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방직 똥물사건

▲ 유혜경 노동법 박사
▲ 유혜경 노동법 박사

김영태 섬유노조 위원장은 1977년 말부터 지부 파괴를 위한 구체적인 공작을 진행했다. 섬유노조는 조합원을 강제로 교육에 동원해 “동일방직지부 집행부는 불순세력인 산업선교회 앞잡이”라고 매도했다. 섬유노조는 1978년 1월22일 임시 대의원대회를 열어 규약 중 사고지부 수습절차에 관한 규정을 개정했다. 주요 내용은 섬유노조 자체 판단에 따라 언제든지 산하 지부나 분회를 사고조직으로 규정할 수 있고 사고조직으로 규정되면 본부가 임명한 수습위원에게 조직 대표자 권한과 업무 일체를 즉시 인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노총은 “외부세력 침투에 대처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근로환경 개선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산하기구로 조직행동대를 편성했다. 위원회의 목적은 산업선교회나 가톨릭 노동청년회의 활동을 봉쇄하는 데 있었다. 지부 파괴공작이 치밀하게 추진되는 상황에서 이총각 동일방직 집행부는 1978년 2월21일 대의원 선출을 공고했다. 그런데 일부 조합원들이 대의원 선출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부는 “지부 규약은 부서별로 조합원 25명당 1명씩 선출하도록 했으나 5명이 넘는 부서도 있고 모자라는 부서도 있기 때문에 인접부서와 인원수를 조정해 대의원을 배정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일부 조합원들이 계속 이의를 제기하자 섬유노조는 지부 대의원 선출 연기를 지시했다. 지부가 본부 지시를 거부하고 예정대로 대의원회의를 강행했다. 대의원 선거일인 2월21일 새벽 5시30분경 몇몇 남성노동자들이 투표소인 지부사무실로 들이닥쳐 온갖 욕설을 퍼부으면서 투표함과 기물을 부쉈다. 투표하러 오는 여성 조합원들에게 똥물을 퍼부었다. 지부사무실은 난장판이 됐고 이 소식을 들은 400여명의 조합원들은 지부사무실에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섬유노조는 2월25일 지부에 “78년 2월23일 오후 5시를 기해 사고지부로 결정했으니 업무일체를 조직 수습위원에게 인계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지부 집행부는 섬유노조 결정과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조직행동대가 달려들어 지부사무실을 점거하고 집행부 간부들과 조합원들을 지부사무실 밖으로 밀어냈다. 지부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명동성당과 인천산업선교회로 몰려가 농성에 돌입했다. 열흘 후인 3월6일 섬유노조는 대구에서 중앙위원회를 열어 이총각 지부장, 정의숙·이병국 부지부장, 김인숙 총무부장  등을 명령불복종 이유로 제명하고 동시에 여타 징계에 대한 권한을 위원장에게 일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지부에서 쫒겨난 지부집행부는 민주사회단체들의 지원을 받으며 섬유노조에 대한 투쟁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동일방직지부에 대한 사회여론이 일면서 섬유노조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다. 섬유노조는 3월 중순께 ‘동일방직 인천공장 사건 경위서’라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섬유노조는 문건에서 “사건을 격화시킨 것은 조화순 목사가 이끄는 도시산업선교회의 추종자들이 추악한 지위 유지를 기하고 일부 종교세력이 노조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획책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종교사회단체들은 3월21일 동일방직 긴급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촉구했다. 종교계 지도자와 정부당국 간 협상이 이루어져 “동일방직 사건을 2월21일 대의원선거 이전으로 환원”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당초 약속을 어기고 회사와 경찰의 탄압이 계속되자 대책위원회는 기도회를 열어 탄압 중단을 촉구했고 20여명의 노동자들이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4월1일 경기지방노동위원회는 회사의 요청대로 해고를 승인했다. 회사는 곧바로 124명을 해고했다. 김영태 섬유노조 위원장은 해고된 124명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이들을 취업시키지 말라는 협조공문을 보냈다. 이총각 집행부를 완전히 축출시킨 섬유노조는 박복례를 중심으로 조직수습에 착수했고 경기도지사로부터 박복례를 대의원대회 소집권자로 지명을 받아 대의원선거를 거쳐 박복례를 새 지부장으로 하는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이총각 지부장 등 노동자 60명은 대의원회를 저지하기 위해 4월26일 회사에 들어갔으나 경찰에 연행돼 구속됐다. 그들은 구속에 앞서 징계처분 무효 확인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당했다. 블랙리스트로 인해 다른 회사에도 취업할 수도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재취업까지 위협받게 된 노동자들은 투쟁에 돌입, 김영태 위원장의 비행을 폭로하는 유인물을 돌리고 ‘임시 전국섬유노동조합 동일방직지부(지부장 추송례)’를 결성했다. 해고자들을 중심으로 한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1979년 10월26일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해 한국노총 위원장실을 점거하고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농성에 돌입했다. 5월13일에는 ‘전국 노동기본권 확보 궐기대회’에 참석해 노총민주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 5월17일 신군부 쿠테타로 이들의 투쟁은 다시 좌절됐다. 

 YH 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투쟁 

YH 무역주식회사는 1966년 재미교포 장용호가 세운 가발회사로 70년대 초반 종업원 4천여명에 수출 순위 15위를 기록하는 대기업으로 급성장한 회사다. YH 무역주식회사의 노동조건은 1975년 기준 일당 220원이었고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다. 고용형태는 도급제였다. 노동자들에 대한 전출·감봉과 인권유린이 성행했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저항해 노동자들은 1975년 두 차례 노조 결성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975년 5월24일 섬유노조 지원을 받아 YH 무역지부(지부장 최순영) 결성에 성공했다. 그 후 노조는 회사와 단체교섭을 벌여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을 대폭 개선해 자주적인 노동조합으로 발전했다. 

70년대 후반에 접어들자 장용호가 막대한 이익금을 미국으로 빼돌린 데다가 가발 경기의 쇠퇴로 인해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1970년 4천명이던 종업원수는 1978년 500명으로 급감했다. 1979년 3월 지부장이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자 회사측은 폐업공작을 가속화했다.

같은해 8월6일 마침내 회사는 일방적으로 폐업공고를 붙였다. 다음날인 7일에는 기숙사, 식당을 폐쇄해 퇴직금, 해고수당을 10일까지 수령하지 않으면 법원에 공탁한다고 발표했다. 이제 상황은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고 노동자들은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노조는 8월8일 마지막 투쟁대책을 논의했다. 노조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사회 선교협의회,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를 비롯한 각 종교단체, 인권단체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투쟁장소로 사회 전반에 커다란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신민당사로 하기로 했다.

8월9일 신민당사 4층 강당에 조합원 187명이 모두 모여 “우리들이 나가라면 어디로 가란 말이냐, 배고파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걸고 농성에 들어갔다. 8월10일 신민당은 국회보사위원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당내에 사회노동문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정부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신민당에게 여공들을 해산시키라는 요구만을 되풀이했다. 서울시경 국장이 거듭 해산을 요구하면서 경찰들이 당사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등 사태는 점점 긴박해졌다.

노조는 밤 10시40분경 긴급 결사총회를 열고 경찰이 들어와 해산시키려고 할 경우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죽음으로 맞서겠다고 굳게 결의했다. 새벽 2시에 서울시경 국장으로부터 신민당에 전화가 걸려 와 “여공들을 내보내지 않으면 들어가겠다”라는 최후통첩이 있었고 2시 정각 자동차 경적소리가 길게 두 번 울리면서 경찰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YH 무역 노동자들에 대한 진압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당사 밖에는 조명용 소방차 2대가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고가 사다리차 3대, 물탱크 2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1천여명의 경찰들이 당사 정문으로 밀치고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 등 국회의원 6명, 당원과 기자 등 30명이 중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언론인 피해실태 조사위원의 의견에 의하면 경찰의 이 작전은 기자라는 신분을 밝혔는데도 “기자면 다냐” “기자 좋아하네” 등의 폭언을 쓰면서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일선 기자들의 보도활동을 봉쇄하기 위한 계획된 폭력이었다. 

경찰의 무지막지한 진압과정에서 김경숙(사망 당시 21세)이 왼쪽 팔 동맥이 절단되고 타박상을 입은 채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 당사 건너편 녹십자병원으로 옮겼으나 새벽 2시에 끝내 숨을 거두었다. YH 무역 본사 기숙사에서 농성 중이던 58명의 여성노동자들은 이날 오후 2시께 담을 넘어 처들어 온 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됐다. 

이후 YH 무역 노동자 강제진압으로 정치판에는 격동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종교계와 인권운동단체, 진압과정에서 폭행을 당한 기자들은 일제히 정부를 비판했섰다. 신민당 내부에서도 지도부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총재단에 대한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이 제기돼 법원이 받아들였다.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러나 역으로 박정희 정권의 몰락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신민당 의원들의 총사퇴 결정과 10월17일 부마항쟁이 터지면서 유신체제는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이러한 위기가 권력 엘리트 내부 분열을 가속화시켜 박정희 대통령 피살로 이어졌다. 이렇게 박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