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용노동부 유튜브 채널 갈무리

“기업이 자율적으로 안전보건관리하라는 것은 규제완화가 아닙니다. 기업에 맡는 규제를 법령 수준으로 준수하라는 의미죠.”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율과 의미상으로는 정반대에 있는 규제를 합쳐 이를 ‘영국식 자율 규제’라고 호명했다. 고용노동부가 10일 오후 서울 중구 로얄호텔에서 주최한 ‘지속가능한 중대재해 예방체계’ 토론회에서다. 이번 토론회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발표를 앞두고 열린 마지막 토론회다. 노동부는 왜 지금 ‘영국식 자율 규제’를 주목하는 것일까.

영국 산업재해 획기적으로 줄인 ‘로벤스 보고서’

전 교수가 ‘영국식 자율 규제’를 꺼내 든 것은 1970년 영국에서 산업안전 혁신을 위해 만든 로벤스 보고서 때문이다. 영국 노동당 의원과 노동부 장관 등을 지낸 알프레드 로벤스가 1972년 작성한 ‘로벤스 보고서’는 1960년대 영국에서 대규모 중대재해가 잇따르자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작성됐다. 현재 영국 안전보건 법제의 근간을 이룬다.

전 교수는 “1974년 보고서 내용을 영국 의회가 산업안전보건 입법에 적극적으로 수용해 집행한 결과 영국은 지난 50년간 연 1천명의 사고사망자가 200명대로 줄었다”고 말했다. 전 교수에 따르면 로벤스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는 ‘자율 규제’다. 보고서는 기존 영국의 산업안전보건 법·제도의 문제로 너무 많은 조항과 복잡성, 파편화된 행정 집행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정부의 네거티브 방식의 규제로는 안전과 보건의 진전에 극심한 한계가 있다”고 선언한다. 대안으로 자율 규제 시스템을 제시했다. 정부가 시행하는 안전보건 관련 규범에 준해 사업주가 자율적으로 만든 행위 규범의 이행도 법령 수준으로 보자는 것이 ‘자율 규제’ 개념이다.

전 교수는 “정부가 유해위험요인에 대한 표준적인 관리 기준을 아주 자세히 만들지만 영국 기업들은 이것을 자신의 사업장 특성에 맞게 변형할 수 있다”며 “예컨대 추락방지 발판에 대한 정부가 표준을 일정 크기로 규정한다면 사업장에서 특성에 맞게 크게 할 수도 있고, 작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대신 사고가 나면 영국 기업들은 이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자율 규제를 만드는 데 상당히 심혈을 기울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라는 개념이 안전보건 규제를 완화해 주는 뜻으로 오염돼 있다.

“자율 규제에 맞는 사법 기준, 이미 나왔다”

전 교수는 삼성중공업 중대재해에 대한 대법원의 지난해 9월 판결을 주목했다. 2017년 4월30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골리앗 크레인과 지브크레인이 충돌해 6명이 사망하고 25명이 상해를 입은 사건이다. 1심 법원은 조선소장을 비롯한 책임자들에게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조치의무 및 산업재해예방조치의무 위반죄, 업무상과실치사상죄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법에서 명문화한 규정을 위반한 것이 없다는 이유다. 현행법령에는 골리앗 크레인과 지브크레인이 충돌할 것을 고려해 만든 안전보건 규정은 없다. 때문에 이들의 충돌을 방지하거나 작업자를 보호하는 규정도 없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안전보건규칙을 획일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안전조치를 강조했다. 형식적으로 규칙을 준수했다고 법령 이행에 따른 면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대법원의 판단은 로벤스 보고서가 제시한 자율 규제와 상통한다”며 “지금부터라도 ‘진정한 자율’이라는 철학을 정책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안전공학)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경영책임자가 형사처벌을 피하는 것만이 초미의 관심사가 돼 버렸다”며 “공포 마케팅과 묻지 마 컨설팅으로 기업의 안전역량과 산재예방 능력은 도리어 뒷걸음질 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기업조차 체계적인 안전역량을 향상시키기 보다 당장 형사처벌을 피하는 데만 급급해 자율안전이 한가로운 일이 됐다는 지적이다. 정 교수는 △산재예방을 위해 각 주체의 위상과 역할에 맞는 의무를 부과하는 것 △중소기업 재해예방사업 실효성 강화 △재해원인조사 및 재발방지 대책 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노동부는 이번 토론회에서 나온 의견들을 수렴해 이달 중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할 예정이다. 권기섭 차관은 이날 토론회 인사말에서 “정부는 기업이 안전보건관리시스템 구축과 이행에 집중할 수 있도록 관련 법령과 제도를 정비해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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