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고은 기자

“작업물로 누군가를 조롱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조롱한 적도 없습니다. 저들의 주장대로 제가 은근슬쩍 혐오표현을 넣었다면 제가 작업한 그림에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작업하지 않은 그림, 제가 입사하기도 전 그림에서 ‘혐오표현’을 발굴해 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논리에 맞지 않는 소수의 악성 민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길 바랍니다.”

넥슨 게임 메이플스토리 홍보 영상 속 ‘집게손가락’ 모양을 그린 당사자로 지목되며 괴롭힘에 시달린 애니메이터 A씨가 밝힌 심경이다. 8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페미니즘 마녀사냥을 멈춰라!” 게임·웹툰 등 온라인 집게손가락 억지 논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토론회에서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A씨 입장문을 대독했다. 이날 토론회는 장 의원과 한국여성민우회, 한국게임소비자협회, 전국여성노조, 정의당 여성위원회가 공동주최했다.

‘페미 색출’→기업 수용→‘반페미’ 효능감 증대, 악순환

이번 사태는 메이플스토리 캐릭터 엔젤릭버스터(엔버)의 뮤직비디오 춤추는 장면에서 손 모양이 ‘남성혐오’를 표현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 작업을 맡은 스튜디오 뿌리 직원 중 한 명인 A씨가 본인 SNS에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 점이 알려지면서 집게손가락을 고의로 포함시켰다는 음모론이 온라인을 통해 확산했다. 언론보도로 해당 장면은 A씨가 아닌 다른 업체 40대 남성이 그린 사실이 확인됐는데도 집게손가락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사건의 본질은 동등한 권리 주체 간 ‘갈등’이 아니라 노동자에 대한 일방적인 사상검증이자 노동탄압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신혜정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의혹에 휘말린 상당수 여성노동자는 작업물을 공개하지 못하게 되거나, 기존에 공개했던 작업물이 회수되는 일을 겪는다”며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페미니즘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생계와 직업이 위협받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여성노조가 언론에 보도된 사건과 노조에 접수된 제보 내용을 추산해 보니 페미니즘 사상검증이 본격화한 2016년부터 현재까지 콘텐츠업계 피해 현황은 확인된 것만 83건이나 된다.

문제는 이러한 사상검증과 집단적 괴롭힘에 대해 사용자측이 노동자 보호조치를 내놓기는커녕 공식 사과와 계약해지 같은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승인하면서 오히려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는 점이다. 신혜정 활동가는 “협업을 통해 결과물을 내는 게임업계의 경우 ‘동료에게 피해를 준다’는 메시지를 줌으로써 여성노동자가 스스로를 검열하고 감시하도록 만든다”며 “고용주가 노동자의 신념·자유의지·정체성까지도 통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민주 페미니스트연구 웹진 Fwd 연구자는 “(색출작업은) 모든 여성을 낙인찍기의 상시적인 위협으로 몰아넣고 여성의 일상적 자기검열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노동자 불이익처분 하지 말고 악성 유저에 엄정대응해야”

괴롭힘 대상자가 된 이들은 대부분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프리랜서인 만큼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김유리 여성노조 조직국장은 “페미니즘 사상검증을 예방하고 대응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조치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거나 모든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당장 이를 현실화화기 어렵다면 산업안전보건법상 감정노동자 보호조치를 프리랜서에게까지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고민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사업주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혜정 활동가는 “게임업계는 지금이라도 소비자의 정당한 의견이라는 외피를 둘러싼 페미니즘 백래시에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사업주는 안전한 일터를 만들 책임이 있다. 창작물과 노동자 보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봐야 대응이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류하경 변호사(법률사무소 물결)는 “근로자를 비난하는 외부 여론이 있다고 해서 사용자가 해당 근로자에게 불이익처분을 하는 것은 법률상 허용되지 않는다”며 “오히려 위계나 위력에 의한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악성 유저들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