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원고 청탁을 받고 제때 원고를 넘긴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원래 꼼꼼한 성격이 못되고 두서없이 일하게 되는 유형이어서 그런 모양이다. <매일노동뉴스>로부터 글을 부탁받고, 더욱이 기일을 받듯이 엄수해야 한다는 몇번의 당부를 들으면서 ‘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몇 번이나 했었지만 결국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두 가지 정도였다.

어쨌거나 경북에 민주노동당 깃발이 섰다

첫번째는 비록 어설프고 서툰 작업을 하는 듯한 도당 당직 생활이었을지라도 한번쯤 되돌아보며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반성도 될 것이요, 변화와 발전을 위한 계기가 될 수 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두번째는 처음 도당 사무처장이 되었을 때 나이 27세. 지금까지 4년여 일 해오면서 민주노동당의 사무처장 중에 처음에도 막내였고 지금도 막내이다. 그런데 지금은 막내이면서도 최장수다. 만약 누군가 지금의 민주노동당이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과정을 그려내야 한다면 그나마 조금 할 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졸필이라 걱정이다. 

사실 진보정당운동과의 인연은 민주노동당이 처음은 아니었다. 처음 대구에서 진보정치연합과 인연을 맺고 1996년 총선에 함께 한 것을 시작으로 1997년 대선 등을 거쳐 왔으니 말이다. 특히 1996년 총선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선거운동에 결합해서 가라는 곳으로 가니 그곳에서의 임무는 후보 수행이었다. 후보는 김기수 전 대구시당 위원장님. 동네 아줌마들이 가수 남진 닮았다며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표는 안 주고 좋아만 했다. 때론 명함을 건낼 때(당시엔 운동원도 명함을 줄 수 있었음) ‘본인인교?’ 하는 얘기도 듣고 해서 힘이 빠지기도 했다.

“아무말이나 하며 후보를 따라다녔다”

어쨌든 하루 수행을 하고 선거운동본부에 들어오니 김기수 후보가 내게 민중가요 책을 건네며 목소리 좀 들어보게 노래를 한번 불러보라는 것이 아닌가. 까마득한 선배이시자 후보께서 내린 명령(?)이라 영문도 모른 체 노래를 불렀다. 김민기의 ‘기지촌’. 사실 그 노래가 왜 눈에 먼저 들어왔는지도 잘 모르겠다. 한 소절 정도 불러 가는데 ‘됐어. 내일부터 네가 해!’라고 말씀하셨고 난 뭘 하라는 것인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다음날 내겐 핸드마이크가 들려지고 아무 말이나 하면서 후보를 따라다니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렇게 거리연설을 하면서 선거운동을 했던 기억, 선거운동 마지막날 대구 서구에 서부시장 막창집들을 돌다가 12시 정각에 어깨띠를 벗으며 정말 사람의 눈물이 이렇게 뜨거울 수도 있구나 하며 눈물 흘리던 기억…. 물론 진보정치연합이 당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진보정당운동과의 첫 인연이었다.

아무튼 1999년 당이 처음 출범할 당시 영남대학교에 전국에서 최초로 당 학생위원회를 만들었었고 또 그 조직으로 총학생회까지 역임했으니 남들이 잘 알아주지 않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큰 영광이자 자부심이기도 하다.

총학생회장 임기가 끝나갈 2001년 10월 즈음 한 선배님이 날 찾아왔었다. 민주노동당이 초기 소지부 형태로 있을 때 경산시지부 대표를 하시던 서상학 선배님이었다. 반갑게 소주 한잔 하고 그런 자리가 서너번 더 있을 무렵 졸업하고 당일을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하셨다.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나서도 활동가로 남을 결심을 하고 있던 터라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당시 나를 크게 갈등하게 했던 것은 바로 그곳이 경북이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번도 대구권을 벗어나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었고, 대구의 동지들과 선배님들에겐 참으로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마음을 결정할 때 복잡하던 실타래를 이렇게 정리했다. “그래, 그나마 대구는 경북보다 낫다. 누군가 가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면(이 말을 은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헤딩’ 혹은 ‘꼴아 박다’) 내가 가자.”


면벽 수련과 평정심

경북도협의회. 준비위원회도 아니고 추진위원회도 아닌 이름에서 보이듯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엔 당의 체계와 정체성에 대해 모두가 서툴렀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우린 논의 끝에 2002년 3월 민주노동당 경북도지부(도당)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 조직으로 경북도협의회를 만들었다. 물론 당시에도 가장 큰 동력은 민주노총이었었다. 각 지역의 대표들이 전부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이었으니 말이다.

경산시지부 사무실에 도협의회 사무실을 두기로 하고 책상 하나 빌려 상근을 하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한 상태가 당분간 지속되었었고 경산시지부 사무국장님이 오후에 출근해서 반상근을 했으므로 오전은 당연히 혼자. 멍한 상태는 ‘면벽수련’을 통해 평정심을 찾았으나 무었을 할 것인가는 막막할 따름. 중앙당에 연락해 331명 당원 명부만 내려받았을 뿐 여전히 막막한 상태였다. 물론 월급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혼자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또 뭔가 하긴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과 싸우고, 외로움과 싸우고, 생활고와 싸우고. 그야말로 민주노동당의 초기, 나뿐만 아닌 전국의 상근자들의 삶은 ‘수도하는 삶’과 다를 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도협의회 운영위에서 누군가에게서 이러한 문제제기가 나왔다. 상근자 임금은 어떻게 하냐고.

당시 새벽에 신문을 돌려서 용돈이라도 벌려다가 한달도 채 안 돼 허리디스크가 재발하며 돈도 못 받고 그만둔 터라 귀가 번뜩 열렸다. 그리고는 곧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도 이제 임금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말이다. 당연히 월급 같은 것은 기대도 안하고 있던 상태에서 정말 가뭄에 단비가 이보다 더 반가우랴.

결국 도협의회 운영비와 상근자 임금을 주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취해졌다. 각 지구당의 당비 교부금 중 10%를 도협의회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 중 60%는 상근자 임금, 40%는 운영비로 사용하기로 결정이 된 것이다. 당시 도협의회는 정식당부가 아니어서 교부금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각 지구당이 큰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드디어 다음달 교부금이 내려오고 각 지구당은 일부를 제외하고(사실 4개 지구당 중 2개이니 반이다) 약속대로 10%를 송금했다. 나는 도협의회 결의에 따라 60%를 내 첫 월급으로 뗐다. 34,100원. 뗐다가 다시 붙였다.

당분간 서류상으로는 떼고 실제로는 붙이는 생활이 계속 이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실제 운영비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경비로 임금까지 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회계보고는 해야 했기에 모아뒀던 영수증을 일부 버려서 계산을 맞추기도 했었다. 도협의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래도 당은 빈약하지 않았다

포항시 지구당이 만들어지던 과정이 생각난다. 당원이 60명 정도 될 때쯤이었었는데 누군가 지구당이라는 것을 만들면 돈이 30만원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 말이 사실이냐며 바로 확인한 끝에 사실임을 확인하고 그럼 빨리 만들자 결의가 되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보수 수구의 아성 경북에 민주노동당은 도지부든 지구당이든 그렇게 출발했다. 유인물이 내려오면 뿌리고, 민주노총이 싸우면 달려가고, 농민회가 싸우면 달려가는 일. 한두명이 가도 깃발은 올리며, 그렇게 민주노동당의 존재를 알리는 일. 중앙당과 지구당 사이에 연락업무를 담당하는 정도.

당시 우리가 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정도밖에 없었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보정당으로서, 당으로서 할 일을 기획할 수도 없었고 또 기획한다 해도 집행할 수 있는 역량도 되지 않는 참으로 빈약한 출발이었던 것 같다. 더욱이 전국 광역시도 중 가장 넓은 지역인 경북은 투쟁이든 사업이든 시·군 단위로 집중될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한계도 더해져 도지부 건설의 목적과 상이 저마다 다 다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당은 빈약하지 않았었다. 당을 위해 눈물 훔치며 헌신하던 전국의 상근자들이 있었고, 당을 위해 시간을 내고 돈을 내고, 받는 것은 별로 없었어도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던 당원들이 한명 한명 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석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힘으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보수의 아성, 경북이란 콘크리트에 균열을 내고 있었음을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알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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