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쪼르르 담벼락에 기대어 앉은 저들은 닮았다.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다. 한솥밥 여러 끼를 먹었으니 식구라고 할 만하다. 요즈음 가족보다 자주 보는 사이니 친한 친구다. 길에 나서 같이 밥을 굶으니 동지다. 언젠가 나란히 앉아 보자기 두른 채 머리를 깎았는데 스타일이 한가지였다. 길이며 빛깔과 구부러진 모양도 갖가지였던 머리칼은 그날 아스팔트 바닥에 뒹굴었다. 바람은 같았다. 비정규직 차별 해소, 대통령의 약속 이행을 촉구했다. 머리칼이 얼마간 자라 저만큼이다. 요만큼도 달라진 게 없다고 엄마는 말했다. 농성 가방을 꾸렸다. 짐이 적지 않아 여행용 캐리어를 꾹꾹 눌러 채웠다. 뱃속은 비웠다. 단식농성은 기한의 정함이 없었다. 오래 끓인 곰국이 혹시 상할까 싶어 작은 비닐에 나눠 담아 냉동실에 넣어 두고 나왔다. 남편은 알아서 잘 챙겨 먹는다고. 아이들이야 다 커서 걱정 없다고 말했다. 늦둥이 초등학생 아이를 남기고 온 엄마가 다만 낯빛이 살짝 어두웠다. 아이들에게 비정규직 물려주지 않겠다고 시작한 노조였고 싸움이었는데 아이들한테 지금 미안한 마음 어쩔 수가 없다. 교육청의 근속수당 500원 인상안을 모독이라고 느꼈다. 공정하지 않다고 여겼다. 공정임금제 공약 이행 요구를 앞세웠다. 매년 집 나와 이게 뭐 하는 거냐고, 얼굴 잔뜩 찌푸렸다. 옆자리 동료가 가져온 소금통을 보고는 금세 또 웃었다. 이제 막 두 끼 굶은 참인데, 소금이 그렇게 맛나더란다. 그냥 소금이 아니고 아홉 번을 구운 것이라고 덧붙였다. 단식 농성이니 엄마들의 싸움 한 꼭지가 또 9부 능선 즈음이다. 매년 반복됐다는데, 언제 한 번 수월한 적이 없었다. 닮은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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