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타버린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을 바라보는 노동자의 뒷모습. <이재 기자>

통상 경찰은 보호할 대상을 등지고 선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 13명은 경찰의 등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을 노려보는 경찰을 마주하고 섰다. 한 노동자는 말했다. “더 이상 우리는 경찰의 보호 대상이 아녔어요.” 자본은 또다시 노동자를 ‘투사’로 만들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11일 오전 경북 구미시 구포동 한국옵티칼 공장을 찾았다. 이날로 225일째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들의 농성은 17일 현재 231일을 맞았다.

공장에서도 시청에서도 경찰은 노동자를 마주 섰다

법인 청산을 추진 중인 한국옵티칼은 공장 철거를 목적으로 지난달 7일 공장 진입을 처음 시도했다. 이날 오전부터 철거업체를 대동하고 철거 사무실로 쓸 컨테이너를 설치해야 한다며 공장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오후가 되자 경찰이 노동자를 마주 섰다. 3시간가량 이어진 대치는 사용자쪽이 컨테이너 설치를 포기하고 돌아서면서 종료했다.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한 노동자는 “현장 교육”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4일 큰 불로 불타버린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구미공장의 모습 <이재 기자>
지난해 10월4일 큰 불로 불타버린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구미공장의 모습 <이재 기자>

“사용자가 우리를 찾아오면 경찰은 우리를 보고 있어요. 열을 지어서. 우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우리를 막고 있는 것이죠. 지난달 구미시청을 찾아갔을 때도 경찰은 우리를 보고 있었어요. 우리가 저 사람들(시청 공무원 등)을 해코지할까 봐 출동한 거였어요. 시청 공무원들이 우리를 적대시하는 게 느껴졌어요. 왜 또 왔느냐는 눈빛과 말투죠.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나는 내 말을 들어달라고 온 건데…. 그 사람들도 우리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테니 지겨웠겠죠. 그렇지만 상처를 받았어요. 그런 게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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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숙씨는 "사용자쪽은 화재 뒤 공장 재건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이재 기자>

불탄 공장부지 안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소현숙(42)씨는 차오르는 숨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투사가 되기 이전, 그는 그저 성실한 노동자였다. 한국옵티칼에서만 16년을 일했다. 앞서는 다른 업체에서 일했지만 임신한 동료를 내쫓는 것을 보면서 미래를 그릴 수 없어 옮겼다. 한국옵티칼에서는 LCD 편광필름 외관검사를 했다. 편광필름의 외관상 결함을 찾고, 세척해 넘기는 일이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시간당 900장을 확인해야 할 때도 있었는데, 1장 평균 1분 안쪽으로 업무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됐다. 경영이 어려웠을 당시엔 포장업무로 옮기기도 했다. 업무가 바뀔 때마다 공장 1층과 2층을 오갔다. 자연히 건물이 눈에 익었다. 16년을 일했으니 오죽할까. 그는 “뉴스에서 공장 화재 장면을 보여줄 때 소방관들이 오가던 계단은 나도 일할 때 자주 이용했던 계단”이라며 “불타버린 휴게실이며 모두 10년 넘게 일하고 쉬었던 애착이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화재 뒤 공장 재건한다더니 꼭 한 달 만에 “청산”

화재는 지난해 10월4일 일어났다. 오후 5시께였다. 자욱한 검은 연기가 낙동강변으로 날아갔다. 이윽고 불길이 치솟았다. 소방관 260여명, 소방차 80대가 동원됐다. 공장은 9시간 동안 화마에 휩싸였다. 속수무책이었다.

11일 찾은 한국옵티칼 공장 전면은 깨어진 유리와 밖으로 쏟아진 부산물로 폐공장임을 웅변했다. 뒷면은 더 엉망이다. 공장 뒷면은 외벽까지 불에 타 골격만 남았다. 그을리고 녹이 슨 철근이며 나뒹구는 자재들이 보였다. 장마와 태풍을 거친 바닥엔 물이 고였다. 겉은 앙상했고, 속은 스산했다.

화재로부터 아직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공장 전면 주출입구에는 무재해기록판이 걸려 있다. 2022년 7월22일 시작해 100만시간을 목표로 한 무재해 시간은 1천248시간, 그러니까 화재가 난 지난해 10월4일에 무심히 멈췄다. 소씨가 말한 계단은 찾기 어려웠다.

한국옵티칼은 공장을 허물고자 하면서도 말은 달랐다. 소씨는 “(사용자쪽이) 재건 노력을 한다고 해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11월4일 공장을 철거하고 법인을 청산한다고 문자가 왔다. 그는 문자를 보고 밥이 얹혔다고 했다.

이열균씨는 다음달 결혼을 앞둔 평범한 노동자다. <이재 기자>
이열균씨는 다음달 결혼을 앞둔 평범한 노동자다. <이재 기자>

10년차 노동자인 이열균(36)씨는 “이익을 내고 있어 없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화재가 나기 직전까지 반년간 회사는 신입사원 100명을 더 뽑았다. 10월3일 첫 출근한 노동자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공장 문을 닫을 것이란 상상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용자쪽은 그에게 불을 질렀다. 희망퇴직을 말했다. 이씨는 “청산을 담당한 노무사가 노동자들 다 나가라는 식으로 행동했다”고 말했다.

일부는 평택공장 이전을 떠올리기도 했다. 배현석(39)씨는 “법인은 달라도 평택에 같은 자본(일본 닛토덴코)의 한국니토옵티칼 공장이 있었고 교류도 잦았다”며 “막연히 최소 인원은 사용자쪽이 살길을 마련하겠지 했는데 오판이었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당황했고, 혼란스러워했다. 10년 넘게 굴곡진 공장 운영을 함께하며 버텼던 그들이다. 15년간 공장에서 일한 정나영(43)씨는 “삶을 일군 곳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천막을 쳤다.

연이은 철거 시도, 노동자는 투사가 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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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나영씨는 공장 화재 뒤 "삶을 일군 곳이 사라졌다"고 안타까워 했다. <이재 기자>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는 1월30일부터 천막을 치고 농성에 돌입했다. 화재 뒤 사용자쪽은 모두 공장을 빠져나갔다. 공장과 연결된 기숙사와 사무동, 식당은 텅 비었다. 완전히 불타버린 설비에서 반출할 자재도, 기계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근 다른 업체가 공장을 증설하겠다며 한국옵티칼 부지를 탐내다 보니 한국옵티칼은 적극적으로 공장을 철거하려 하고 있다. 공장을 지킬 이유는 오로지 노동자에게만 있었다. 지난 10여년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이 앞으로 평범하게 살려면 공장이, 일터가 필요했다.

13명이 공장에 남은 것은 그래서다. 이씨는 평범하고 성실했던 사람을 한국옵티칼이 사지로 내몬다고 말했다. 그는 “남은 노동자들이야말로 공장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이라며 “나는 경력이 비교적 짧지만 사용자가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대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열균씨도 평범한 삶을 살 예정이었다. 그는 4년 정도 교제한 여자친구와 오는 10월 결혼한다. 농성 중인 처지에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장인·장모님께 잘 보였나 보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공장에서도 마당발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정이 많았던 탓인지 다른 동료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못하고 함께 남았다.

이들에게 지난달 7일 사용자와 경찰의 ‘침탈’ 시도는 강렬한 기억이다. 이후에도 사용자쪽은 남은 노동자를 수차례 위협했다. 8월8일 오후 공장 진입을 시도하다 30분 만에 철수했고 이튿날 오후엔 구미시청이 태풍 ‘카논’ 안전 진단을 한다며 공장에 들어오려 했다. 이후에도 같은달 11일, 16일, 22일, 23일 그리고 지난 5일, 7일 연이어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8일에는 물을 끊었다.

바뀌니 알게 된 것들, 연대했어야 한다는 자책들

평범했던 노동자들은 점점 투사로 변했다. 소씨는 “원래 모르는 사람을 어려워하고 공장에서 일할 때도 아는 사람들하고만 인사하고 지냈는데 투쟁을 시작하고 나니 연대도 많이 가고 인사도 해야 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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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석씨는 "공권력은 자본의 편을 들더라"고 말했다. <이재 기자>

투쟁을 시작하니 많은 것들이 보였다. 배씨는 공권력의 속내를 알았다. “공권력이 자본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몰랐죠. 연대하러 온 동지들이 왜 윤석열 정권을 말하고, 정치를 이야기하는지 처음엔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런데 겪어보니 모두 연결됐더군요. 자본을 위해 구미시청과 경찰이 지원을 오는 꼴이었어요. 공권력이 중립적이라면 우리가 구미시청에 갔을 때 우릴 지켜줬어야죠. 그런데 아니었어요. 공권력이 자본의 편임을, 그래서 노동자 곁에는 노동자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제는 우리도 연대를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투쟁을 시작하고 초반에는 연대를 가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공장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이해합니다. 그때 왜 자주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연대해준 동지들에게 미안해서라도 투쟁을 접을 수 없습니다.”

사용자가 공장에 물을 끊었지만 손을 맞잡은 노동자에게 위협으로 가닿지는 못했다. 8일 단수 이후 단조로운 농성 노동자의 하루일과 물 긷기가 추가됐다. 이날도 점심을 먹은 뒤 배씨를 비롯한 노동자 3명이 노조 차량을 타고 인근 공원에 가서 20개 남짓한 물통에 물을 한가득 채워 왔다. 연대를 위해 머물고 있는 차헌호 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장이 ‘전수’한 노하우다.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도 투쟁 중에 단전·단수를 겪었다.

물을 긷는 투사들은 그렇지만 시민의 눈치를 봤다. 민원을 넣으면 물을 길을 수 없으니 어떡할까 고민했다. 햇살을 피해 공원 정자에 모인 시민들이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다. 노동자가 아니라 조끼를 보는 것도 같았다. 공장을 지키는 일은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의 시선도 이겨내야 하는 일이다. 언제 투사가 돼야 할지 모르는 시대, 시민의 연대가 절실했다. 다행히 단전은 막았다.

해고 노동자 가해자 만드는 현실의 기막힘

이들은 이길 수 있을까. 공권력과 지자체를 등에 업은 외국계 투자자본을 규제하는 법은 없다. 외국인투자 촉진법(외국인투자법)은 투자를 촉진하는 내용이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외국계기업에 대한 특혜는 허용해도 규제는 허용하지 않는다. 게다가 원래 우리나라에서 기업 관련한 법률은 청산에 별 제한을 두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노동계는 말한다. 청산에 따라 거리로 나앉는 노동자에 대한 고려는 없다. 한국옵티칼도 마찬가지다. 지회 투쟁을 함께하는 배태선 노조 구미지부 교육국장은 “한국옵티칼은 10년 가량 적자 없이 순익을 내왔는데 화재에 따른 화재보상금이 최대 1천300억원에 달해 재가동 없이 문을 닫으려는 것”이라며 “이런 나쁜 선례를 용인하면 향후 외국계기업은 조그만 사정변경에도 철수하고 말 것”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사용자쪽은 노동자의 전세보증금과 주택 등 자산 4억원에 대한 가압류를 신청했다. 노동자들은 화재로 일순간 일자리를 잃고 해고됐고, 이어 청산을 결정한 사용자에 의해 공장을 차고앉은 가해자가 됐다. 1년도 안 된 사이에 세계가 변했다. 이런 변화는 이들이 유니폼 입던 노동자에서 조끼 입는 투사가 된 것보다 극적이다.

이들이 원하는 건 공장 재가동이다. 10년 삶의 터전을 되돌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평택공장으로의 전보조치하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화재로 공장이 불탄 뒤 구미공장 물량은 닛토덴코의 또 다른 한국법인인 한국니토옵티칼이 운영하는 평택공장으로 갔다. 노동자만 못 갔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질 수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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