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관계 로드맵 입법안과 특수고용직 보호를 위한 각종 법률 개정안이 오는 정기국회에서 다뤄진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 법안이 발의되지만,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찬반 의견이 있다. <매일노동뉴스>는 노사관계 로드맵, 특수고용직 보호법안과 함께 노사정위에서 논의 중인 산재보험법개정안에 대한 노동운동가, 학자, 변호사 등의 의견을 연재한다. 이 기고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양측으로부터 모두 받을 예정이다. <편집자주>



지난 9월11일, 노사정대표자회의는 구성원 중 하나인 민주노총을 배제하고 ‘노사관계선진화방안’에 전격 합의하였다. 합의주체들은 한결같이 ‘결단’이었음을 강조하였지만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는 물론 시민단체와 양식 있는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합의’가 노동기본권을 대폭 후퇴시킨 ‘후진화 방안’일 뿐만 아니라 ‘밀실야합’이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이미 그 과정은 충분히 알려져 있어 재론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전임자 임금’과 ‘기업단위 복수노조’에 관해서는 관심의 초점이 모아졌지만 ‘9·11 밀실야합’에는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사항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직권중재와 관련된 부분은 밀실야합의 또다른 백미다. 복수노조 유예가 1,350만 노동자 단결의 자유를 비롯해 노동기본권을 박탈하는 범죄행위라면, 직권중재 관련 조항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두번 죽이는 동일한 범죄행위다.

사기극에 조삼모사

철도와 지하철, 발전(전력)과 가스, 병원 그리고 은행 등은 현행 노동법에 의하면 사실상 합법적인 파업이 불가능하다. 일반사업장은 10일간의 조정기간이 지나면 합법적인 파업이 가능하지만 위에서 열거한 사업장은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지정되어 있어 15일간(10일이 아니다!)의 조정기간이 끝나도 파업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곧 바로 중재에 회부되기 때문에 또다시 15일간 파업을 할 수 없으며, 중재기간 중에 노사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중앙노동위원회가 사실상 사용자중심의 중재재정을 내림으로써 쟁의가 강제로 종료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수공익사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합법파업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철도나 병원에서 파업에 돌입하면 모든 보수언론은 일제히 불법파업이라는 점만을 의도적으로 부각하면서 ‘불법집단’으로 몰아간다. 따라서 필수공익사업장의 사용자들은 굳이 교섭을 통해 타협할 필요없이 불법파업으로 몰아가면 된다(일부사업장은 이러한 제도를 악용해 노조를 파괴할 목적으로 파업을 유도하기까지 한다).

필수공익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파업에 돌입하면 어떻게 될까?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불법파업이지만 그 후과는 참으로 엄혹하다. 집행부의 구속 등 사법처리는 물론이거니와 대다수 간부들의 해고, 심지어 손배 가압류까지. 그래서 노동계는 줄기차게 노동기본권을 말살하는 직권중재제도의 폐지를 요구하여 왔고 이러한 목소리는 비단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강력하게 제기되어 왔다.

‘9·11 밀실야합’에는 직권중재의 폐지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공공부문의 노동자들은 오히려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10월19일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규탄대회가 열렸다. 대다수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이루어진 공공연맹, 보건의료노조, IT연맹의 간부와 조합원 수백이 모여 필수공익사업장 확대와 대체근로 허용, 필수업무유지제도 도입에 대해 강력한 규탄의 목소를 높였다. 이들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말살하는 9·11 밀실야합의 분쇄를 위해 총파업에 돌입하겠다는 입장과 각오를 피력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한마디로 직권중재의 폐지는 사기극이다.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웅이요, 조삼모사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더욱 개악되었다는 것이 정확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파업 유도 우려돼

첫째로 필수공익사업장의 증가다. 기존의 사업장은 그대로 둔 채 항공운수사업, 증기 및 온수공급사업, 혈액공급사업, 폐·하수처리사업을 추가했다. 완전한 폐지가 노동계의 요구임에도 폐지는커녕 축소조차 되지 않고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이것은 2002년 국제노동기구(ILO) ‘결사의 자유위원회’가 권고한 것을 정면으로 뒤집는 행위다. ILO는 ‘대한민국 관련 보고서’에서 “필수공익사업의 항목에 남아 있는 철도, 도시철도 및 석유사업은 엄격한 의미의 필수서비스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엄격한 의미에서 필수서비스에서만 파업권이 금지되도록 노조법의 필수공익사업 항목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다만 “파업 때에도 공중의 기본적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유지돼야 하는 ‘최소한의 서비스’로서 노동조합과 사용자 및 정부가 협의해 정하는 것에는 해당된다”고 밝혔다. 입만 열면 글로벌 스탠다드, 국제기준을 떠벌이는 정부와 자본이 왜 노동법에는 국제기준을 적용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는가 의문이다.

둘째로 대체근무의 허용이다. 단체행동권이 없으면 단체교섭권은 무의미하다. 단결권만 있는 것은 노동조합이 아니며 상조회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점에서 노동기본권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이 세가지는 삼위일체다.

그런데 대체근무가 허용되면 단체행동권이 무력화된다. 대체근무를 통해 업무에 장애가 발생하지 않는데 단체행동이 사용자에 대한 어떠한 압력수단이 되겠는가? 게다가 대체근무가 이루어지면 대체로 비정규직을 확대시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고 이용석 열사가 지난 2003년 10월26일 분신을 통해 널리 알렸으며, 최근의 KTX여승무원의 투쟁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동시에 대체근무는 기존노동자들의 고용안정도 위협할 수 있다. 파업을 이유로 대체근무를 투입하고 파업에 참여한 기존의 노동자들은 해고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합의에는 정리해고기간을 단축하고, 부당해고에 대한 처벌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정리해고를 보다 쉽게 하도록 만들었다. 어쩌면 일부의 사용자들은 정리해고를 하기 위해 파업을 유도할지도 모른다.

셋째로 필수업무유지의무제도가 도입되었다. 필수업무유지의무제도라는 것은 예를 들어 시내버스나 지하철의 경우 혼잡시간(러시아워)대에 운행의 1/2 정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파업참가자를 제한하는 것이다. 어떤 사업장은 필수업무에 해당하는 노동자가 과반수를 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한 사업장 내에서 합법적으로 파업에 참가할 수 있는 조합원과 파업에 참여하면 불법이 되는 조합원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노동자의 분열이 초래될 수 있다. 파업참가가 불법인 조합원이 파업에 참여할 경우에는 대체로 집행부에게만 책임을 물었던 지금까지의 관행과는 달리 조합원 개인이 민형사상의 책임까지 져야 하는 상황이 예상된다. 이럴 경우 사실상 파업은 불가능진다.

그리고 정말 큰 문제는 직권중재가 폐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개악되었음에도 마치 직권중재를 폐지하고 필수공익사업장의 노동자들이 합법적인 파업돌입이 가능해진 것처럼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긴급조정도 살아있는데…

사실 정부나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직권중재가 없어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지난해 아시아나조종사노조와 대한항공조종사노조가 각각 파업에 돌입했다. 두 사업장은 모두 필수공익사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부는 ‘긴급조정’이라는 제도를 통해 파업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직권중재의 폐지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정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런 측면에서 9·11 밀실야합과 국회로 이송된 개정법안은 파업권을 일부 제한하는 수준을 넘어 파업권을 아예 삭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파업을 할 수 없는 노동조합들이 모여 있는 곳, 자본의 천국이다. 9·11 밀실야합의 결과는 그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특징은 궤변이 많다는 것이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형용모순적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사회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킬 수밖에 없는 한미FTA를 통해 사회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에 대해 할 말은 하겠다더니 이라크파병을 비롯해 미국이 요구하면 무조건 OK다. 또한 비정규직을 양산시킬 개악입법을 오히려 비정규 보호입법이라고 선전하면서 강행하고 있다. 9·11 밀실야합에 의한 노사관계 선진화방안 입법도 사실은 노동기본권을 철저하게 박탈하는 후진화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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