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자가면역질환인 ‘전신경화증’을 진단받았더라도 유해물질에 지속·반복해 노출됐다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작업환경측정 결과가 유해인자 노출기준 미만이라는 이유로 직업성 질병을 부정하는 자료로 사용해선 안 된다는 취지다. 법원은 업무관련성이 부족하다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도 상대적·주관적이라고 지적했다.

도장공정 업무 8년 만에 전신경화증

18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고법 행정7부(재판장 김대웅 부장판사)는 차량용 금속프레임 제조회사 B사의 생산관리자 A(44)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최근 1심을 깨고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A씨는 2009년 7월 B사에 생산관리자로 입사해 도장·용접 공정을 관리하다가 8년이 흐른 2017년 6월 ‘진행성 전신경화증’을 진단받았다. 전신경화증은 만성의 다기관 장애로 피부가 결합조직의 축적으로 두꺼워지고, 소화기·폐·심장 등 내부기관의 구조적·기능적 이상을 동반하는 질환이다. 자가면역질환으로서 면역 활성화, 혈관 손상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 정확한 발병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공단은 A씨의 요양 신청을 불승인했다. 유전적·환경적 위험요인만 고려될 뿐 발병원인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유다. “업무수행과정에서 유기용제에 노출됐을 것으로 보이나 유기용제 등 작업환경측정 결과 노출기준 미만으로 확인돼 업무관련성에 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를 근거로 삼았다.

보호구 미착용, 1심 “노출기준 이하” 기각

A씨는 2021년 2월 소송을 냈다. A씨측은 “약 8년 동안 중장비 도장·용접 등의 작업이 이뤄지는 공장에서 생산관리 업무를 했을 뿐만 아니라 작업자 결원시 직접 도장 보조작업과 주요 설비 유지·보수를 하면서 벤젠·톨루엔 등의 유기용제에 상당 수준 노출됐다”며 “연장·야간작업을 함께하며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에도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실제 A씨는 현장을 관리하면서도 직접 작업을 하기도 했다. 2015년 8월부터는 ‘불량 수리 업무’와 ‘프로믹스 세척·유지보수 업무’를 전담했다. 도료를 배합해 분사해 공급하는 ‘프로믹스’ 장치는 안에서 막힘이 생길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현장관리자라는 이유로 보호구가 지급되지 않아 유기용제에 노출됐다. 연장근로도 많았다. A씨는 하루 2시간씩 고정적으로 잔업했고, 매달 2번씩 토요일에 8시간 동안 일했다. 2016년 11월~2017년 2월 사이에 1주 평균 69시간 일한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1심은 업무상 질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소음을 제외한 용접 흄과 분진, 무기화합물이 모두 고용노동부 고시의 노출기준 이하로 확인됐다는 작업환경 측정 결과가 결정적이었다. 재판부는 “원고가 유해인자들에 업무상 질병을 유발할 정도로 상당 수준 노출됐다고 평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2020년 2월 역학조사 당시 설비가 일부 철거돼 직접 용접·도장 공정을 확인하지 못했는데도 2015~2018년 조사 결과를 근거로 연구원 결과를 신뢰했다.

2심 “조사 결과 부정확, 유기용제 반복 노출”

2심에서 판단이 뒤집혔다. 법원은 유해물질 노출기준 이하라는 작업환경측정 결과는 업무상 질병 판단의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명확히 했다. 재판부는 “노출기준 이하의 자료들은 측정이 이뤄진 당시의 작업환경을 나타낼 뿐”이라며 “원고가 근무하던 당시의 작업환경이나 정전·설비 고장 등 비정상적인 상황에서의 작업환경을 나타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노출기준 이하의 작업환경에서도 직업성 질병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에 관한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연구원은 A씨의 유기용제 누적노출 점수가 0.24점이라며 저노출군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역학적 연구에서 유기용제 노출수준이나 노출량을 정량적 또는 객관적 지표를 이용해 제시한 경우는 거의 없다”며 “노출확률·노출강도·노출빈도 등 누적노출 점수의 부여도 객관적 기준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각 항목의 점수도 다분히 상대적·주관적”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평소 관련성 있는 질환을 앓은 적이 없던 만 38세의 원고가 상병 발병과 의학적으로 관련성이 있는 유기용제에 노출됐다”고 설명했다. 보호구 미착용과 주 69시간의 장시간 노동도 영향을 끼쳤다고 봤다. A씨를 대리한 임자운 변호사(법률사무소 지담)는 “작업환경측정 결과의 한계점과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보고서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설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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