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노동이 왜 저평가되는지, 저임금을 받는 여성의 삶은 어떤지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해 <매일노동뉴스>는 20대부터 60대까지 10명의 여성노동자를 만난 노동사와 생애사를 들여다봤다.

① [70대·60대] 평생 일해도 제대로 인정받은 적 없는 경력
② [50대] 무력한 30년 경력 일용직·최저임금 갈림길에 서다
③ [40대] 양육과 돌봄 회전문에 매인 삶
④ [30대] 경력단절의 시작, 집으로 끌려 들어가는 엄마들
⑤ [20대] “생계 불안에 숨차” 흔들리다 사라진다
⑥ [종합] 유연한 일자리, 성 격차 해소냐 심화냐

이영숙(가명·46)씨는 4년차 학부모회장이다. 올해로 고등학교 2학년인 둘째 딸의 중학교 3년, 고등학교 1년을 회장으로 지냈다. 딸도 중학교 전교 회장을 했다. 대형 보험사에 다닌다. 보험사 전문직 커리어우먼이면서 딸까지 잘 키워낸 ‘수퍼우먼’. 이씨의 대외적 평판이다.

이씨가 보험사로 출퇴근하는 건 맞다. 다만 보험사 콜센터에서 일한다. 9년을 일했다. 직업은 학부모회는 물론 자녀에게까지 숨겼다. 자녀 교육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다. “콜센터는 ‘못 배운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잖아요. 내 직업 때문에 아이들 앞길에 흠가면 어떡해, 내 직업마저도 성적표가 되는 것 같아요.” 자녀 교육이 어긋난다면 그 원인이자 결과는 엄마가 된다. 이씨는 자녀 교육에 인생이 매여 있다.

자료사진 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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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의 무게

이씨가 처음부터 자녀 교육에 매인 건 아니었다. 자녀들이 초등학교 때까지 이씨는 학원 강사 일을 했다. 대학 때부터 해 온 일이다. 자녀 돌봄은 자신과 친정 부모님, 피아노와 태권도, 미술학원이 나눠 맡았다. 공부를 잘하는 딸이 반장을 하고 싶어 할 때도 참으라 했다. 반장 부모가 반에 상주하다시피 있어야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돈이 부족하진 않았다. 조종사 비행 시뮬레이터 교관으로 교대근무를 하는 남편이 경제력을 담당하고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1년 뒤, 25살에 33살의 남편과 결혼했는데 결혼에 드는 모든 자금, 집과 혼수를 남편이 다했다. 남편은 일을 그만둘 것을 요구했다. “얼마 벌지도 못 하는 거 벌어서 뭐하냐는 게 남편의 말이었다.”

부족한 건 자존이었다. 이씨는 인정투쟁이라고 회고한다. 그래도 ‘인 서울 4년제’를 나왔는데, 대학에서 학생회장까지 했는데, 집안에서 인생이 끝날 순 없었다. 생활비로 쓴 카드값이 나오는 날이면, 성적표를 들키는 기분이었다. 생활을 빚진다는 무기력이 이씨를 지배하려 했다. 무기력에 짓눌릴 순 없었다. 이씨는 결혼 후 1년 뒤인 2004년에 아들을 낳았다. 2007년에는 딸을 낳았다. 아들이 첫돌을 맞은 2005년부터 일했다. 2005년은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처음으로 50%선을 돌파해 50.1%를 기록한 해다.

돈은 얼마 벌지 못했다. 최저임금 수준이었다. 돌봄노동까지 전담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교대근무와 해외 출장이 잦은 남편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었다. 돌봄과 일을 병행하기 위해 강의 일정을 조정했다. 고등반에서 초등반으로 결국엔 유아반으로 교습대상이 바뀌었다. 수입은 원생 연령에 비례해 낮아졌다. 그래도 일을 놓지 않았다. 자존은 돈에 앞선다.

보육 다음엔 교육

이씨가 학원강사 생활을 놓은 건 첫째 아들에게 돌봄 시간을 더 쏟게 되면서다. 첫째는 약했다. 설사와 구토가 잦았다. 몸이 약하다고만 생각했다. 둘째까지 초등학교를 들어가 한숨을 돌릴 수 있는 2015년, 하필 그때 첫째의 증상이 너무 심해졌다. 병원을 찾았다. 다낭성 신장질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선천병이다.

돌봄 시간을 확보하려면 노동시간을 줄여야 했다. 학생 일정에 맞추면서 연차도, 휴일도 없이 일하는 학원강사는 불가능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고, 연차를 쓸 수 있는 직업을 찾았다. 지인으로부터 콜센터 일을 소개받았다. 경력이 통째로 사라졌지만, 아픈 아이 앞에서 아쉬울 겨를도 없었다. 콜센터에 들어간 후 1~2년간 아들이 아프면 바로 휴가를 냈다. 회사가 꺼려하는 당일 연차도, 가족돌봄휴직 신청이 잦았다.

콜센터는 기본급은 항상 최저로 해놓고 성과에 맞춰 성과급을 지급했다. 성과로 주는 임금은 한정돼 있었고, 차감되는 임금은 무한대였다. 2015년 기본급은 116만6천원이었다. 불합리하다 느껴졌지만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한숨 돌릴 시기가 찾아오니 딸이 마음에 걸렸다. 딸은 공부를 꽤 잘했다. 반장을 하겠다고 나서는 아이에게서 자신이 겹쳐 보였다. 자신과는 다르게 원하는 걸 모두 이루고 살았으면 했다.

딸 교육에 시간을 쏟았다. 초등학교 때 못했던 딸 학교의 학부모회장을 중학교 때부터 시작했다. 이씨는 딸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학부모회장을 맡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직업은 밝히지 않았다. 이씨만 그런 게 아니다. “학부모회에 속한 엄마들 중 한 명이 같은 보험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한다는 거예요. 사내망으로 정보를 찾아보니 전화로 보험영업을 하더라고요. 내 직업이 성적표가 되는 것 같아서, 아이 앞길에 흠갈까 봐 그런 마음이겠죠, 다.”

열심히 산 보상일까, 이씨에게 행운과 같은 일도 찾아왔다. 2021년, 한 팀에 한 명뿐인 사내 강사가 됐다. 팀이 전환되며 신입을 가르칠 강사가 필요해지자 뽑힌 것이다. 일 중간에 콜에서 벗어나 신입 교육을 할 수 있고, 강사 수당도 받는다. 최저임금 수준에서 임금이 훌쩍 뛰었다. 경력이 인정받는 기분도 들었다. 임금은 모두 자녀의 사교육에 밀어 넣었다.

교육 뒤, 다시 보육으로

일반적으로 자녀들이 대학교에 가면 자녀 교육은 끝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교육의 세계 너머에서 이씨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돌봄이다. 시부모와 친정 부모 돌봄, 자녀들의 자녀 돌봄. 부모에게 받은 돌봄의 도움을 되갚고, 자녀들에게 돌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씨는 돌봄과 교육의 회전문을 돈다.

회전문을 돌지 않을 순 없을까. 이씨는 생각한다. 일단 진입하면 끊임없이 돌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이씨는 소망한다, 딸의 비혼을. 진입 자체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혼자 살 수 있다면 그리했으면. 그래도 결혼하고 싶다면 서로를 충분히 검증하기를. 자녀를 얻고자 한다면 돌봄의 책임까지 합의할 것을. 이미 그런 세상 아닌가. 0.65명, 지난해 12월 합계출산율이 증명한다.

돌봄이라는 끝없는 부채

신성아 작가
신성아 작가

결혼한 여성에게 회전문은 강요된다. 신성아씨(40·사진)는 이를 거부하다 수용할 수밖에 없던 사람이다. 신씨는 광고업계에서 시작해 국회 보좌진으로 일했다. 자녀 돌봄은 가내 투쟁으로 남편과 시터, 자신이 분담해서 가능했다. 경제력 역시 남편보다 좋았다. 그랬던 신씨는 지금 돌봄과 가사노동을 전담한다. 2022년 6월3일 아이가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그날,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일을 계속할 것인가,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답은 병실에 있던 아이가 내렸다. “엄마, 가지 마. 제발 나랑 있어.” 국회 선임비서관을 그만뒀다. 신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재난에 가까운 돌봄의 상황에서 선택지는 없었다.

일과 삶의 위태로운 균형

신씨는 24살부터 일했다. 2008년, 여성취업자수가 전년보다 22%나 올랐을 때였다. 광고와 마케팅 업계에서 13년을 일했다. 자기착취로 성과가 나오는 업계 특성상 항상 시간 부족에 시달렸다. 27살에 첫 이직을 했고, 29살에 결혼해 30살에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고도 계속 일했다. 성과를 인정받아 3년마다 이직했다. 이직하지 않으면 연봉 인상률이 너무 낮았다.

2020년, 국회에서 커리어를 다시 썼다. 국회는 근무 외 시간은 당연하고 창의력, 인맥, 취향, 문화적 자산 등 모든 것을 일에 가져다 써야 성과가 났다. ‘감’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정보를 취득하고 교류하는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독서모임 등 여러 비공식 모임에도 참여했다.

자녀 돌봄을 둘러싼 집안 정치는 치열했고, 마침내 균형을 만들었다. 아이가 생기고 남편은 신씨에게 전업 돌봄을 제안했다. 신씨가 엄마라는 게 이유였다. 아이의 근무시간 대비 수입과 복리후생 등을 따지면 남편이 일을 놓는 게 맞았지만 그런 계산 따위는 소용 없었다. 지난해 기준 국회의원 보좌직원 보수 지급기준에 따르면 선임비서관의 월 급여는 약 657만원 수준이다. 연봉은 약 7천800만원이다.

신씨는 아이를 돌봐 줄 시터를 부르자 했다. 남편은 반대했다. 입장은 좁혀지지 않았다. 장외투쟁이 시작됐다. 신씨는 남편과 합의 없이 “멋대로” 시터를 불렀다. 그러면 남편은 시터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대신 아이를 태워 회사(국회)로 찾아왔다. 아이의 행복을 최우선에 두고 부모의 요구는 한발 빼기로 했다. 등·하원은 배우자가, 하원 이후 시간은 시터가, 저녁 시간부터는 신씨가 맡았다.

그 모든 이유, “엄마니까”

임세웅 기자
임세웅 기자

쌓아온 날들은 사라졌다. 신씨는 보육과 교육의 회전문에 떠밀린 셈이다. 아이가 아빠보고 남으라 했으면, 신씨는 계속 일할 수 있었을까. “엄마가 평소에 어땠길래 아이가 아빠를 찾느냐. 저 집은 왜 아빠가 간호하느냐. 그런 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기대하고 당연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답이 있었다. 여성의 돌봄 노동. 이 구조를 깰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 들었다.

모성과 돌봄은 타고난 것처럼 취급받지만, 이건 분명 후천적인 절박함이다. 일하고 가정에 들어와서도 아이에게 품을 내어주는 것, 돌봄과 가사노동은 엄마라는 이유로 당연한 것으로 취급받는 일. 사회가 비난해도 반듯한 모습을 내보여야 하는 일, 고통과 행복을 동시에 느끼는, 자발적이면서도 비자발적인 일을 사회는 ‘엄마’라는 말로 ‘퉁’친다.

신씨는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 간병을 하며 국회에서 정책이나 법안으로 내보이고 싶은 생각들이 쌓였다. 자녀 돌봄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과 현실을 마주하며 떠오른 정책들을 정리해 지난해 12월 책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도 냈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 경력 단절이 치명적이니까. 국회는 다른 직장보다 더하다. ‘감’이 중요하다. 그걸 잃은 것 같다. 신씨는 언제쯤 일할 수 있을까.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경력 단절 이후 재취업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8.9년. 그의 나이가 48.9살쯤이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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