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관계 로드맵 입법안과 특수고용직 보호를 위한 각종 법률 개정안이 오는 정기국회에서 다뤄진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 법안이 발의되지만 노동계, 진보진영의 반발은 심하고 국회 안에서도 논란이 예상된다. <매일노동뉴스>는 노사관계 로드맵, 특수고용직 보호법안과 함께 노사정위에서 논의 중인 산재보험법개정안에 대한 노동운동가, 학자, 변호사 등의 의견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지난 9월11일 민주노총을 제외한 노사정 5자가 복수노조 시행을 3년간 유예한다는 합의를 하고 정기국회에서 법안 처리가 논의될 예정이다. 복수노조 허용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20년 동안 주장한 것이고 국제사회의 권고이기도 하다. 대중적 요구와 국제적 압박으로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개정이 검토되었으나 97년에 한차례 5년 유예된 데 이어 2002년에도 또다시 5년 유예되어 10년 동안 그 시행이 유보되어오다 이번에 또다시 3년을 유예하자고 한 것이다.

‘복수노조 허용’은 헌법이 보장하는 ‘결사의 자유’의 매우 기초적인 권리이다. 여러 개의 노동조합 중에 노동자가 원하는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이며, 스스로 추구하는 노동조합을 자유롭게 조직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법은 복수노조 설립을 금지해 옴으로써 그동안 단위사업장에서 한 개의 노동조합이 설립되면 그 사업장에서 다른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돼 왔다. 이로 인해 사용자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자신의 측근들로 하여금 어용노조를 설립하게 함으로써 민주노조가 들어서는 것을 차단해 왔다.

2만명의 정규직, 그리고 그만큼의 비정규직이 일하고 있는 포스코 포항공장에 딱 20명짜리 유령노조가 설립되어 민주노조 설립을 봉쇄해 왔다는 것은 그나마 잘 알려진 사실에 속한다.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대기업에서 수많은 민주노조가 결성될 때에도 사용자들은 노조 결성총회 직전에 유령노조를 설립, 신고하는 방법으로 노동탄압을 자행했고, 대기업노조치고 설립 당시 이런 유령노조 설립신고를 철회하는 투쟁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창업주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말로 유명한 삼성그룹도 '유령노조’ 설립을 통한 민주노조 차단에 앞장서 왔다.

가장 큰 피해자는 비정규직·중소영세·여성·이주 노동자들

그래서 일각에서는 마치 이번 합의가 재계 내에서 보자면 삼성과 포스코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면에 불과하다. 복수노조 시행 유예의 가장 큰 피해자는 삼성과 포스코 등 대기업 노동자들이라기보다 1,100만에 달하는 비정규직·중소영세·여성·이주 노동자들이다.

“노동조합에 한 노동자가 찾아왔습니다. 쉬는 시간도 없이 하루 12시간씩 근무하며 월 110만원 받아가는 노예 같은 삶을 바꾸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겠다고 함께 할 사람을 조직하고, 단체협약 요구안을 만들고 회사에 교섭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한국노총 소속의 노조가 있으니 교섭에 응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몰랐는데 회사만이 아는 노동조합이 있었습니다. 노조 결성을 주도한 2명은 해고를 당했고, 사장 아들과 과장이 유령노조 조합원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서울지역일반노조 간부의 말이다. 이 순간에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신음하는 비정규·미조직 노동자들의 노조가입과 설립문의가 들어오고 있고, 복수노조 금지조항에 막혀 좌절하고 쫓겨나는 노동자들이 생기고 있다.

‘결사의 자유’의 기초도 모르는 정부와 사용자, 그리고 한국노총의 주도로 이뤄진 복수노조 유예에, 비정규직 노조들이 주저없이 ‘야합’이란 이름을 붙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야말로 비정규직·중소영세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는 비정규노조들에게는, 이번 야합으로 하루아침에 노동기본권을 도둑맞은 것이나 다름없다.

노조 조직률 10%대, 이중적인 ‘대기업 이기주의 비판’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0%대에 머물러 있다. 87년 대투쟁 이후 89년까지 급속도로 늘어난 조합원 수는 193만여명에 달했다가, 꾸준히 하락하여 1998년 140만명으로 하락했다가 다시 회복되어 2004년 154만여명을 기록했다. 문제는 왜 한국의 노조 조직률이 이토록 밑바닥을 헤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500인 이상 사업장의 노조 조직률이 70%를 넘는 반면, 50인 이하 사업장의 조직률은 채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대기업 중에는 삼성이나 포스코 등 몇몇 사업장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어용이건 민주건 노동조합을 가지고 있는 반면, 비정규직을 비롯한 취약 노동자들의 조직률은 바닥을 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조 조직률이 10%대에 머물러 있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비정규직·중소영세·여성·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조직화가 장애물에 부딪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애물 리스트의 맨 위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복수노조 금지조항’이라는 악법이 놓여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틈만 나면 ‘대기업노조 이기주의’를 들먹이며 “구호로만 얘기할 뿐 대기업노조 중에 진정으로 비정규직을 위해 나서는 곳이 어디 있느냐”고 반복해서 비난해 왔다. 이제 그 말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되돌려줄 차례이다. 비정규직을 노조로 조직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복수노조 허용 3년 유예’를 주도한 대통령은 비정규직 보호 운운할 자격이 없다. 대통령이야말로 대기업노조를 비난하기 위해서만 비정규직 얘기를 활용할 뿐, 비정규직 보호와 권리보장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지 않는가!

우리는 기다리지 않는다

물론 제도와 여건이 충족된다면 1,100만 비정규·미조직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문제는 거의 전적으로 민주노조운동과 비정규운동에 달려 있다. 준비 정도와 사회적 여건에 따라서는 복수노조 허용이 87년에 못지않은 미조직 노동자들의 폭발적인 노조설립과 가입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미조직·비정규 노동자들의 폭발적 조직화와 분출은 복수노조 허용이 유예된 3년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 2005년 기준 한국 노동자들의 연간 실제 노동시간은 2,351시간(주당 45.21시간)으로 OECD 국가 중에서 여전히 단연 최장시간 기록 (OECD 고용전망 보고서)

- 한국은 2004년 한 해에 인구 10만명 가운데 자살하는 사람이 25.2명으로 OECD 국가 중에서 1위를 기록

-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19명으로 전 세계 155개 국가 가운데 홍콩(0.94명), 우크라이나(1.13명), 슬로바키아(1.17명)에 이어 4위를 기록<유엔인구기금(UNFPA)이 발간한 '2006 세계인구 현황보고서'>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최고의 자살률, 최저의 출산율이 보여주듯, 밑바닥 노동자들과 빈곤층의 상황은 ‘처절한 절규’ 그 자체이다. 복수노조 3년 유예로 절규하는 민중들의 분출을 가로막으려는 시도는 허망하게 무너질 것이다. 하반기 민주노총 총파업투쟁에서 화물·덤프를 비롯한 특수고용 비정규직이 선봉에 서고, 또한 총파업투쟁이 단순히 총파업으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미조직·비정규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조직하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1988~89년, 128일 파업투쟁을 전개했던 현대중공업 파업투쟁 현장에서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노동3권이 우리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이상 여러분의 파업은 일어나야 한다. 헌법에만 명시해놓고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은 있으나 마나다. 법은 정당할 땐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에는 지키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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