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입을 채 떼기도 전에 눈물이 뚝뚝 흘렀다. “왜 가끔 어른들이 ‘옛날이 좋았지’라고 하잖아요. 나는 정말 그때로 돌아가기 싫어요.”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말에 김묘순(71)씨가 답했다.

남편과  딸 넷, 동생까지 부양의 무게

몇 개의 날짜는 또렷했다. 1990년 6월3일이 그렇다. “그날 애 아빠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남편은 전남 담양에서 양복점을 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 스물셋에 결혼한 묘순씨는 남편 일을 도우며 아이를 키웠다. 그전에는 “쌀값도 정확히 모를 정도로” 가계에 무리가 없었다.

뇌출혈로 남편이 쓰러지자 37세 묘순씨가 가장이 됐다. 거동을 할 수 없는 남편과 4명의 딸. 13살 큰딸 밑으로 3살 터울의 아이들이 3명. 도움이 필요했다.

묘순씨는 가족과 함께 친정엄마가 있던 서울로 갔다. 양복점을 정리한 뒤 1990년 9월1일 서울대입구역 인근 복개천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전업주부였던 묘순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요리였고 엄마의 추천으로 포장마차를 꾸렸다. 저녁 6시에 출근해 영등포시장에서 물건을 떼 와 17살 아래 막냇동생과 포장마차를 지켰다. 그런데 구청 단속반이 개업 80일 만에 포장마차를 철거했다. 450만원이던 자릿세와 집기가 모두 사라졌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던 돈이 날아갔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하잖아요. 막냇동생도 거의 제가 키웠거든요.” 서울 영등포구에 살았지만 일터는 서울 전역이었다. 포장마차를 했으니 자연스레 식당 일을 알아봤다. 왕십리 중앙시장에 있던 식당에서 곱창 뒤집는 일을 하다 일이 손에 익지 않아 한 달 만에 그만뒀다. 식당을 전전하다 대방역 인근의 개장국집에 정착했다.

새벽에 딸들의 도시락을 싸고 오전 10시에 출근해 밤 10시가 되어서 노원구 집까지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됐다. 한 달에 두 번 일요일에 쉬고 하루 11시간을 꼬박 일하는 일상이 13년간 이어졌다. 월급은 아이 넷을 키울 만큼 됐다.

“식당에 가려면 봉천고개를 넘는데 고개만 넘으면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오늘 하루는 또 어찌 보내나. 시골에서 농사짓다 시집와 술을 팔려니까 그게 그렇게 두근두근.”

사장이 운명한 뒤에 가게는 문을 닫았고 퇴직금 한 푼 받지 못했지만 사장이 가끔 챙겨주던 아이들 학비로 퇴직금을 대신한 셈 쳤다.

식당 경력은 사라지고 … 청소노동자로 새 출발

55세가 된 2008년부터는 수유리에 있는 학원에서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반신불수인 남편이 나이가 들며 거동이 더 어려워지자 간병의 필요성을 느꼈다. 남편은 노인장기요양보험 수급연령(65세)에 미달해 등급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주변 소개로 2009~2011년까지 이태원의 부잣집에서 아이돌보미 겸 가사노동자로 일했다. 한 달 130만원을 손에 쥐었고 식당보다는 수입이 줄었지만 딸들도 커 경제적 부담은 줄었다.

돌보던 아이가 커 일을 그만두게 됐고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동네 언니 소개로 집 근처 인덕대학교에 청소 자리가 나서 면접을 봤어요.” 수십 년간 쌓은 식당 경력, 아이돌보미 경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59세가 된 2012년 3월 인덕대학교 청소 용역업체에 합격해 입사했고 같은 해 노조가 생겨 8년째 분회장을 하고 있다. 휴게시간 1시간을 포함해 하루 8시간 일하고 수입은 200만원 남짓이다.

2013년에는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자녀들은 모두 독립했고 학비를 대며 키운 동생들과 생일마다 만나며 화목하게 지낸다. 지난해엔 30년 서울살이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63빌딩에 가봤다. 만 일흔 살이 되는 내년 정년퇴직하는데 노후는 노인연금과 약간의 저축에 기대려 한다. 내리 울던 묘순씨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나라에서 나오는 연금이 있으니까 (다행인데) 소일거리라도 찾아야 할지…. 그래도 지금은 예전보단 편해요. 30년을 고생하니 이런 시간도 오네요.”

”공부가 하고 잡던” 춘심씨의 꿈

“나는요. 정말이지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올해 경기도 소재 전문대 사회복지상담과에 입학하는 9년차 요양보호사 김춘심(61)씨가 들뜬 목소리로 합격 소식을 전했다.

“웃음치료도 배우고 노인심리상담사 자격증도 따서 역량을 키우려고요.”

춘심씨는 ‘마음껏 공부한다’는 꿈을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중학교 검정고시를 치렀고 고등학교도 다녔다. 2019년부터는 조한진희 다른몸들 대표와 생애사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다. 글을 쓰며 돌봄 현장의 어려움과 돌봄노동자의 삶을 알리고 있다.

원하던 졸업장은 두 딸을 키우고 나서야 딸 수 있었다. 전남 무안이 고향인 춘심씨는 할머니를 졸라 열일곱살에 상경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춘심씨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서울에 큰이모가 있었거든요. ‘할머니, 나는 서울 가서 식모살이 하더라도 공부하고 잡(싶)네’라고 해서 서울로 가게 됐어요.”

열일곱살에 서울 우이동 봉제공장에 취업해 일요일에는 청소년학교에 가서 공부를 배웠다. 봉사활동 온 대학생들에게 공부도 배우고 보육원에 위문공연도 다녔다. 그렇게 공장에서 4년을 일하다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친정엄마의 만류로 공장을 그만뒀지만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배우려고 했다. 십자수·미용 등 손으로 하는 건 무엇이든 자신 있어 공부도, 일도 하고 싶었지만 남편은 “결사반대”했다.

돌고 돌아 돌봄노동자로

건축업을 하던 남편이 IMF 구제금융를 계기로 실직하며 일을 하게 됐다. 남편은 건강을 잃어 30대 중반의 춘심씨가 가장이 됐다. 집에서 재봉틀을 돌려 만든 옷을 길에서 팔았고 경기도 안양의 대형마트·백화점을 돌며 입점업체 판매원으로 일했다. 아이들이 자라며 수입이 더 필요했고 요리를 좋아한 춘심씨는 식당으로 옮겼다. 한정식 식당에서 11개 반찬을 담당하는 책임자가 됐고 월급을 높이려고 여러 식당을 거쳤다. 두 딸 키우느라 2007년부터 8년을 꼬박 식당에서 일하니 몸이 망가졌다. 그래서 큰딸이 추천한 요양보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2015년에 공부를 시작해 2016년부터 요양보호사로 일을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의 일을 두고 “남의 똥 기저귀 치운다”고 했지만 춘심씨는 배우고 또 배웠다. 서울시어르신돌봄종사자종합지원센터에 가서 서비스대상자에게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익혔다. 전문성을 키우고 싶어 일하던 장기요양기관에 업무노트 작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제가 섬기는 어르신들은 정말 아픈 분들이거든요. 가족이 할 수 없는 일을 돌봄노동자가 해내는 거예요. 저의 돌봄으로 존엄한 노후를 지낼 수 있도록. 어르신이 ‘아 내가 존중받고 있구나’하고 생각하기를 바라죠.”

춘심씨의 꿈은 계속 자라고 있다.

불안정 일자리에 갇힌 여성노인들

<매일노동뉴스>는 여성의 날을 맞아 70대 여성 청소노동자 1명·60대 여성 요양보호사 3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모두 베이비시터·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경험이 있었다. 최저임금·계약직이라는 특징을 가진 “돌봄노동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는 의견이 공통적이었다. 경력단절 여부 등 일 경험·학력은 달랐지만 학습지 교사·조리 등 한 곳에서 수년간 정착해 일한 경력이 있음에도 고령이 되자 해당 경력을 활용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최혜지 서울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한국의 고령자는 은퇴 이후에도 빈곤하거나 빈곤으로 인해 은퇴하지 못해 고령자의 노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고령 경제활동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불안정 노동자에 해당하는 상황에서 노후소득 보장의 주요 전략으로 고령자의 노동 불안정 개선을 위한 정책적 노력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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