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윤정희(가명·51)씨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데 많은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그에게 “너는 대학에 못 보낸다”고 일찌감치 일렀다. 날 때부터 정해진 성별, ‘여자이기 때문에’로 충분했다. 큰 불평 없이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그는 30여년 근속했다. 세 아이를 낳아 키우는 돌봄노동과 임금노동은 병행할만한 일이 못 됐지만, ‘가장’인 탓에 악착같이 버텼다. 30년을 쌓아올린 숙련은 새 일자리를 구하는데 쓸모없었다. 퇴직한 현재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일한다.

이 시대를 사는 50대 여성노동자의 이야기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대학 진학, 개인의 꿈을 포기했지만 엄마란 이유로 육아와 생계를 모두 짊어졌다. 아이가 제 밥벌이를 할 정도로 컸지만 그의 몫이 될 양질의 일자리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30년 근속의 비결”

“여상 나와서 옛말로 ‘공순이’로 일했어요. 입사 때부터 남자와 여자 임금이 달랐는데 그 시절에는 남자가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 당연해서 그리 불만은 없었어요.”

정희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오전 7시에 나가 저녁 10시께 귀가했다. 주 6일 근무 잔업이 당연하던 시대다. 월 38만원을 손에 쥐었다. 당시 최저임금은 820원이었다. 하루 8시간 노동 기준 노동자 월 소득은 19만2천원. 고졸 여성이 당시 벌 수 있는 적잖은 임금이었지만 당시 월평균 근로소득이 42만원(통계청 가계동향조사)인 점을 감안하면 크게 높은 것도 아니다.

특히 남녀 임금격차가 컸다. 같은 생산직이더라도 여성은 남성 생산직보다 단순노무직에 가까운 일을 도맡았고 저임금은 합리화됐다. 정희씨가 입사한 그해 제조업 생산직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43.8% 수준이었다.

“12개 반 학생 중 10등 안에 들어야 면접기회를 얻었어요. 삼성전자 들어가려고 엄청나게 공부했지.” 윤씨는 자랑이기도 한 과거 기억을 떠올렸다. 삼성전자가 아니면 구미 신발공장, 봉제공장을 갔어야 했을 때라고 덧붙였다.

1995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장밋빛일 줄 알았던 결혼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IMF 외환위기로 집을 사기 위해 낸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일자리가 불안정한 남편 대신 ‘가장’ 역할을 했다. 30년 근속의 동력이다.

생계도 육아도 모두 떠안아

여성가장은 남성과 달리 생계에만 전념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남편이 실직 상태였는데 당시는 남자들이 애 보는 육아? 그런 개념이 없었어요.” 육아와 일은 모두 그의 몫이 됐다. 회사 안팎에서 눈치껏 행동해야 했다. 당시 아이 한 명당 3개월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도 보직이 달라질 것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부모님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첫째와 둘째 모두 3살까지 전남 무안 친정집에 맡겼다. 생이별이 시작됐다. 영상통화는커녕 삐삐만 있었던 시절이다.

돈과 시간이 허용하지 않았고 한두 달에 한 번씩 아이 얼굴을 겨우 봤다. “영상통화를 할 수 있어, 뭘 할 수 있어. 자가용도 없어서 3~4시간씩 무궁화호 타고 아이들 보러 다녔지. 가면 또 빈손으로 가기 그렇잖아. 뭐라도 사들고 가야지.” 쳇바퀴 돌듯 일하다 보니 땅바닥을 기던 아이는 서고, 말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며 전쟁 같은 육아가 시작됐다. 어린이집은 윤씨의 퇴근시간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고, 인근에 사는 친척, 이웃, 아이의 친구 엄마의 손을 고루 빌려야 했다.

“발 달린 놈이 집에 있냐고, 다른 집에 놀러 가 민폐도 끼치고 계속 돌아다니니깐. 당시 키즈폰이라고 있었어. 그거 목에 매달아 줬지. 연락해야 하니깐.”

2015년 아이들이 제 앞가림을 할 때쯤 정희씨의 몸은 일하지 못할 만큼 상해 있었다. 질병휴직을 반복하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2020년 그만뒀다.

사회복지사 꿈꿨지만 …

50년 인생 중 30년을 갈아 넣은 직장 경력은 취업시장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애초 시간이 경력이 되기 어려운 단순노동에 여성을 밀어 넣은 결과다.

그는 취업시장 안 자신의 처지를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파 쉬는 동안 2년제 학위를 땄고, 사회복지사 자격과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일자리를 찾아다녔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더 열악했다. “사회복지사 하려고 면접도 몇 번 봤지. 나는 이력서가 화려하잖아. 삼성전자도 나오고, 대학도 나왔는데… 임금이 터무니없는 거지.” 미련 없이 포기했다.

2021년 가을 급식업체로 눈을 돌렸다. “양파 썬 것 나르고, 아침에 언니들 재료 준비하게 도마 깔아주고 했지. 하루에 김치 300~400포기, 양파 100~200개 썰어야 하는데 내 생각이지만 기 안 세면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는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퇴사했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건강만 더 나빠졌다.

지금은 친구 소개로 건설현장 안전담당자로 일한다. 안전 관련 교육을 받은 뒤 현장 안전을 점검하는 일이다. 일단은 12만~15만원 수준으로 최저임금보다 높다. 하지만 일감이 들쑥날쑥하고 고용불안이 크다. 그는 “저번주는 수요일에 현장 나갔다가 잘려서 토요일 다른 데로 가서 일했어. 2월에는 150만원? 200만원도 안 될 것 같다”고 한숨 쉬었다.

정희 그리고 해수
50대 여성노동자의 삶

김해수(50·가명)씨가 처음 제조업에 발을 들인 건 2014년이다. 첫 직장과 현재 일자리, 삶의 터전 뭐 하나 정희씨와 겹치는 부분이 없지만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닮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사무실 경리로 사회생활 첫발을 뗐다. 타자를 치고 서류를 꾸미는 일이었다. 그는 첫 아이 임신, 회사의 폐업 등을 이유로 입직과 이직을 반복했다. 당시는 아이를 임신하면 직장을 당연히 그만둬야 되는 줄 알았다. 숙련을 쌓을 시간도 부족했지만, 숙련이 크게 쌓이는 일도 아니었다.

2014년 40대가 된 그가 일할 곳은 더 이상 구하기 어려웠다. 제조업 구인공고로 눈길을 돌렸다. 한 자동차 부품사에 입사했다. 단순 조립 업무로 일터에는 ‘언니’들이 많았다. 적응이 빨랐다.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한 그는 6개월여 뒤 정규직 노동자로 전환됐다. 기본급은 최저시급을 조금 넘지만 회사는 두 달에 한 번 성과급, 아이들 학자금을 지원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이곳에서 정년퇴직을 꿈꿨지만 회사의 느닷없는 폐업으로 실업급여 수급자가 됐다. 수급기간이 다 끝나기도 전 그는 인쇄기계를 만드는 제조업체에 재취업했다.

“실업급여 받은 지 해를 넘기고, 나이를 한 살 먹으니 날 써주는 데가 있을까 싶어서 부랴부랴 알아본 거죠.” 이전 직장에 비하면 임금과 복지는 수직 하락했다. 복지라 할만한 것은 없고 한 달 손에 쥐는 돈은 200만원 남짓이다. 그것도 6개월 계약직이다. 이제 김씨는 “정규직만 되면” 살 것 같다.

1990년은 여성의 경제활동이 급격히 증가하던 시기다. 1985년 55.1%였던 20~24세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1990년 64.6%, 1995년 66.1%로 다른 연령대보다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상당수 인력은 단순 노무, 남성 보조적인 업무를 담당했고 사회는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정당화했다. 살기 위해 단 한 번도 애쓰지 않았던 적 없지만 50대 여성노동자는 결국 과거도 현재도 저임금·불안정한 일자리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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