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만 18세 나이에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 입사해 약 15년간 근무하면서 유해물질에 노출된 채 야간 교대근무를 하다가 만성신장병에 걸린 노동자가 법원에서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았다. 법원은 관련 연구결과가 부족하더라도 지속·반복해서 노출됐다면 장애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과학적 근거가 미흡하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지 않는 근로복지공단 판정에 경종을 울렸다는 평가다.

식각 공정 클린룸에 갇혀 주야간 교대근무

12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4단독(장우석 판사)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퇴사한 A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지난 8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A(47)씨는 1995년 5월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해 2011년 2월까지 식각 공정(화학약품의 부식 작용을 이용해 웨이퍼의 특정 물질을 제거하는 공정)을 담당했다. 1999년부터 4조 3교대로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일했다. 2011년부터는 신제품 마스크(Mask) 공급관리업무를 맡았다.

작업환경은 유해물질 노출을 피할 수 없었다. 작업 과정에서 비소 등 중금속을 포함해 톨루엔·크실렌·트리클로로에틸렌·벤젠에 복합적으로 노출됐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2004·2007년 실시한 직업환경 측정 결과 식각 공정에서 유기·무기 화합물이 생성될 수 있다고 확인했다. 연구원이 2012년 발표한 ‘반도체산업 근로자를 위한 건강관리 길잡이’에도 불산·염산·과산화수소·일산화탄소 등이 유해위험 요인으로 표기됐다.

결국 입사 15년 만에 신체에 이상이 생겼다. 2010년 5월께 만성신장병을 진단받았다. 2006년 발병한 급성신우염 이전 별다른 신장 질환은 없었다. 2014년 출산한 이후 신장 기능이 급격히 나빠지며 ‘말기신부전’까지 진단됐다. 2016년 11월에는 유방암까지 걸려 수술받아야 했다.

역학조사서 “유해물질 노출 저조”

2018년 2월 퇴사한 A씨는 유방암은 산재요양이 승인됐지만, 신장병의 요양은 거부됐다. 공단은 “업무적인 요인으로 신장질환이 발병 또는 악화했다고 인정할 만한 과학적인 근거나 입증이 부족하다”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결과를 근거로 산재 불승인 판정을 내렸다. 연구원이 공단 의뢰를 받아 2019~2021년 실시한 역학조사 결과가 근거가 됐다. 연구원은 유기용제 노출 수준이 높지 않았을 것으로 평가했다. A씨는 2021년 9월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 감정의(직업환경의학과)는 작업환경이 신장병을 유발했을 소지가 있다고 소견을 냈다. 감정의는 “높지 않은 농도라도 적지 않은 기간 유해물질에 지속해서 노출됐으며, 만성 신장질환 진행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교대근무를 수행해 상병 발생 또는 악화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유해물질 노출량과 강도가 신장병을 유발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는 업무상질병판정위 다수 의견과 배치된다.

밀폐공간·보호구 미착용, 법원 “연구 부족 근거 안 돼”

법원도 업무상 질병을 인정했다. A씨가 작성한 환경수첩에 적힌 ‘트리클로로에틸렌 사용’이 근거로 작용했다. 장 판사는 “원고가 식각 공정 오퍼레이터를 담당하면서 신장질환을 유발하는 유기용제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상당해 보인다”며 “1995~2003년까지 유해인자 노출수준을 측정할 자료가 없고, 첨단산업의 특성상 유해물질 문제점에 관한 인식이 높아진 점을 보면 연구에서 확인되는 정도보다 중대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특히 유해물질 농도가 허용기준 미만이라는 연구결과만으로 신장병 유발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봤다. 장 판사는 “작업 당시 순간적으로 높은 노동의 화학물질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아울러 ‘밀폐된 작업장’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장 판사는 “사업장은 외부 공기 유입률이 낮아 유해물질이 순환하면서 다른 공정 작업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화학물질 보호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점도 꼬집었다.

주야간 교대근무도 신장질환에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했다. 여성노동자가 교대근무시 만성 신장질환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뒷받침됐다. 장 판사는 “교대근무로 인한 불규칙한 수면과 생체리듬 혼란이 상병 발병이나 진행을 촉진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장기간 근무하며 노출된 유해물질과 교대근무가 상승작용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법원 감정의 소견을 배척할 특별한 사정도 없다고 했다. A씨를 대리한 임자운 변호사(법률사무소 지담)는 “법원은 상병을 일으킬 수 있는 여러 유해물질에 복합적으로 노출된 사실은 확인되나 노출 ‘정도’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 간접사실을 통해 노출 정도를 추단할 수 있다고 봤다”며 “과학적 근거 부족을 이유로 업무관련성을 부인한 공단 처분이 산재보험제도의 목적과 대법원 판례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본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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