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 사진은 어느덧 빛바래고 울었다. 표지석에 매어 둔 비정규직 철폐 머리띠도 물 빠져 낡아 갔다. 붉고 노란 조화가 다만 사철 변함없이 무덤가에 피었다. 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몸자보’를 만들어 입고 새로운 것 없는 싸움에 나섰다. 광장에 새로운 천막을 쳤고, 새로운 다짐을 나눴다. 그 앞 태극기 휘날리며 오가는 노인의 악다구니를 걱정하며 시린 손을 비빈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는 낡은 구호를 오늘 다시 꺼냈다. 입사한 지 1개월이 되지 않은 스물아홉 청년이 종이 만들던 기계에 빨려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붉은 단풍잎 흙길에
일방통행 길을 거슬러 간다. 엎어져 코 깨지기를 반복하며 사람들이 느릿느릿 행진한다. 거기 차 다니는 도로였지만 본래 사람 다니는 길이다. 차가운 도로에 엎어지기를 계속하느라 뜨거워진 이마에 물 맺혀 흐른다. 지켜보며 뒤따르던 동료 눈가에도 물 맺혀 깊은 주름 타고 번진다. 시름 깊은데 웃음 잦다. 쉬는 시간이면 도롯가에 꼭 붙어 앉아 손길 눈길 나누다 울
언젠가 대학교 학생회관 복도에 페인트와 시너 냄새가 진동했다. 낡은 소파 양쪽으로 청테이프 착착 붙어 흰 천이 팽팽하게 걸렸다. 붓과 페인트 통 든 사람이 일필휘지, 빈자리를 거침없이 채워 갔다. 넘쳐흐르지도, 부족해 흐릿하지도 않아 선이 매끈했다. 장인의 솜씨였다. ○○체로도 불렸다. 한때의 구호가 생생하게 거기 담겼다. 늦은 밤, 채 마르지 않은 현수막
용균이 엄마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서울 광화문역에서 정부서울청사 앞까지 걸으면서도 자꾸 들여다본다. 위험의 외주화 중단과 중대재해기업 처벌을 촉구하던 집회 맨 앞자리에 앉아서도 용균이 엄마는 틈틈이 스마트폰 들어 살핀다. 거기 할 말이 많이 들었다. 새로운 것도 없는 말이었다. 무대에 올라 용균이 엄마는 아들 보낸 지 1년이 가까운 지금, 달라
저기 앉은 문정현 신부의 머리칼과 수염은 온통 희고, 피부는 검고 또 붉었다. 희고 검고 붉은 것이 품에 안은 판화의 빛깔을 닮았다. 깊은 주름과 바탕의 거친 선이 또한 그랬다. 판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적 필요에서 불경과 성서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삽화에서 비롯됐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땅에선 1980년대, 판화가 노동자·시민의 이야
한때 크고 무거운 카메라와 렌즈는 기자증을 대신하곤 했다. 공연장이나 공사 현장에서 형광 스태프 조끼가 그러했듯 말이다. 좋은 촬영 조건을 찾아 무대에 거리낌 없이 오른 건 대개 큰 카메라였다. 스마트폰은 눈치를 살펴 주저했다. 오랜 관습이었으나 곧 뒤집어질 구습이기도 했다. 누구나가 찍는다. 저마다의 언로를 가진 사람들은 이제 대형 집회 무대에 거리낌 없
쪼르르 담벼락에 기대어 앉은 저들은 닮았다.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다. 한솥밥 여러 끼를 먹었으니 식구라고 할 만하다. 요즈음 가족보다 자주 보는 사이니 친한 친구다. 길에 나서 같이 밥을 굶으니 동지다. 언젠가 나란히 앉아 보자기 두른 채 머리를 깎았는데 스타일이 한가지였다. 길이며 빛깔과 구부러진 모양도 갖가지였던 머리칼은 그날 아스팔트 바닥에 뒹굴었다
추석 때 시골집에 내려가니 먼저 와 있던 조카들이 나를 무척이나 반긴다. 와이파이, 와이파이, 무슨 사자성어 되뇌듯 외치며 뒤를 따른다. 휴대용 와이파이 라우터를 내어 주니 신났다. 마룻바닥에 제각기 자세로 눕고 엎드린 채 스마트폰 삼매경이다. 유튜브 영상을 보고 또 본다. 놀이의 장이다. 얼마 전 이사해 집 고치느라 바쁜 동네 아빠는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높다란 빌딩 주변 잘 관리된 잔디밭 곳곳에 솟은 스피커에서 옛 노래가 흘러나왔다. 새마을운동 시절 노래 같다고 누군가 평했다. 그 노래 1절 끝 즈음에 “우리 도로공사” 하는 가사가 나왔는데, 가만 귀 기울여 듣던 사람들, 그 노래 1절 끝 무렵 “우리 도로공사” 하는 부분에서 화들짝 놀라고 만다. 입에서 험한 말이 왈칵 쏟아졌다. 욕 비슷한 것이었다. 이
비 한바탕 요란하게 쏟아지곤 부쩍 하늘이 높다. 가을볕에 젖은 옷을 말린다. 전날 대법원 앞에서 사람들 환호성이 하늘을 찔렀고, 보 터지듯 물이 왈칵 퍼부었다. 가방에서 척척 우비 꺼내 입었는데 소용이 적었다. 된바람에 수평으로 퍼붓던 물줄기에 그만 흠뻑 젖고 말았다. 누군가 우리의 눈물이라고 했는데, 왈칵 우는 이가 거기 많아 어색하지 않았다. 비 예보를
처서도 지났는데, 처지가 별 다를 바 없어 용역노동자는 늦더위 속 길에 앉았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 사이로 해 들어 빛났다. 거기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뭉쳐 이마로 흘렀다. 주름 두어 줄에 들어 고였다. 물방울 맺힌 생수통 들어 까맣게 탄 팔과 목과 머리 여기저기에 갖다 댔다. 가을 문턱, 좀처럼 가시질 않는 한낮 더위와 햇볕과 싸운다. 간접고용 불안과
8월 광복의 날. 깃발 세운 사람들이 비 내린 광장에 모여 자주와 평화를 곱씹었다. 일본의 경제도발을 규탄했다. 노, 아닌 건 아니라고 팻말 들어 외쳤다. 전쟁통이다. 무기는 경제였다. 문제는 경제라고 펜 가진 사람들이 연일 제목을 뽑는다. 약속이라도 한 듯, ‘이 와중에’가 붙는다. 반대 의견을 손쉽게 잠재우는 마법의 단어다. 주로 파업 앞에 붙는다. 벼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두고 금손이라고 한다. 반대의 경우는 흙손·똥손으로 불린다. 흙수저·금수저 말 짓던 방식이다. 예전엔 미다스의 손이란 표현을 많이 썼다. 마이너스(-)의 손이 그 반대편 의미를 맡았다. 금손으로는 부족했던지, 다이아몬드손이란 표현도 종종 쓰인다. 흔치 않아 귀한 능력을 이른다. 노조 조끼 흔한 몸자보에 흔치 않은 그림과 문구가 붙어
공연 보러 나선 길, 아이는 광화문광장에 나부끼던 태극기에 관해 물었고 엄마 아빠 말이 허둥지둥 길었다. 거기 곳곳 내걸린 성조기와 파면당한 전 대통령의 사진 현수막까지 설명하느라 더운 날 진땀을 뺐다. 아이는 궁금한 게 많았는데, 그건 대개 아빠도 여태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한 것들이었다. 줄줄 흐르던 땀이 입으로 들었다. 씁쓸했다. 대형 스피커 통해 울려
옆자리 기자회견 기다리던 기자가 기웃거리자 기울어진 선전물을 세우려고 농성하던 사람이 바삐 움직였다. 그 아래 앉아 졸던 이의 머리가 자꾸만 기울었다. 맞잡은 손이 풀릴 때마다 화들짝 놀라 균형을 잡곤 했다. 오뚝이처럼 흔들거렸다. 폴리스라인이 세련되고 튼튼한 철제 구조물로 바뀌었다. 언젠가 시위 나선 사람들이 그 앞 담을 넘었다는 이유로 벽이 부쩍 높았다. 지키는 눈이 많았다. 시위대를 막기 위한 철제 펜스도 가지런히 인도에 누운 채로 상황을 대비했다. 그 틈틈이 이런저런 기자회견이 보도블록 좁은 틈 잡풀처럼 삐죽 솟았다. 무성했
여름, 친한 사람들은 관광버스에 올라타 먼 길을 떠났다. 커다란 여행용 배낭을 뒤져 간식을 나눴다. 수다가 멈출 줄을 몰랐다. 집에 남은 아이와 남편 얘기에 이르러서는 한숨도 섞였다. 마산톨게이트를 지나 고속으로 달린 버스는 서울톨게이트 너머 강남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조끼를 맞춰 입은 동료들은 거기 상가에 들러 챙이 넓은 모자를 같이 샀다. 꽃무늬와 여
대량생산, 저비용, 고효율은 자본의 말이었다. 오랜 주문이었다. 대량해고, 고비용, 저효율 따위는 노동자를 향한 말이었다. 여전한 저주다. 해고는 죽음이라고 언젠가 잘린 사람들이 말했는데, 그건 연이은 죽음 끝에 뻔한 말이 되고 말았다. 낡은 노조 조끼엔 향냄새가 뱄다. 일터로 돌아가는 데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근로기준법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고 1
관심을 가지면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마트노동자들의 근골격계질환 문제를 제기하는 토론회 자리, 발표자는 저기 구석자리 스피커 아래 마이크 들고 선 방송사 노동자의 자세를 걱정했다. 앉아 듣던 사람들의 시선이 구석을 향했고, 웃음이 번졌다. 가벼운 지적이었지만 날카로웠다. 노동자 건강권에 대한 관심이 칠판 뒤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던 어떤 노동을 드러냈
이런저런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았던 하루, 퇴근길 상념이 짙다. 종일 추적거리던 비가 그치고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이 짙었다. 교차로에 빨간불 들어와 급히 멈춰 섰다. '신홋발'이 마음 같지 않아 혼잣말이 툭 튀어나왔는데 과했다. 그래도 맨 앞이구나, 되지도 않는 이유 들어 마음 추슬렀다. 동네 친구 집에 맡겨 둔 아이 생각에 급했다. 어
길에 나설 일이라는 게 어디 좋은 날 잡고 기다려 주던가. 겨울이고 여름이고 미세먼지와 큰비 따위를 따질 겨를이 없다. 그저 몇 가지 필수품 챙겨 견딜 수밖에. 그중에 모자와 토시와 손풍기가 여름철 집회 '잇템'에 든다. 야구모자부터 세련된 밀짚모자까지 다양한데, 가성비와 착용감 등에서 저 꽃무늬 모자를 따라갈 게 없다. 조경 일이며 밭일하는 사람들이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