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SK하이닉스에서 반도체 설계업무를 하는 연구직 장호인(가명)씨는 오전 5시 눈을 뜬다. 아침 수영을 하고 7시40분 정도면 출근한다. 그렇지만 장호인씨의 하루 근무시간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SK하이닉스는 2020년까지 정해진 근무시간이 있었다.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3시30분까지 집중근무시간(코어타임) 제도를 운영했다가 이를 폐지하고 하루 중 4시간만 사내에서 근무하면 되는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다. 최근에는 이마저도 아예 없애고 2~4주 단위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했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지 주 40시간만 일하면 된다. 장호인씨는 “하루 8시간 통상근무를 했을 때는 늘 쫓기고 눈치도 많이 보였는데 지금은 자유롭게 일하면서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프리랜서 IT개발자인 박사남(가명)씨도 정해진 근무시간은 없다. 하지만 늘 시간에 쫓기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박씨는 아침 7시30분쯤 눈을 떠 8시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업무를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한 업무는 자정을 넘겨 이튿날 새벽 2시쯤 마무리된다. 주말에도 적게는 3시간, 길게는 8시간을 일한다.

“업계에서 연말연초에는 거의 일이 없고 보통 3월부터 10월까지만 일이 있는 편이에요. 일이 있을 때 최대한 해야죠. 요즘 프로젝트 세 개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어서 더 정신이 없어요. 온전히 프로그램 개발만 하는 게 아니라 업무를 위한 컨설팅이나 미팅도 하기 때문에 정말 바빠요.”

프리랜서지만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만 일을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갑자기 고객에게서 호출이 오면 친구들과 술을 먹다가도, 가족여행을 온 휴가지에서도 급하게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않다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이다. 하지만 하루 24시간이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은 아니다. 시간을 ‘자원’으로 본다면 시간에도 금수저와 흙수저가 있다. 노동시간만으로는 시간의 불평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필요한 개념이 ‘시간빈곤’이다.

시간빈곤은 임금노동이나 가사·돌봄으로 일하는 시간은 길고 여가나 자유시간은 부족한 양적인 측면과 시간사용의 자기결정권, 재량권이 부족한 질적인 측면을 나눠서 볼 수 있다. 노혜진 KC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시간의 절대적인 양으로 시간빈곤을 정의하면 시간의 질적인 측면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며 “원하지 않는 시간에 어딘가에 호출되는 경우, 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언제 소환될지 모르는 경우, 시간이 조각나 흩어져 있는 경우처럼 내가 통제하는 시간이 부족한 측면까지 함께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시간은 돈(소득)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동시간 때문에 자유시간이 부족하면 타인의 노동을 구매해 자신의 시간 사용을 조정할 수 있다. 반대로 소득을 위해 시간을 희생하는 소득·시간 ‘이중빈곤’에 갇히기도 한다.

그래서 시간 불평등은 성별과 연령, 소득과 고용상 지위에 따라서도 위계화된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9 to 6’ ‘주 5일’ 같은 표준적인 노동시간에서 멀어질 뿐 아니라, 시간 사용에 대한 자기결정권도 줄어든다.

오전 9시까지 출근하는 직장인들은 쿠팡에서 주문한 장바구니를 아침 7시 전에 받는다. ‘쿠팡친구’인 김수형(가명)씨는 전날 밤 9시에 출근해서 다음날 7시에 퇴근한다. 심야노동을 하지만 자신이 원할 때 휴게시간을 사용할 수도 없다. 새벽 1시에 1시간 동안 배송프로그램이 정지되면서 ‘강제 휴식’이 주어진다. 일종의 피시오프(PC-OFF)지만 실제로는 물류캠프로 복귀해 물건을 적재하는 시간으로 쓰인다. 쉬지 못 하는 것이다. 가족과 주말을 함께 보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월급제인 쿠팡친구와 다르게 배송건당 수수료가 지급되는 ‘퀵플렉스’가 도입된 이후 주 2회 휴무일이 평일로 사실상 바뀐 탓이다.

서울대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는 최순희씨의 시간은 돌보는 환자에 종속돼 있다. 환자가 자는 시간이 최순희씨의 유일한 휴게시간인데 이마저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푹 잘 수 없다.

“중환자를 맡으면 밤에 서너 시간도 푹 잠들 수가 없어요. 특히 아픈 환자들은 밤에 잠을 못 자는 경우가 많아서 더 힘들죠. 가뜩이나 작은 병실 보호자 침대가 더 작아지고 있어서 늘 쪼그리고 새우잠을 자거든요. 그래서 병원 밖에서 쉬는 날은 그냥 대자로 누워 있어요.”

‘한국 노동시간의 계층화에 대한 연구’ 논문을 쓴 신영민 연구자는 “시간당 임금이 증가할수록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감소한다”고 설명한다. 고임금-표준시간(주당 평균 41.4시간), 중위임금-장시간(주당 평균 58.3시간), 저임금-단시간(주당 평균 21.7시간)으로, 소득에 따라 노동시간의 층위가 나뉜다는 것이다. 신 연구자는 “특히 시간빈곤 상태의 여성, 그중에서도 가구소득이 낮고 단순노무·서비스·판매직 종사자일수록 비사회적인 시간인 야간·주말 노동시간이 길어진다”며 “상대적으로 남성의 노동시간대가 정형화돼 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규모조차 정확하게 추산하기 힘든 특수고용직이나 프리랜서 같은 비정형 노동자의 시간빈곤은 제대로 된 연구마저 없는 형편이다.

근기법상 근로자만 적용 52시간제, 시간불평등 커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연간 노동시간은 2020년 1천908시간이다. OECD 회원국 평균(1천687시간)보다 여전히 221시간 오래 일한다. 하지만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이 감소추세라는 점은 확실하다. OECD 기준으로 한국 연간 노동시간은 2018년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 시행 이듬해인 2019년(1천993시간) 처음으로 2천시간 밑으로 떨어졌다. 과연 장시간 노동 체제에 균열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김세정(가명)씨는 지난 1월31일까지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에서 방영하는 콘텐츠 음향을 후처리 작업하는 포스트프로덕션에서 일했다. 이 회사는 서류상으로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5명 미만 사업장이다. 출근시간은 10시로 정해져 있지만 퇴근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구인공고에도 “탄력적 근무”라고 적혀 있었다.

“일이 늘 많으니까 아침 10시까지 와서 밤 10시쯤 나갈 때가 많은데 막차를 탈 수 있으면 운 좋은 날이죠. 회사 사람들이 집에 들어가서 자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라고 세뇌하듯이 이야기해요.”

회사에 공식적인 퇴근시간이 없는 것처럼 빨간날(공휴일)도, 연차도 없다. 그렇게 주 6일 출근하지만 세금을 제외하고 한 달 183만원이 손에 쥐는 전부다. 김세정씨의 업무시간과 업무량은 OTT 플랫폼에서 정하는 마감시간에 따라 좌우된다. 보통 작업을 마치면 이틀 후 방송되는데, 때때로 당일 방송에 나가거나 일주일 뒤에 나가는 경우도 있다. 양적·질적 측면에서 모두 시간빈곤 상태인 김세정씨에게 주 52시간 상한제나 연차휴가가 보장되는 근기법은 먼 나라 이야기다.

주 52시간 상한이나 노동시간 유연화 같은 노동시간 정책이 일부 노동자에게 작동하면서 시간빈곤 격차는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혜진 교수는 “노동시간단축이 양적 시간빈곤에 대한 대책이라면, 유연근무제도는 가용할 시간이 부족한 이들에게 질적인 측면에서 대응하는 제도”라며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그 혜택을 받는 집단의 범위가 한정돼 있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노혜진 교수가 통계청의 생활시간조사를 토대로 1999년부터 2019년까지 20년간 근로형태별로 시간빈곤을 분석했을 때 임금노동자와 비임금노동자 간의 시간불평등이 더 심화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임금노동자의 유급노동시간은 1999년 하루 평균 450.8분에서 2019년 341.7분으로 109.1분 줄었다. 반면 자영업자와 무급가족종사자, 임시일용직 등 비임금노동자는 같은 기간 408.9분에서 357.3분으로 51.6분 감소에 그쳤다.

임금노동자의 경우 주 5일제가 도입된 2004년과 주 52시간 상한제 시행 이후인 2019년 큰 폭으로 줄어들었는데 비임금노동자는 변동 폭이 그만큼 크지 않았다. 노혜진 교수는 “과거에는 시간빈곤에서 성별이 중요한 키워드였다면 이제는 종사상 지위나 근로형태가 불평등을 심화하는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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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일과 삶의 경계
24시간 ‘온 콜’ 대기

특히 노동관계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비정형·플랫폼 노동의 확산은 시간불평등의 지렛대가 되고 있다. 플랫폼에 대한 경제적 종속성은 시간의 종속성을 전제로 한다. 배달라이더 김정수(가명)씨는 “언제든지 원하면 일을 쉴 수 있다”며 노동시간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씨는 콜이 들어오는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콜(주문)을 한 번 안 받으면 업무량이 확 줄어드는 것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콜을 한 번 건너뛰면 한참 동안 다음 콜이 들어오지 않아 길바닥에서 보내야 해요. 이렇게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으면 자괴감이 들죠. 쉬지 않고 콜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콜을 받아야 콜이 더 잘 들어오는 알고리즘이니까요.”

근로계약이 아닌 수수료나 도급비로 소득이 산정되는 이들은 일과 삶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24시간 ‘일할 수 있는’ 대기상태가 된다. 주로 공공기관의 홍보대행 프리랜서로 일하는 정예린(가명)씨는 스스로를 ‘틈새 노동자’로 부른다.

“공공기관들은 시간이나 비용 측면에서 자기들이 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 일들을 우리에게 주죠. 거기에 맞춰야 하는 우리는 틈새 노동자예요. 적절한 노동시간 분배나 상한 같은 개념보다는 주어진 기간에 맞게 스스로를 세팅하는 체계라고 생각해요.”

정예린씨는 “일이 없어 시간이 많으면 오히려 불안하다”며 “도태되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무리해서 일을 할 때도 있다”고 말한다.

여가시간마저 업무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변질된다. 13년차 보험설계사 조민수(가명)씨는 최근 골프도 배우고 캘리그라피도 배웠는데 선뜻 ‘내 취미’라고 말하기는 애매하다고 했다.

“골프는 고객과 접점을 만들려고 시작한 운동이고 캘리그라피는 고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더 예쁘게 만들려고 배웠어요. 비누나 향수 만들기도 내가 좋아해서 배웠다기보다는 고객에게 선물하려고 일부러 시간을 들였죠. 주로 오전에 이런 수업을 듣고 출근해서 똑같이 업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시간이 부족해요.”

특수고용직 자유시간 주당 1.5시간 적어
코로나로 특수고용직 가사·돌봄시간 2배 증가

특수고용 노동자의 여유시간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더 줄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대면서비스에 집중돼 있는 특수고용 노동자의 유급노동 시간은 줄었지만 가사·돌봄 같은 그림자노동 시간이 늘어난 탓이다. 5만명을 대상으로 5년마다 실시하는 안전보건공단의 근로환경조사는 자가기입 방식으로 노동관련 시간과 가사·돌봄시간을 조사하기 때문에 일반임금노동자와 특수고용 노동자의 시간빈곤 정도를 비교해 볼 수 있다.

학계에서는 1주 168시간에서 ‘노동관련 시간(업무·출퇴근·부업)+가사·돌봄시간(자녀양육시간, 요리·집안일, 노인·장애가족 돌봄)’을 뺀 자유시간을 기준으로 시간빈곤율을 계산한다. 2020년 임금노동자의 자유시간은 116시간으로 특수고용직 자유시간 114.5시간보다 1.5시간 더 길다. 2017년과 비교해 특수고용직의 노동관련 시간은 줄고 가사·돌봄 시간이 2배 가까이 늘어난 데 따른 것이다.<그래프 참조>

 

노동기본권을 박탈당한 비정형 노동자의 시간빈곤을 지금처럼 방치한다면 ‘위험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경고음이 곳곳에서 울리고 있다. 쿠쿠정수기 수리기사 김민균(가명)씨는 2017년 12월 일하던 중에 쓰러져 뇌출혈 진단을 받고, 병세가 악화되면서 2019년 파킨슨병까지 얻게 됐다. 쿠쿠홀딩스와 위탁계약서도 쓰지 않고 프리랜서로 일했던 그는 주 6일 동안 하루 평균 10~11시간을 업무에 쏟아부었다. 김씨가 쓰러지기 7개월 전 같이 일하던 동료기사가 구안와사로 쓰러지면서 업무량이 크게 늘었다. 택배기사처럼 정수기 수리기사도 과로로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최근 법원은 프리랜서 쿠쿠정수기 수리기사의 산재를 인정하는 판결을 처음 내렸다.<본지 2022년 5월25일자 2면 “프리랜서 ‘쿠쿠 수리기사’ 산재 인정됐다” 참조>

김포공항 특수경비원으로 일하는 김우진(가명)씨는 3조2교대로 ‘주주야야비휴’ 근무를 한다. 한 달에 한두 번은 휴무일에 대체근무를 자처해 부족한 임금을 벌충한다. 그는 “교대근무 탓에 친구들은커녕 30년 지기 직장동료도 못 만난 지 오래”라고 말했다. 그는 미용사로 일하는 아내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 나누는 것도, 아이들과 나들이를 가는 것도 쉽지 않다. 시간빈곤은 노동시간 위계화뿐만 아니라 돌봄시간에서 격차를 만들고 사회활동 영역에서도 불평등을 유발하며 다시 되물림되기도 한다.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시간 재분배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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