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흡족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2002년 양대 선거를 통해 쾌거를 이룩한 민주노동당은 새로운 세상 새로운 정치가 가능하다는 생각에 누구보다도 더 고무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맞이한 새해 2003년! 그러나 민주노동당에게 세상의 변화는 생각과 달리 너무나 더디었다. 희망과 기대로 가슴 벅찼던 새해 벽두부터 우리는 분노의 절규를 질러야만 했다. 배달호 열사의 죽음. 손배 가압류라는 신종 노동탄압에 자신에 몸에 기름을 얹고 불사질러 항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직 그랬고, 두달이 채 지나지 않아 경북 봉화에서는 박연거 농민이 농가부채를 비관해 음독 자살을 한 것이 또한 그랬다.

▲ 송무근 경북도당 사무처장은 2001년 영남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뒤 2002년 민주노동당 경북도협의회 간사를 시작으로 당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나이 30살, 전국의 사무처장 가운데 ‘막내’다. 대구와 더불어 보수의 아성이라 불리는 ‘경북’에서 독립운동 하듯 한뼘 한뼘 진보정치 지평을 넓히고 있는 그가 5회에 걸쳐 ‘목전의 사업’과 앞으로의 꿈을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털어놓는다.
누군가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것을 가리켜 세상 많이 좋아졌다 하며 농반 섞인 탄식을 할 때에도 세상은 여전히 노동자, 농민, 서민들에겐 눈물이고 한숨이고 수렁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잠시도 지체할 틈이 없었다.

우선 경북도당은 대선 때 설치했던 연락소를 기반으로 미창당지역 조직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 경북지역 당원을 2천명으로 배가할 야심찬 계획을 수립했다. 지구당은 한곳도 빠짐없이 분회를 건설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에 들어갔으며 이 모든 일사분란한 사업의 추진들은 2004년 총선만큼은 더이상 구호 외치는 수준이 아닌 제대로 된 한 판 승부를 벌여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시기가 가장 즐겁고 재미있었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든다. 비록 힘들고 어렵기는 매일반이라 하더라도 희망이 있었던 시기였고, 어렵고 힘들었던 만큼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돈독했기 때문이다.

경북도당의 '애마'를 소개합니다

이쯤에서 반드시 소개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앞서 얘기했던 경북도당의 ‘애마’다. 대선이 끝나고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을 만났다. 선거기간 차를 빌려주었던 매형이 차를 ‘회수’해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너무하긴 했다. 지방선거 때 잠깐 빌려 달라 하고선 대선이 끝나고 반납했으니. 아무튼 넓고 넓은 경북 각 지역을 거의 매일 다녀야 했는데 차가 없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대선 당시 안동에서 선거유세차량으로 사용하던 93년식 은색 그레이스 승합차를 30만원을 주고 구입하기로 했다. 30만원은 당시 도지부 부지부장이시던 김재수 동지가 기꺼이 기부했다.

그리고 또한 이 차는 구입에서 폐차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사건을 일으켰던 차이기도 했다. 우선 외관부터 살펴보면 주황색 띠를 한 바퀴 두른, 대선 당시 유세차량 디자인에서 4번 권영길만 뗀 상태였으며 온 몸은 울퉁불퉁. 도지부 지부장님이 처음 차를 보시더니 돈이 좀 들더라도 ‘찌그러진 곳 펴는데 10,000원’ 하는 데 가서 좀 피자고 하셨다.

출장 중에 한번 영천 톨게이트를 나왔는데 마침 입구에 ‘그 분’이 계셨다. 차를 세우고 물어봤다. "아저씨 이차 찌그러진데 펴려면 얼마 정도 들어요?" 차를 한 바퀴 둘러보신 '그 분'은 "야~" 하고 장탄식을 한 다음 “한 30만 원 정도는 되겠는데요” 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요? 그럼 됐습니다. 이 차 찻값이 30만원이에요” 하며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내부다. 당연히 창문은 손으로 돌리는 방식이었고, 히터와 에어콘이 달려는 있지만 바람은 안 나왔다. 라디오도 AM만 나왔고 그것도 차에 온도가 올라가기 전에만 나왔다. 한번은 여자친구(지금의 아내)가 평생에 단 한번 소원이라며 자동차 극장을 꼭 한번만 가보고 싶다고 했다.

두어달을 시달리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자동차극장에 마지못해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자동차극장은 그냥 영화를 자동차에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차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음향을 듣는 것이 아닌가? 고민 끝에 다시 창피함을 무릅쓰고 옆 차 창문을 두드렸다. "저~ 죄송하지만 라디오가 안 나와서 그러는데 소리 좀 키우고 같이 들으면 안 될까요?"

그 고마우신 분들의 황당한 표정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나와 내 아내는 <반지의 제왕>을 그렇게 봤다.

폐차와 함께 발견된 보물상자

결국 도당의 애마는 2004년 총선이 끝나고 폐차를 했다. 더이상 타고 다니기엔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우선 자꾸 엔진이 과열(오버히트)이 되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냉각수는 문제가 없는데도 바늘은 붉은 색칠된 곳까지 거침없이 올라가니 말이다. 처음에는 80km, 조금 지나니 70km, 급기야 60km 이상이 되면 과열이 될 때에는 차라리 버스를 타는 게 낫겠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한계에 다다르고 폐차를 할 때였다. 짐칸에는 아이스박스와 고장 난 앰프가 실려 있었다. 아이스박스에는 2003년 1월 도지부 수련회를 하고 남은 뒤풀이 안주 과메기와 오징어회가 담겨 있었고 고장난 앰프는 포항 건설노조에서 고쳐서 쓰려면 가져가라고 해서 실어놓은 것이었다. 문제는 ‘날씨에 따라 개폐가 결정되던’ 짐칸 문이 앰프를 실은 뒤부터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카센타에 가져가도 열쇠상자가 부서져서 문을 뜯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해서 1년을 넘게 실고 다닌 것이었다.

결국 폐차하던 날 뒤 꽁무니를 집게 달린 크레인으로 부수고 나서야 물건들을 꺼낼 수 있었다. 아이스박스 안에는 과메기와 오징어가 1차로 썩었다가, 2차로 말라붙은 흔적이 역력했다. 앰프는, 처음 봤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옴 몸을 곰팡이로 다 뒤집어쓰고 있어서 흡사 밀림이나 해저에서 발견한 이끼 찬 보물상자 같은 형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차가 찌그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참 기분이 이상했던 기억이 난다. 매연이 너무 심하다고 대구시당(당시에 경북도당이 있었던 걸 모르는 사람이었던것 같음)으로 항의전화도 걸려오고 했던 문제투성의 차였지만 정이 들어서였을까? 굉장히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한참 미련이 남았던 것 같다. 봉고차를 폐차하고 난 뒤 경북본부 사무처장님이 타던 화물연대 스티커가 붙어있는 프라이드밴을 물려받았다. 화물연대 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최경량 초소형 화물차의 활약은 다음편에 소개하겠다.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도당 봉고차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가 있다. 바로 나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가 좌충우돌 종횡무진 다니면서도 가장 열의에 차 즐겁게 다니던 그 때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에서고, 그러면서도 고물차를 몰고 다니며 있었던 이런 저런 우여곡절이 참으로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비유를 하자면 바로 이 차의 모습이 그때의 민주노동당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뭔가 어설퍼 보이고 정말 볼품없는, 저게 굴러 가기나 할까 하던 도당의 ‘애마’처럼 민주노동당 역시 그러했으리라. 저 당이 과연 얼마나 갈까? ‘아직 진보정당은 어림도 없지’라며 많은 사람들이 진보정당의 희망을 유보했다. 멀지 않아 곧 폐차 될 거야 하며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을지 모를 민주노동당. 너무나도 볼품없고 빈약했던 그 민주노동당이 지방선거와 대선을 넘어 다시 한판 싸움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대선이 끝나고 난 다음해인 2003년은 그랬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속 60km 밖에 나오지 않는 골동품 봉고차가 경북 골짝골짝을 누비고 다녔던 것처럼 말이다. ‘총선이 기다려진다. 우리도 이제 선거다운 선거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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