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고은 기자

A씨는 지난해 11월 서울 구로구 한 게임회사 면접을 볼 때 ‘페미니즘 사상검증’ 질문을 받았다. 면접관에게서 “이번 ‘뿌리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 A씨가 지원한 회사는 면접일 전날 서비스 중인 게임 일러스트의 집게손가락을 수정하겠다며 향후에도 강경하게 조치하겠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공지했었다. A씨는 “뿌리 사태로 지칭했다는 점에서 해당 회사와 면접관이 이미 넥슨의 갑질과 마녀사냥을 (애니메이션 작업을 한) 스튜디오 뿌리와 직원의 잘못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며 “지원한 파트 업무와 관련 없는 질문인데다 민감한 이슈에 대해 이렇게 안일한 태도를 보이는 게 게임업계의 현실이라고 체감했다”고 밝혔다.

여가부 폐지 공약 비판하자 ‘페미’라며 공격

여성·노동단체가 모인 ‘페미니즘 사상검증 공동대응위원회’는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페미니즘 사상검증 피해 실태를 발표했다. 여성노조가 지난해 8~12월 페미니즘 사상검증 관련 제보를 취합한 결과 56명이 77건을 제보했다고 밝혔다. 유형별로는 ‘작업물 교체 및 고지 없이 무단 수정’이 19건으로 가장 많았고, ‘직장내 괴롭힘’(17건), ‘채용성차별 및 입사 취소’(14건), ‘사이버불링’·‘SNS 검열 및 관리’(9건), ‘부당해고 및 계약해지’(7건), ‘계약서상 불이익 조항’(2건) 순이었다. 언론보도로 알려진 사례뿐만 아니라 게임업계에서 다양한 형태로 노동자에 대한 사상검증과 불이익 조치가 행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SNS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의견을 개진해도 괴롭힘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었다. 피해자들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여성 방송인에 대해 옹호하는 글이나 대선 직전 윤석열 후보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비판하는 게시물을 올렸다는 이유로 개인 신상 유포, 모욕 등 무차별적 공격에 시달렸다.

무차별적 공격을 가하는 이용자를 제재하고 노동자에 대한 보호조치를 마련해야 할 회사는 오히려 이를 방관하거나 부추기는 모양새였다. 페미니즘 관련 예민한 이야기를 SNS에서 리트윗하지 말라고 이사에게서 통보받은 경험이나 계약 미팅 중 SNS를 하냐고 물어본 뒤 작가들이 사회적 이슈에 관해 입장표명하는 행위를 싫어해서 관리한다는 말을 들은 경험 등이 제보 사례로 접수됐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여성노동자들로 하여금 매 순간 살얼음판을 내딛는 기분으로 직장생활을 하도록 강요하고, 실제 말 한마디 잘못하는 순간 부당하게 해고를 당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페미니스트로 ‘찍혀’ 사이어불링·스토킹을 당했다는 응답자는 “회사에서 ‘당신이 포트폴리오로 쓴 우리 회사 게임의 원화를 전부 내려 달라. 아니면 고소하겠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고 밝혔다. 또 다른 응답자는 “대표가 ‘자신이 대학생 때 좋아하는 여학생을 밤에 따라다니는 게 국룰이었다’고 한 말에 ‘당사자는 좀 놀랐을 것 같다’고 말하자 ‘사상과 가치관이 맞지 않으니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며 해고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노동부 적극적인 근로감독 필요”

정부 대응도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용노동부가 서울 소재 게임업체 10곳을 대상으로 사이버불링 관련 실태를 점검했는데 이중 3곳에 강제력 없는 단순 권고인 행정조치만 내렸다. 강미솔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는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는 근로자뿐 아니라 프리랜서 등에게도 피해가 발생하는데 이들의 경우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각종 공격에 취약하다”며 “여성혐오와 차별적 관행의 근본적 개선이 이뤄져야 하고 문제 기업들에 대한 노동부의 적극적인 근로감독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날 출범을 알린 공동대응위원회는 “페미니즘 사상검증이 성차별적 구조 아래 발생하는 문제라는 사회적 인식을 만들어나가겠다”며 “여성노동자가 더 이상 홀로 싸우지 않도록 피해자 보호와 지원을 위한 신고 채널(https://forms.gle/enLKxt7GtbT4ycsaA)도 운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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