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량진 학원가엔 ‘드림’ 이름을 붙인 학원과 고시텔이 많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된다.”

변하지 않는 명제다. 을들의 전쟁으로 비화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논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100세 시대에 노후불안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가르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중병에 걸리면 모아 둔 돈을 소진하기 십상이다. 임금소득만으로 평균 매매가격 8억975만원(2월 기준, 월간 KB주택시장동향 시계열 자료)의 서울 집값을 감당하기란 불가능하다. 2019년 기준 연봉 6천950만원을 넘으면 임금 소득 상위 10%에 해당하지만, 이런 고소득자가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 13년을 모아야 겨우 서울에 집 한 채 마련할 수 있다. 시장임금에 의존도가 높은 각자도생의 삶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면 미래는 현재보다 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은 정글자본주의 극복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공정’을 넘어 ‘공존’으로 나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연대.” 노동계 인사와 전문가들이 제시한 과제다. 연대를 실천하기 위한 장기적·구체적 로드맵을 주문한다.

“정체된 산별교섭,
멈춰선 정규직-비정규직 연대임금”

한국의 노동운동 지형은 ‘연대’하기 좋은 상황이 아니다. 독일처럼 산별노조 형태를 형식적으로 갖추긴 했지만 기업별 교섭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기업별 교섭은 대개 임금인상과 고용유지 중심의 투쟁으로 귀결된다.

조돈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공동대표는 “정부가 고용·소득을 보장해 주지 않는 데다 고용보험 제도는 임금노동자 3분의 2밖에 가입되지 않는 순 엉터리”라며 “정부의 정책 실패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가져오고, 기업별 노조 체제가 이런 문제를 확대 재생산했다”고 진단했다.

산별노조를 지향하는 노동운동은 계속돼야 하지만 격차를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2.5%인데 노조에 가입한 사람 두 명 중 한 명(54.8%)은 300명 이상 사업장 소속이었다. 부문별로 살펴보면 고용이 안정된 공무원(86.2%)·공공부문(70.5%)·민간부문(10%)·교원(3.1%) 등이다. 기존 노조가 ‘아래로의 연대’ 운동을 적극 확산하지 못한다면 격차 심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정규직 전환=채용 불공정’이라는 논란은 일부 혹은 소수 노동자의 목소리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노조는 늙어 가고 있다. 최근 민주노총이 정기대의원대회에서 공개한 조직 현황에 따르면 산별노조 전체 조합원 평균 연령은 45.6세다. 그런데 기업 안 청년 규모는 늘고 있다. 청년을 끌어안지 못한다면 노조는 물론, 평등을 지향하는 노조 가치도 지키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을 활동가들도 느끼고 있다.

커지는 세대별 노동자 단절 위기감

김현기 인천교통공사노조 수석부위원장은 공기업 취업준비생과 비정규 노동자의 고민을 이해할 만하다고 했다. 그는 2013년 인천교통공사 비정규 노동자로 4년째 일하던 2017년 정규직 공채에 합격해 입사했다. 김 수석부위원장은 “4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비정규직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며 “하지만 너네는 먹고살 만하니 양보하라는 일방적인 소통은 (청년들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기업정보사이트 크레딧잡이 국민연금 납부액을 바탕으로 추산한 인천교통공사 노동자 평균임금은 4천920만원이다. 이 회사가 머신러닝으로 추정한 대졸 평균 연봉은 3천186만원이다.

김 수석부위원장은 노조가 청년 친화적이 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노조가 나를 위해, 우리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고 체감하는 것이 먼저”라며 “(하위직) 임금을 올리고, 선·후배 격차를 줄이고, 꼰대 문화도 바꾸려고 노력하니 노조 호감도가 올라가고 비정규직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챙겨야 한다는 인식으로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강호원 서울교통공사노조 수석부위원장은 “지금처럼 간다면 세대별 노조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정규직화 반대는 잘못됐다고) 단순 비판만 해서는 해결하기 어렵고, 회피전략만으로도 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세대 간 소통을 위한 노조 내부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조상수 전 철도노조 위원장은 “(공정) 가치에 대해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대화가 필요하다”며 “기성세대와 청년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고민해 보면 후배들이 보기에 선배가 그리 존경스럽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는 고민을 털어놨다.

“사회임금 확대 증세 요구로 이어져야”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재벌 중심 자본이 하청을 쥐어짜는 구조, 정부 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면서도 “거기에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고 노동운동의 임금 극대화 투쟁 전략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2020년 상위 10% 노동자와 하위 10% 노동자의 월 임금 격차가 6.25배라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조사를 언급하며 “하나의 계급으로 동질화해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고 진단했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임금격차 해소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의 원·하청 임금연대나, 금융노조의 하후상박 임금인상 시도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시장임금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고, 의료·주거·교육을 포괄하는 사회임금을 늘려야 채용 과정에서의 지나친 경쟁이나 논란을 완화해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계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민주노총 최대 산별노조인 공공운수노조는 최근 정기대의원회를 열고 ‘공공성 강화’ ‘노동권 보장’을 주요 의제로 하는 사업 계획을 채택했다. 한국노총은 코로나19 재난 상황 속 취약계층을 위해 최근 재난으로 돈을 버는 기업에 더 많이 과세하도록 하는 초과이익공유세 도입을 요구했다.

갈 길은 멀다. 오건호 공동운영위원장은 “노동운동도 2000년대에 들어 사회임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회 공공성·사회안전망 강화, 복지국가 건설 등을 하나의 목표로 설정했다”며 “실질적으로 사회안전망이나 복지확대를 위한 종합적인 비전을 가지고 조직 자원을 투입한 운동이 얼마나 진행됐는지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의료·주거·연금 등 사회임금 확대는 조세가 기반이 돼야 하기 때문에 증세운동과 함께 가야 한다”며 “조세 저항이 강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광범위한 조직운동인 노동운동이 증세 장벽을 허물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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