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며 정년을 연장하더라도 임금삭감 폭이 크다면 무효라는 법원 판결이 나와 파장이 일고 있다. 임금피크제는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법)을 위반해 위법하다는 취지의 판결이 이어지는 추세다. 판례가 축적되면 형태와 상관없이 임금피크제의 효력이 크게 후퇴할 가능성까지 점쳐진다.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와 관련한 지난해 5월 대법원이 세운 법리가 하급심 판결에서 인용하는 사례가 늘어나 임금피크제가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기존 연봉 300%에서 최대 225% 삭감

이번 사건은 박근혜 정부가 2015년 5월 ‘공공기관 임금피크제 권고안’을 발표하며 임금체계 개편을 추진한 것이 발단이 됐다. KB신용정보는 2016년 2월 사무금융노조 KB신용정보지부(지부장 강정권)와 단체협약을 통해 정년을 만 58세에서 만 60세로 연장하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전체 직원 126명 중 26명(지부 조합원 13명)이 이에 해당했다.

나이 만 55세에 도달해 임금피크제가 적용된 직원은 직전 연도 연봉의 45~70%를 성과(S~D 6등급)에 연동해 받게 됐다. 임금삭감의 정도가 컸다. 임금피크제 시행 전 기존 정년인 만 58세까지 3년간 연간 보수 총액의 약 300%를 받았다. 하지만 임금피크제 도입 이후 매년 최고등급을 받았을 때만 기존과 같은 5년 동안 300%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도래했다. 만약 성과평가에서 최저등급(D)을 받으면 기존 연봉의 225%까지 삭감된다.

직군마다 성과 연동도 달랐다. 마케팅 직군의 경우 최고등급(S)을 1번 이상 달성하거나 2번 이상 두 번째 등급인 A+를 받았을 때만 기존 보수 대비 300% 이상의 임금을 받을 수 있다. 행정직은 모두 S등급을 달성한 경우에만 같은 금액을 받는 구조다. 심지어 상대평가에 따르면 S등급을 달성한 선임직원은 10%에 불과하고 S~A 등급을 합쳐도 25%에 그쳤다.

그러자 신용정보 전·현직 직원 A씨 등 4명은 임금피크제가 고령자고용법에 위반해 무효라며 2020년 8월 소송을 냈다. 고령자고용법 4조의4 1항은 임금 지급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노동자를 차별하지 못하도록 정하고 있다. 이들은 “임금피크제는 아무런 보상 조치 없이 원고들의 임금을 대폭 삭감하는 내용으로 사회통념상 합리성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연봉 확 깎여 손해, 고령자고용법 위반”

법원은 노동자들 주장을 받아들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재판장 정회일)는 지난 11일 임금피크제는 강행규정인 고령자고용법을 위반해 효력이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면서 임금피크제 기간만큼의 미지급 임금과 퇴직금 5억3천700만원을 지급하라고 주문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임금피크제는 개별적인 업무성과 등에 관계 없이 근로자가 일정한 연령에 이르렀다는 사정만으로 임금을 감액하는 것”이라며 “연령을 이유로 근로자 임금에 차등을 두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주목할 부분은 판단 근거다. 재판부는 지난해 5월 대법원 법리를 차용했다. 당시 대법원은 ‘한국전자기술연구원(옛 전자부품연구원) 사건’에서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를 무효라고 판단했다. 고령자고용법이 ‘강행규정’이며 이에 반하는 단체협약·취업규칙·근로계약은 무효라고 명시했다. 임금피크제 무효 여부의 기준도 세웠다.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의 타당성과 불이익 정도, 임금피크제로 감액된 재원이 본래 목적을 위해 사용됐는지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도 대법원 법리를 가져왔다. 재판부는 “대법원 판결은 이른바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 법리지만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 도 하나의 참고기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금피크제 시행으로 근무기간이 2년 늘었는데도 만 55세 이후로 지급받을 수 있는 임금 총액은 오히려 삭감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할 때 손해의 정도도 결코 적지 않다”고 강조했다.

임금삭감에 상응하는 사측의 조치도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회사는 임금피크제가 도입된 지 2년이 지난 2018년 8월부터 사건 처리 건수에 따른 인센티브를 지급했지만, A씨 등은 약 10만원 정도만 받은 적이 있었다. 재판부는 “(인센티브 지급은) 임금피크제와 무관하게 업무를 독려하기 위한 경영적 판단에서 지급된 것에 불과하다”며 “임금피크제 적용에 따른 임금삭감의 불이익을 보전하기에 충분한 대상 조치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법조계 “‘정년유지형’ 대법원 법리 정착 추세”

법원 판단의 결정적 이유는 임금피크제로 임금삭감이라는 불이익이 초래됐는데 회사에서 업무량이나 업무강도를 줄이는 등 불이익에 상응하는 조치는 적절하게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사 사건에서 정년을 연장했더라도 아무런 보상 없이 일방적으로 임금을 깎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는 취지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의 대법원 법리가 정착되는 경향이라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노동자가 패소했던 KT사건 재판부도 대법원 법리를 정년연장형의 참고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이와 관련해 김두현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는 “대법원 판결은 ‘정년유지형’만 한정해 적용된다는 취지로 언급한 바가 없다”며 “실제 법리를 보더라도 ‘정년연장형’만 적용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정승균 변호사(공동법률사무소 일과사람)도 “대법원과 유사한 기준으로 ‘정년연장형’을 무효로 판단했다는 점에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로 향후 소송에서 정년 연장에도 임금삭감에 대한 대상조치가 부족하다면 임금피크제 효력이 상실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KB신용정보 노동자들을 대리한 김기덕 변호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는 “이번 판결은 노동현장에서 고령자의 임금을 삭감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된 임금피크제의 적법성 또는 정당성에 깊은 의문을 던진 것”이라며 “사용자에게 임금피크제의 도입과 적용은 신중해야 하며 반드시 불이익이 크지 않고 불이익에 상응하는 대상 조치를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기업 87% ‘정년연장형’ 유사소송 잇따를 듯

기존에 노동자들이 패소했던 소송에도 파장이 예상된다. 전력거래소·KT·국민연금공단·삼성화재 사건은 모두 사용자가 승소했다. 아직 확정된 사건은 없어 상급심에서 뒤집힐 가능성도 존재한다. 또 금융업계에서 KB국민은행·신한은행·KB증권 노동자들이 소송을 냈고, 지난해 10월 이랜드리테일의 판매직·전문직 노동자들이 유통업계 최초로 소송을 제기해 결과에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다. 고령자고용법이 개정된 2013년 이후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사업체 7만6천507개 중 87.3%는 ‘정년연장형’을 선택했다. 줄소송이 이어질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KB신용정보 노동자들은 회사가 임금피크제를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비판했다. 강정권 KB신용정보지부장은 <매일노동뉴스>에 “조순옥 대표는 소송이 시작되자 임금피크제가 무효화될 경우 60억원 이상의 재무적 부담이 발생하므로 직원들이 힘을 모아줄 때라며 전 직원에게 호소문을 보냈다”며 “지난 5년간 지속적인 임금피크제 개선 요구에도 회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밝혔다. 또 회사가 신규채용에 소극적으로 대응해 임금피크제로 감액된 인원도 채워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KB금융지주가 KB신용정보를 KB카드 자회사로 전환하려고 시도해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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