의 대선

그리고 또 선거였다. 2002년 17대 대통령선거.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었다. 선대위에는 민주노총 경북본부와 전농 경북도연맹도 결합하여 공동선대위를 꾸렸다. 아직 지구당이 4개밖에 없던 터라 미창당지역에 선거운동을 위해 경북유세단도 꾸리기로 했다. 모든 것이 지방선거와는 격이 다르게 진행되는 듯하더니 역시 이번에도 복병이 있었다. 유세단을 꾸리기로 하고 각 지구당에서 1명씩, 대학생 몇명, 각 부문별 1명씩 10여명을 모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모인 것은 4명. 결국 도지부장님과 나, 민주노총 경북본부 사무처장 그리고 지부장님의 친형님. 이렇게 4명이서 유세팀이 꾸려졌다.

선거운동은 처절했다. 우선은 강원도와 접도하고 있는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눈과 맹추위와 싸워야 했다. 그 결과 청송장날에는 모두 솜바지를 한벌씩 구입했고, 영양장날에는 귀까지 덮는 모자(일명 만주 개장수 모자 - 실제 만주의 개장수가 그 모자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를 구입했다.

하루는 영양에서 울진으로 가기 위해 산을 넘는데 엄청난 눈이 내렸다. 산길에서 힘없이 차바퀴가 미끄러지는 상황,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짜릿함’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핸들을 붙잡고 눈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옆에 계시던 지부장님이 한 말씀 하셨다. “이 늦은 밤 눈 덮인 산을 넘는 우리를 역사가 기억해 주겠나?” 그 말을 듣고 그렇지 않아도 운전하기 힘든데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서 한참을 애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도시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농촌지역의 풍경 하나. 바로 해가 떨어지면 길거리에서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장날이 아니고는 사람들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당연히 처음에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길에 사람 한명도 없는데 방송은 틀어도 되는지 등등. 그렇게 종횡무진 경북 각지를 누비며 또 한 가지 눈물겨웠던 것은 바로 연락소들의 활동이다.

연락소라고 해 봐야 한 지역에 당원 1명의 활동이 전부였다. 안동, 문경, 상주, 의성, 예천, 고령 등 당원 한사람이 트럭에 유세차 세트를 얹어 한손엔 운전대, 한손엔 마이크를 쥐고 다니던 모습은 정말 평생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17대 대선 때엔 많은 에피소드도 있었다. 안동에서 선거운동을 할 때였다. 마침 그날은 후보 부인 강지연 여사가 방문하기로 한 날이어서 새벽부터 안동 구시장에서 유세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내 앞에 체어맨이 한 대 서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부드럽게 창문이 내려간 뒤 차 안에서 웬 젊은 아주머니가 만원짜리를 한장 손에 쥐고 팔랑팔랑 흔들며 이렇게 외쳤다. ‘아저씨 이거 후원할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돼요?’ 권 후보님의 TV토론회 덕택에 길거리에서 지지자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벅찬 가슴을 어루만지며 환한 미소로 대답하려는 순간, ‘어! 2번 아니네…’, 그리고는 그냥 가버렸다.

또 한번은 성주에서. 차종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역시 검은색 대형승용차였다. 웬 중년의 아저씨 한분이 창문을 내리면서 이렇게 외쳤다.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이 당선되면 자신은 부유세 내야 되는 대상이지만 그래도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고. 그러면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는 가셨다. 부유세가 신설되더라도 정말 대상에서 제외시켜주고 싶은 아저씨였다.

아쉬움, 그러나 희망은 있었다

그렇게 대선도 지나갔다. 전체 95만7천여표, 3.9% 득표. 경북에선 62,522표를 얻어 4.35%를 기록했다. 꼴지가 아니어서 너무너무 다행이었다. 지방선거 끝나고 사무처장단 회의에선 미안한 마음이 많았는데 대선에선 전국 평균을 훌쩍 뛰어 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국의 당원들을 비롯해 1천여명의 경북 당원과 각 지구당, 연락소의 땀과 눈물이 배인 것에 비하면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진보진영의 숙원이었던 100만표 획득도 못했고 아쉬움이 많은 선거이긴 했지만 대통령선거의 성과 또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우선 이제는 그 누구도 민주노동당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선거운동 할 때 내용을 알리기보다 당 이름을 설명해야 했던 참담함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주요한 정책이 국민들로부터 실질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대선이 끝나고 어느 기관의 여론조사에서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의 정책에 대한 지지도가 23%나 되는 것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2004년 총선에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어 투표를 한다면 어느 당에 투표하겠느냐는 질문에 11.8%가 민주노동당을 선택하겠다는 답을 한 것 또한 우리가 일궈낸 성과를 말해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는 끝이 났다. 그러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험난하고 멀다는 사실은 누구도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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