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노동존중 사회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국정기조다. 그간 노동정책은 고용노동부 같은 중앙정부 차원의 정책으로 이해됐다. 민간영역에 대한 직접적인 규제 권한이 없는 지방정부는 특히 지역 노동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적었다. 이를 바꿔 낸 곳이 서울시다. 처음으로 공무직이라는 표현을 도입하며 비정규직 대책을 추진하고, 노동이사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이런 노력은 고스란히 중앙정부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은 어떨까. 눈에 띄는 행보를 보여주는 이재명 지사의 경기도와 김경수 지사의 경상남도가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지만 그 외 다른 지역 노동정책에 대해서는, 특히 우리나라 17개 광역 지방정부 전체의 수준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방정부 노동정책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한 시도를 했다. 다양한 지역 가운데 지방정부 노동정책이 두드러지지 않은, 그러나 꼭 필요한 지역인 전주시와 군산시를 찾아 현지 일자리·고용현황을 살펴보고 지방정부의 노동정책의 부재 상황을 살폈다.
다양한 지표를 통해 17개 광역 지방정부의 노동정책을 정량평가했다. 엄밀한 평가로 보기는 어렵지만 노동존중 사회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 아래 지방정부는 어떤 방식으로 이를 시현하고 있는지 자그마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길 바란다. <특별취재팀 : 김미영·이재·어고은 기자>

<글 싣는 순서>
① ‘전북’에서 본 지방 노동정책 공백과 가능성
② 노동정책도 수도권-비수도권 양극화
③ 광역·기초 17곳만 공무직 조례
④ 특별기고 : 채준호 전북대 교수
⑤ 특별기고 :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

“미련을 버리기 쉽지 않네요. 그런데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고….”

‘군산 토박이’ 김진영(40·가명)씨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파일이 담긴 이동식저장장치(USB)를 손에 쥔 채 지난 24일 오후 전북 군산시 조촌동 고용위기종합지원센터를 찾았다.

6년 전 한국지엠 하청노동자였던 김씨의 깊은 한숨

2018년 4월 군산시가 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된 뒤 같은해 6월 설립된 고용위기종합지원센터는 군산시민들을 대상으로 구직과 재취업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곳이다. 김씨는 군산대에서 시설관리직으로 일하다 지난 2월 말 일자리를 잃었다. 도급업체 변경 과정에서 고용승계가 이뤄지지 않아 3개월째 실직 상태다. 그는 고민이 깊었다. 시설관리 직군은 기능사 자격증을 요구해 전보다 취업 문턱이 높아졌다. 생산직 일자리는 당장 지원은 가능하지만 최저시급을 주는 곳이 대부분이다. 기존 급여 수준인 월 250만원에 대한 ‘미련’은 쉽사리 지원서를 내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았다.

사실 그는 6년 전만 해도 생산직 노동자였다. 한국지엠 1차 협력사 노동자였던 김씨는 2015년 지엠 본사의 유럽시장 철수에 따른 군산공장 물량감소 여파로 일터에서 쫓겨났다. 2018년 5월 군산공장이 문을 닫기 전부터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인소싱’으로, 협력업체 노동자는 희망퇴직·정리해고 등으로 위기에 가장 먼저 휩쓸려 갔다.

당시 군산지역 생산직 일자리에 대한 미래가 밝지 않다고 절실히 느낀 김씨는 아예 직군을 바꿔 생계를 이어 왔다. 그런데 6년 만에 또다시 직군 전환에 내몰리게 된 셈이다. 새만금 국가산업단지에 입주해 다음달 완공예정인 ㈜에디슨모터스에도 시설관리직 지원서류를 냈다. 70여명(생산직·사무직 포함)을 뽑는 자리에 1천명이 몰리면서 김씨는 면접 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고용위기지원센터 상담직원과 약 30분간 상담 끝에 김씨는 지난달 말 채용설명회에 참여한 한 제조업 생산직에 지원하기로 마음을 굳힌 뒤 자리를 떠났다.

3년째 이어지는 고용위기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지엠 군산공장이 폐쇄된 지 3년이 지난 군산의 고용상황과 지역경제는 여전히 비상상태다. 2018년부터 고용위기지역·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으로 지정돼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지만 코로나19 사태까지 ‘엎친 데 덮치며’ 회복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군산시가 민간에 위탁해 운영하는 고용위기지원센터에는 이러한 위기상황을 반영하듯 한국지엠·협력사 퇴직자부터 구직난에 시달리는 지역 청년들, 전업주부에서 고용시장으로 떠밀린 중년 여성들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4일 오전 고용위기지원센터를 방문해 대기업 철수로 시름에 잠긴 군산의 고용위기 단면을 살펴봤다.

실업급여 신청을 위해 고용복지플러스센터를 찾았다가 직원 안내로 고용위기지원센터를 방문했다는 장임호(69)씨는 지난해 말 코로나19 여파로 석유유통 대리점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해고됐다. 30년 넘게 주유소업계에서 운송업무를 한 그는 “자기소개서는커녕 이력서도 써 본 적이 없다”며 구직에 어려움이 크다고 호소했다. 상담을 마친 장씨 손에는 입사지원서류 컨설팅·취업지원특강 같은 서류 뭉치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그는 “실업급여 168만원을 매달 받고 있고 수급기간도 꽤 남았지만 월 150만원을 받더라도 일을 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장씨처럼 처음 이력서를 쓰게 된 실직자뿐만 아니라 처음 구직활동을 하는 자영업자도 고용위기지원센터를 찾았다. 부부가 횟집을 운영한다는 이진기(63·가명)씨는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았다. 가게도 집도 부동산에 내놨지만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 하루하루 빚만 쌓이고 있단다. 이씨는 “밥에 물만 말아 먹으며 지내는데 뭐라도 찾아보려고 왔다”며 “그래도 사채는 안 썼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설립 이후 고용위기지원센터에선 현재까지 1만9천940건의 방문상담, 3만2천795건의 유선상담이 이뤄졌다(5월14일 기준, 중복 포함). 실업급여 수급신청을 하는 고용노동부 고용복지플러스센터와는 달리 취업지원·직업훈련 등에 방점이 찍힌 만큼 군산시에서 이러한 수요가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다. 고용위기지원센터 취·창업지원프로그램을 이용한 군산시민은 지난해 2천850명이었다. 이 중 1천395명(48.9%)이 실제 취·창업으로 연결됐다.

고용위기지원센터가 군산지역 실직자들의 재기를 돕는 발판 역할을 맡고 있지만 고용위기에 ‘사후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근본적 한계도 존재한다. 지역 내 양질의 일자리가 많아야 취업상담과 일자리 매칭의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정부는 신산업 유치에 힘쓰지만 가시적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백일성 군산고용위기종합지원센터장은 “2018년 ‘새만금 재생에너지 비전선포식’ 이후 50여개 기업을 유치하고 투자협약을 통해 6천700여명 일자리를 창출하기로 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투자 시기가 지연되면서 현재까지 실질적으로 고용된 인원은 1천여명 정도”라고 말했다.

설립 초기만 해도 한국지엠·협력사 퇴직자가 이용자의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특정기업 소속이 아닌 일반 구직자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그래프1·2 참조> 군산시에서 취업지원·센터운영을 수탁한 캠틱종합기술원의 이수진 군산고용위기지원센터 책임매니저는 “한국지엠 퇴직자들의 경우 기존 노동환경과 간극이 큰 탓에 상당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며 “전업주부였던 중년여성들이 생계난으로 취업전선에 뛰어들며 이용률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자동차·조선업발 위기 전체 제조업으로 ‘확산’
상가는 텅 비고, 인구는 줄고

지엠 철수 이후 군산시 인구유출은 심각하다. 2017년 27만4천900여명에서 자체 마지노선으로 여겼던 ‘27만명’이 지난해 1월 무너졌고 현재까지 26만6천800여명(4월 기준)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한국지엠 군산공장과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는 군산 지역내총생산(GRDP)의 23.4%를 차지했다. 2017년 7월 군산조선소 가동중단과 2018년 5월 지엠 군산공장 폐쇄로 1만6천931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주력산업 붕괴로 광업·제조업 취업자수도 2017년 하반기 25만9천명에서 2020년 하반기 20만1천명으로 5만8천명 감소했다. 고용률은 같은 기간 52.6%에서 55.4%로 소폭 상승했지만 전북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그래프3 참조>

이어 최근 상용차·화학 분야로 고용위기는 전이되고 있다. 지난해 반도체용 폴리실리콘을 만드는 OCI 군산공장에서 450여명, 타타대우상용차에서 110여명이 구조조정됐다. 산업위기가 고용위기로 이어지고 고용위기가 인구유출과 경기침체로 연결되는 악순환에서 군산은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다.

군산의 위기는 지역경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군산 최대 번화가인 수송동 일대에는 ‘임대문의’ 플래카드가 걸린 가게가 많다. 대로변 목 좋은 상가 1층도 비어 있다. 코로나 사태로 전국에 일상화된 풍경이지만 군산은 사태가 더 심각했다. 군산지역 소규모 상가(2층 이하, 연면적 330제곱미터 이하) 공실률은 2017년 1분기 9.2%에서 2020년 4분기 26.6%까지 치솟았다.

지엠공장이 있던 소룡동 일대 먹자골목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다양한 종류의 식당들이 밀집해 있어 공장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외부 군산시민들도 찾던 소룡동은 이미 “죽은 상권이 된 지 오래”라고 주민과 상인들은 입을 모았다.

“소룡동 상권은 이미 죽었고 초토화됐어요. 손님이 와야 가게에서도 사람을 쓸 텐데 여기 일자리도 없어서 큰일이에요.” 소룡동에서 만난 주민 조영미(49·가명)씨가 말했다. 전업주부였던 조씨는 생계난으로 일자리를 찾다 한 달 전 겨우 파트타임 식당 종업원 자리를 구했다고 전했다.

먹자골목 안에서도 ‘잘나가는 집’으로 알려진 고깃집 주인 임소영(50·가명)씨는 “지엠 철수 이후 코로나19까지 겹치며 월 매출이 6천만원에서 1천만원으로 6분의 1 수준이 됐다”며 울상을 지었다. 3년 전만 해도 4~5명의 아르바이트와 주방직원까지 있었지만 종업원은 아르바이트 1명으로 줄어들었다. 임대료도 18개월째 밀렸다. 양씨는 “단체배달 주문을 받아 ‘박리다매’ 형태로 그나마 가게를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전기차 생산과 공장 재가동 소식이 들려오지만 지역경제에 훈풍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승용차 생산 중단된 전북
버스·트럭 등 상용차 생산도 곤두박질

전북도의회에 따르면 최근 6년간(2014~2020년) 전북의 자동차 생산량은 연간 16만2천400여대에서 4만대로 70% 가까이 줄었다. 한국지엠이 2018년 문을 닫으면서 승용차 생산이 중단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2014년 전북의 자동차 생산량을 보면 승용차가 8만대, 버스와 트럭 등 상용차가 8만1천대다. 2016년 승용차 생산량은 3만3천대로 줄었고, 상용차는 6만5천대로 감소했다. 지엠이 철수한 이듬해인 2019년 승용차는 단 한 대도 생산하지 못했다. 상용차 생산량은 4만5천대로 4년 전보다 절반이 감소했다. 지난해는 가까스로 4만대를 생산했다.

강문식 민주노총 전북본부 정책국장은 “한국지엠 군산공장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은 것이 아니다”며 “지엠이 생산물량을 줄이며 폐쇄할 수 있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냈고, 노조에서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지역에서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근 상용차를 생산하는 현대차 전주공장과 타타대우 노동자들은 상용차 위기가 외환위기 때보다 심각하다고 진단한다. 전북도와 지역사회가 상용차산업 위기를 함께 뛰어넘지 못하면 지엠이 떠난 군산의 악몽이 되풀이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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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5~6대 만들던 고속버스 2대만 생산
한 달에 10일 버스공장 가동중단

지엠이 떠난 공장은 ㈜명신이 2019년 6월 인수해 다음달 가동을 앞두고 있다. 대창모터스의 ‘다니고 밴’ 3천대를 위탁생산한다. 가동 전인 명신공장 앞은 적막감이 흘렀다. 방문차량 주차장은 공터처럼 비어 있었고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났다. 반면 현대차 전주공장 주변에는 출근한 주인을 기다리는 승용차들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공장 안 분위기는 달랐다. 버스1공장에 들어서니 주로 어린이집 통학차량으로 이용하는 미니버스와 고속버스 생산라인은 조립을 기다리는 차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썰렁했다.

“꼭 이빨 빠진 것 같죠? 원래는 컨베이어벨트마다 차들이 줄줄이 있어야 하는데 생산량이 줄어서 ‘공피치’가 많이 생겼어요.”

김성훈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전주공장위원회 조직2부장의 말이다. 피치는 시간당 생산대수(UPH)를 뜻하는 말로, 공피치는 원래 컨베이어벨트 위에 있어야 할 차체가 없다는 말이다. 컨베이어벨트 속도는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조립하는 차량을 중간중간마다 빼는 방식으로 생산량을 떨어뜨렸다. 고속버스의 UPH는 0.679다. 하루 8시간 동안 5~6대를 조립하던 노동자들은 ‘공피치’가 늘면서 이제 하루 두 대만 조립한다. ‘사드’ 이슈로 중국 관광객이 줄면서 얼어붙은 버스 내수시장은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생산량이 줄면서 현대차는 올해 초부터 부분휴업을 실시하고 있다. 고속버스와 쏠라티 생산라인의 경우 다음달 10일 동안 생산을 중단하는 방안을 노사가 협의 중이다. 일반버스와 미니버스 생산라인도 5일간 가동을 중단한다. 배상용 전주공장위원회 버스부대표는 “휴업기간이 늘면서 임금이 줄어 생활에 어려움이 크다”며 “쉬는 기간 택배나 배달 알바를 하는 조합원도 생기고 있다”고 전했다.

코로나19 악재로 수출시장이 막힌 트럭공장도 사정은 비슷했다. 노사는 시간당 생산대수를 8대에서 6대로 줄이는 방안을 두고 협상 중이다. 이미 3년 전 현대차 전주공장 노사는 트럭공장 UPH를 12.39대에서 8대로 줄이면서 300명을 다른 공장으로 전환배치하는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지난해도 100명이 다른 공장으로 떠났다.

주인구 지부 전주공장위원회 의장은 “지금처럼 생산량이 계속 줄면 사측이 현재 2교대를 1교대로 전환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주 의장은 “이런 상황에서 전북의 노동정책을 보면 참 답답하다”며 “있는 일자리도 지키지 못하면서 노동을 배제한 채 생색내기형 일자리 창출만 골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방 노동정책은 없고 ‘새만금’이라는 가상화폐만 좇아”

승용차에 이어 상용차산업마저 붕괴하면 전북의 제조업은 기반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북에 있는 현대차 전주공장과 타타대우상용차 군산공장에서 전국의 상용차 95%가 생산된다. 전북지역 상용차 하청·협력업체 400여곳을 포함하면 종사자수는 2만명에 이른다. 전북지역 제조업 종사자의 23%, 제조업 출하액의 21%를 차지한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전북을 ‘고용위기 선제대응 패키지 사업’ 대상지역으로 선정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2025년까지 전북지역에 1천억원을 투자해 1만명을 고용한다는 목표로 추진되는 이 사업은 △상용차산업 살리기 △미래형 자동차 신기술 산업 △식품산업 고도화 △고용안정 거버넌스 구축, 네 가지가 핵심이다. 전북도는 이를 추진할 전북고용안정사업단을 발족하고 지역에서 일자리 플랫폼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기존에 고용서비스사업과 차별성 없이 중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상용차산업 살리기의 경우 부품 기술개발을 지원하는 자동차융합기술원에 예산이 쏠리면서 노동계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전북도가 노동자의 목소리는 듣지 않고 새만금 개발에만 ‘올인’하고 있다는 비판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전북지역 노동계 관계자는 “고용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도 전북도는 국책예산의 상당 부분을 새만금에 쏟아붓고 있다”며 “이미 수십 조원이 들어갔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새만금이 가상화폐와 다를 게 뭐냐”고 꼬집었다. 올해 전북 관련 국가예산은 총 8조2천700억원인데 이 중 15.9%(1조3천164억원)가 새만금 개발 예산이다. 지난해보다 860억원이 줄었다. 올해 예산은 새만금과 전주 간 고속도로 건설에 4천300억원, 신항만 건설에 744억원, 국제공항건설에 120억원, 새만금 남측 남북도로 건설에 2천330억원, 간척사 박물관 건립에 11억원 등이 쓰인다.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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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말뫼 모델 이야기하는 전북
‘말뫼’를 만든 건 투자가 아니라 ‘대화’

금속노조 전북지부가 1년여 가까이 요구한 끝에 올해 2월 전북에서 상용차산업 노사정협의회가 구성됐다. 지난 26일 열린 2차 회의에서 노조는 다소 파격적인 안을 제시했다. 전북지역의 탄소배출량 절감 목표를 제시하고 노사정이 실천협약을 맺자고 먼저 제안한 것이다. 고용위기와 산업위기, 기후위기를 다같이 넘자는 의미로 노동계가 먼저 ‘넷제로’ 협약을 꺼낸 첫 사례다. 전북도는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전북도 기업지원과 관계자는 “그 자리에서 처음 제안을 받아서 내부에서 검토를 해 봐야 한다”며 “상용차산업 지원방안은 전북 상용차발전협의회에서 논의를 거쳐 다음달 초 발표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12월 출범한 상용차발전협의회는 기업과 전북도, 산하기관들이 참여하는 협의체다. 노동계는 처음부터 부르지 않았다. 상용차산업 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정협의체가 구성됐지만 정작 중요한 논의에서는 노동계가 배제되는 상황이다.

송하진 전북도지사는 새만금과 군산 문제를 이야기할 때 여러 차례 스웨덴 ‘말뫼’를 언급했다. 현대중공업에 1달러에 팔린 쿠쿰스조선소 골리앗 크레인 때문에 우리에게 친숙한 말뫼는 주력산업이던 조선업이 무너지면서 1990년대 초 인구의 10%인 2만7천명이 실직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2000년 들어 유럽 최고의 친환경·정보·복지 도시로 거듭났다. 스웨덴 사민당 정부는 처음엔 조선업을 살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쿠쿰스조선소를 직접 인수해 4조원을 투자했고, 이후에는 대규모 실직을 막기 위해 사브(Saab) 자동차 공장을 유치했다. 지엠에 인수된 자동차공장은 3년이 되지 않아 폐쇄됐다.

그런 말뫼를 바꾼 것은 ‘말뫼 2000’ 프로젝트로 불리는 6개월간의 사회적 논의였다. 한국노총 연구용역으로 이호근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작성한 ‘주요 국가의 지역 사회적 대화와 노조의 역할’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말뫼에서 노조는 전통 제조업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파트너의 중심축으로 산업구조 변화를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말뫼를 바꾼 것은 투자가 아니라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의사결정 과정’이었다.

‘해고 없는 도시’ 성공한 전주의 도전
‘공동교섭’ 실험 나선 군산형 일자리

<매일노동뉴스>가 17개 광역단체 지방노동정책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전북 노동정책은 전국에서 최하위 수준이다. 노동정책 기본계획도 없고, 노동정책을 집행할 인력과 조직도 대단히 부족하다. 그렇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주와 군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 중이다.

전주시는 지난해 ‘해고 없는 도시’ 선언으로 주목을 끌었다. 선언 이후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 전국 평균 이직률은 5%, 전북은 6%였는데 해고 없는 도시 상생협약을 체결한 기업의 평균 이직률은 2.7%로 절반 수준이었다.

박덕규 한국노총 전주시지부 의장은 “회사도, 노조도, 노조가 없는 사업장도 ‘해고 없는 도시’ 선언으로 같이 살아야 한다는 심리적 방어선이 생겼다”며 “고용을 최대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커진 것이 성과”라고 말했다. 전주시는 이 과정에서 노사정이 어떻게 머리를 맞대야 하는지, 신뢰를 쌓아 가는 과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학습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올해는 지속가능한 전주형 고용안정망 구축에 나섰다. ‘4+1’ 전주형 고용안정망은 거버넌스 구축과 고용안전망 구축, 플랫폼 노동자 지원사업, 전주형 일자리 사업 네 가지 전략에 ‘중소기업 종사자 퇴직연금 지원사업’이 추가됐다. 군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소기업이 많은 전주시에서 이직을 막는 방법으로 ‘퇴직연금’ 얹어 주기를 택한 것이다. 사용자와 노동자, 전주시가 각각 일정 금액을 적립해 퇴직연금으로 지원해 주는 방식으로 올해 희망기업 100곳을 모집해 시범운영하고 내년부터 본격화하기로 했다.

해고 없는 도시 선언 과정에서 뜻을 모은 노사정은 거버넌스를 상시화하기로 했다. 기업인과 노동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고용안정 사회연대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위원회는 고용안정지원사업을 논의하고 의결한다.

군산형 일자리도 본궤도에 오르고 있다. 공동교섭과 공동복지기금, 노동이사제 등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노사 공동 결정기구들을 두고 있다. 원·하청 간 임금격차 없는 일자리가 노사의 공동교섭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을지 군산의 실험에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김미영·어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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