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혜경 노동법 박사

동신화학 쟁의 보복 집단해고 사건

서울 문래동에 소재한 동신화학은 평균 일당 82원이라는 ‘기아’임금을 지급했던 사업체다. 저임금에 참다못한 노동자들은 ①기본임금 50% 인상해 최저생계를 보장할 것 ②근속연수에 따른 퇴직금누진제 실시 등 5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1965년 3월19일 쟁의행위를 시작했다. 회사측은 냉각기간을 십분 악용해 집행부에 대한 불신과 노조파괴 공작을 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사용자가 출석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조정안도 제시하지도 않는 등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동신화학노조는 냉각(조정)기간 만료일인 그해 4월12일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해 실력행사에 돌입할 것을 결의한다.

사태가 심각한 국면에 이르자 주무관청인 노동청은 실력행사를 결의한 12일 오후 8시 비밀리에 노사에 쟁의협정서를 작성하고 조인하도록 종용해 쟁의를 종결시킨다. 쟁의는 일단락 됐지만 사용자는 보복에 나섰다. 같은달 20일 신광규 외 60명을 지위격하 부당전출하고 신광규 등 30명으로부터 강제 사표를 받아냈다. 급기야 20일에는 가장 열성적인 양장수 부지부장을 부당해고 한다.

당시 언론계는 동신화학의 쟁의 보복 집단해고에 대해 회사측을 규탄하고 나섰고 노동청은 24일 근로감독관을 파견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 부당노동행위라 단정했다. 그러나 부당해고를 당한 대다수 해고자들은 퇴직금과 제수당을 법정한도액 이상으로 지급한다는 사측 회유에 넘어가 비밀리에 구제신청을 취하했고 그에 따라 동신화학 쟁의 보복 부당노동행위 사건은 실패로서 끝난다.

동신화학투쟁은 쟁의가 종결된 후에도 노조활동에 대한 보복조치로 조합원들을 집단해고한 것으로 사측의 노동 3권 침해를 목적한 적극적인 부당노동행위의 본질을 보여준 사건이다.

심도직물 가톨릭신자 집단해고 사건

강화도에 위치한 심도직물은 종업원 1천200명을 둔 섬유제조업체다. 심도직물 사건은 1967년 7월19일 사측이 강화도 직물노조 분회장인 박부양을 부장으로 승진시키고 온갖 회유로 노조활동을 하지 않도록 종용하자 박부양이 이에 대항해 싸우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사측은 1968년 1월4일 박부양을 해고했다. 가톨릭 신자를 중심으로 한 300여명의 조합원들은 박부양 분회장 부당해고에 항의하며 천주교 부속 건물인 근로자센터를 빌려 집회를 열었다.

경찰은 성당에 들어와 전미카엘신부에게 노조원들에게 집회장소를 제공한 것을 문제삼으며 “노동자에 불온한 사상을 주입했다”면서 위협을 가한다. 한편 사측은 노동쟁의가 시작되기도 전인 1968년 1월7일 오후 4시 공장을 폐쇄하고 공장 정문에 “천주교 전미카엘신부의 부당한 간섭으로 공장작업을 무기한 휴업한다”라고 게시했다. 이어 1월8일에는 강화도 내 21개 직물업자들이 모여서 “천주교 노동청년회 회원은 누구를 막론하고 앞으로는 고용하지 않는다”는 등의 7개항을 결의한다.

천주교 노동청년회본부는 이러한 결의사항의 취소와 공식 사과를 요청하면서 직물업자들과 대립했다. 이 문제는 단순한 노사분규에서 종교문제와 결부된 사회문제로 확대된다. 들끓는 여론 속에 강화직물협회가 공개 사과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1968년 6월27일 중앙노동위원회가 박부양의 해고를 부당노동행위로 판정한다. 그러나 심도직물은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시간을 지연시킨다. 결국 박부양이 노동조합을 살리기 위해 정식으로 회사를 사퇴했고 회사는 제기한 소송을 취하함으로써 이 사건은 종결된다.

심도직물 사건은 노동조합의 쟁의행위가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하에서 노조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선제적, 공격적으로 직장폐쇄를 강행한 것으로 불법 직장폐쇄의 본질을 보여준다.

외국인투자기업 시그네틱 쟁의

전자계산기부품 제작회사인 시그네틱전자공업은 한국인 종업원을 차별했다. 당시 한국인 종업원 임금은 18달러20센트였는데 미국 본사 종업원은 302달러로 그 차이가 16.5배에 달했다. 저임금에 혹사당하던 시그네틱 노동자들은 1967년 9월8일 외기노조 시그네틱분회를 결성하고 서울시로부터 노조설립 신고증을 교부받는다. 그러나 미국인 사장은 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외기노조는 이 회사 노동자에 대해 조직관리권이 없으며 외기노조 서울지부 시그네틱분회를 종업원의 교섭단체로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어 사측은 경제기획원에 노조해산명령을 요청했고 경제기획원은 이를 받아들여 서울시에 노조해산을 공문으로 지시한다. 해산 이유는 “시그네틱은 외자도입법 16조에 따라 한국법인으로 인정되므로 외기노조에 속할 수 없고 따라서 해산돼야 하며 다른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사측은 노동자들에게 외기노조에서 탈퇴하고 다른 노조에 가입하면 노조를 승인하겠다고 종용했고 분회장인 배홍조를 해고했으며 1968년 3월26일에는 외기노조 가입은 불법이라는 이유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노조해산 신청서를 제출한다. 서울시는 경제기획원의 압력을 받아 이미 설립된 노조 설립신고 취소를 시그네틱분회에 통고하고 서울지노위에 노조해산 결의를 요청한다.

이러한 정부측 태도에 격분한 3백60명의 노동자들은 4월12일 정오부터 농성에 돌입했고 노동자들은 “서울시가 외기노조에 가입했다는 것을 이유로 노조를 해산시키려는 것은 헌법과 노동조합법이 보장하는 노동기본권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8년 5월23일 서울지노위는 서울시가 요청한 노조해산 결의 요청을 기각한다.

시그네틱 노동쟁의는 외기노조와 금속노조 사이의 조직관할권 문제로 변질됐다. 한국노총은 1968년 8월2일 “시그네틱은 전자회사로서 산업별로 보면 금속공업에 속하므로 비록 외국인이 투자해 설립하고, 외국인이 사장이라도 국내 상법에 의해 설립된 점을 생각하면 이 조직은 금속노조 관할이 타당하다”고 판단해 시그네틱분회를 금속노조로 이관한다.

금속노조 시그네틱분회는 같은해 9월17일 352명의 조합원이 참가한 가운데 20일간 쟁의행위를 전개한 끝에 임금 20% 인상과 상여금 350% 지급 등을 확보했다. 사측이 쟁의의 책임을 물어 인사과장을 해고조치하자 분회는 무단결근 등으로 10여일간 태업을 강행한다.

그해 12월6일 노동청은 외국인투자기업에서 태업, 쟁의 등을 일으키는 노조는 노동조합법에 의해 해산시키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히고 시그네틱분회가 12월7일까지 정상작업에 돌아가지 않을 경우 주모자를 업무방해 등으로 입건하겠다고 밝힌다. 노동청의 경고는 해방 이후 최초의 노조해산에 관한 경고조치로 외투기업 보호를 위해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정부는 노조활동과 노동쟁의를 규제해서라도 외국자본을 들여와야 한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출한 것이다. 실제로 외투기업들이 정부와 투자조건을 합의할 때 정부당국자들로부터 노조가 설립되지 않을 것이고 설립해도 노동분규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결국 1969년 ‘외국인투자기업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제정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면방 쟁의

면방 쟁의 사건은 1969년 5월 섬유노조가 최저생계비를 보장받기 위해 본공은 253원에서 325원으로, 임시공은 125원에서 160원으로 인상해 줄 것을 16개 면방회사에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사용자측은 노조의 요구를 거부했다. 1969년 7월20일 쟁의행위 찬반투표에서 99.3% 찬성으로 쟁의행위가 시작됐다. 사용자단체인 대한방직협회는 7월26일 서울고법에 중노위를 상대로 ‘쟁의적법 판정의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법원은 8월21일 이유 없다고 기각했다. 이로써 법률적 판단에 의존해 파업을 저지하려던 대한방직협회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법률 공방 속에서 노사교섭이 진행됐고 임의중재 회부에만 합의한 채 교섭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섬유노조는 실력행사의 불가피성을 통감하고 8월23일 행정관청에 쟁의행위 발생을 신고했다. 8월24~26일 사이에 서울 등 전국 8개 도시에 산재한 사업장에서 임금교섭 보고대회를 개최하고 실력행사에 대비한 조직적 단결을 촉구하는 행동을 한다. 마침내 섬유노조는 9월8일 다음날부터 쟁의행위 돌입을 선언한다. 서울 방림방적과 안양의 태평방직에서 쟁의행위가 개시됐다. 섬유노조가 파업으로 방향을 잡아나가는 동안 대한방직협회는 전면 대결의 태세를 갖췄다. 방림방적과 태평방직에서 시한부파업을 벌이자 즉각 직장폐쇄를 단행한다. 대한방직협회는 비상대책본부의 결의로 8월1일부터 본공의 기본급을 253원에서 296원으로, 양성공 초임을 125원에서 145원으로 인상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해 파업대오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어 13일에는 파업에 들어가지도 않은 9개 사업장에서 무기한 직장폐쇄를 단행한다.

중앙정보부가 조정에 나섰다. 9월17일 노사는 임금인상안에 합의했다. 면방 노동쟁의는 시작 115일 만에 중앙정보부의 조정으로 종결했다. 면방 쟁의는 중앙정보부 개입으로 쟁의가 종결된 사건이다. 노동문제를 치안이나 안보문제 같이 위협적으로 바라보는 태도의 본질이 드러난다. 또한 쟁의대상도 아닌 업체에까지 직장폐쇄를 단행해 노조의 파업에 대한 대응조치가 아니라 공격적·선제적 직장폐쇄의 본질을 보여준 것으로서 종업원을 감정적으로 적대시하며 생존권 박탈을 목적한 폭거로 규정할 수 있다.

대한조선공사 쟁의

1969년 7월2일 부산에 있는 금속노조 대한조선공사 조합원 1천768명은 임금인상 등 9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노동쟁의에 들어갔다. 노조가 내건 요구조건은 ①통상임금을 3월1일부로 56.87% 소급인상 ②단체협약 개정 ③상반기 상여금 200% 지급 ④임시공 퇴직금 지급 ⑤위해수당 지급 등이다. 노조는 노동쟁의 발생을 신고해 7월7일 부산지노위에서 쟁의 적법 판정을 받았다. 부산지노위는 임금인상 조정안을 제시했으나 사측이 거부해 결렬했다. 8월1일 노조는 전면파업에 돌입한다. 8월4일 부산시장이 2·3차 조정에 나서지만 사측은 경영수지 악화를 이유로 조정을 거부한다. 사측이 강경태세로 나가자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해 1천800여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 500여명은 8월19일 철야농성과 연좌시위를 벌인다. 노사 대립이 장기화하자 8월29일 부산시장이 다시 조정에 나섰다. 조정안은 ①사측은 즉각 직장폐쇄를 철회하고 7월분 노임을 지급할 것 ②사측의 이행을 전제로 노조는 파업을 종료할 것 등이다. 그러나 조선공사측은 조정안을 거부하고 금속노조는 이를 공개비판하며 회사에 조직적인 지원을 촉구한다. 이러는 동안 파업이 장기화해 외국에서 발주받은 선박의 건조작업이 중단되는 사태에 이르자 9월18일 보사부 장관명으로 긴급조정권을 발동한다. 노동법이 제정된 이후 최초로 긴급조정권이 발동된 것이다. 그런데 긴급조정권이 발동된 날 조선공사는 더욱 강경한 태도로 돌변해 허재업 지부장 등 16명의 노조간부를 해고한다. 중노위는 긴급조정권 발동에 따라 즉각 조정에 나서고 사측은 19일 직장폐쇄를 해제하고 부분적으로 작업을 재개한다. 9월27일 중노위는 조정이 실패하자 중재회부한다. 한편 조선공사는 조합원 사이에 벌어진 소란을 트집잡아 폭행 및 기물파손,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12명의 노조 간부들을 고발했고 경찰은 이들을 구속시켰다. 나아가 사측은 노동자들을 매수했고 노두홍 부지부장은 10월11일자로 일방적으로 쟁의를 취하한다.

조선공사 쟁의는 노동쟁의를 탄압하는 정부의 긴급조정권 발동과 사측의 불법적인 직장폐쇄, 폭력적인 탄압 및 노조간부 배신 속에서 노동자측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노동법 박사 (laborky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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